228화
수성
"어?"
성벽 위로 올라와, 적들과 싸우던 그는 버거움을 느끼고 타개책을 찾기 위해서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 그의 눈 앞에 있는 적들의 전력이 어느정도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요새의 성벽 위라는 위치는 전체적인 요새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좋은 자리였다. 요새에 올라오고 곧바로 덤벼오는 고블린들을 상대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어쩌다 시선이 성벽의 안쪽, 요새 내부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성벽에 있는 고블린들과는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고블린의 병력들이었다. 그것은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고블린들이?"
이미 적이 고블린이라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요새를 함락할 정도의 저력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르디안은 물론, 그가 이끄는 병사들 모두 고블린들을 얕보고 있었다.
요새라는 군락지를 향한 그들의 전진기지를 차지한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크게 무너졌었으며, 아직도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요새를 점령하는 것은 멀쩡한 상태에서와 비교했을 때 월등히 쉬웠을 것이다. 굳건하게 지어졌던 성벽은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얼기설기 엮어놓은것과 같은 상태였으며, 지키고 있을 병력들도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특히나 주변의 성주들이 이전의 군락지 사건을 계기로 서로 사이가 안좋아지면서 물자도 간헐적으로 공급받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군락지에서의 사냥으로 어떻게든 생계를 꾸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전부터 접근금지가 떨어지면서 어려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고블린들이 요새를 점령했다. 그 사실을 주변의 성주를 비롯한 이들이 알게 되면서 일말의 위기감은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정도로 요새가 약체화 되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즉, 고블린들이 강한 것이 아니라 요새가 쉽게 뚫릴정도로 약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노르드의 성주도 르윅의 성주도 지휘관으로 노르드의 아들인 무르디안을 임명한 것이었다. 공성전이지만 동시에 단순한 몬스터 토벌로 보았기에, 그에게 하나의 경험으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스티온의 성주는 애초에 병력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니, 두 성주가 서로 상의하여 내린 결론이었고 그렇게 고블린들의 토벌대가 도착 한 것이었다.
이 사실들은 병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거나, 돌아가는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병사들 대부분이 그들의 상부와 마찬가지로 고블린들을 얕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이길수, 있나?'
하지만 직접 무기를 맞대고 적의 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병사에게 더 이상 이들을 얕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얕보다가 피해만 더 커진 지금의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의 눈에는 성벽을 분주히 움직이면서 올라오는 적들을 막는 고블린들은 물론이고, 성벽의 아래 성문 근처에 모여있는 고블린들도 보였다.
그들의 수는 성벽에 있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족히 열배는 넘는 수가 성벽의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을 지휘하는 고블린들도 성문 쪽의 질이 월등한것이 한눈에 보였다.
'저런 덩치라니!'
대다수의 몬스터가 그렇지만, 한번 한번의 진화를 거칠때마다 그 덩치를 키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이는 성문쪽 고블린들 전체를 지휘하는 이의 덩치는 족히 다른 고블린들의 반배는 더 커보였다.
'저게... 고블린 족장'
적의 실체를 확인한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질려 했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후웅-
그가 잠시 얼이 빠져 있는 그 때, 그를 향해 근접한 고블린이 무기를 휘둘러 온 것이다.
"큽"
다급히 검을 들어 녀석의 공격을 막았지만, 제대로된 자세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의 방어는 그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렇게 고블린의 공격에 죽음을 맞이하는가 했지만,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어떻게든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정신차리십시오!"
"사방팔방이 적입니다! 주의하셔야 합니다"
십인장인 그의 휘하에 있는 두 병사였다. 실력은 그와 비슷한 이들로 부대 내에서도 그가 신임하는 이들이었다.
"미... 미안하다"
휘청이면서 자세를 잡은 그는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다가온 다른 부하들을 보고는 기운을 차리고자 했다.
"십인장님, 왜 그렇게 얼빠진 표정이십니까?"
"그러게요. 어디 뭐 끔찍한거라도 보셨나요?"
농담을 내뱉으면서도 온몸을 잔뜩 긴장시킨 그들은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길을 사수하고자 했다. 이곳만 지킨다면 곧 그들의 동료인 다른 병사들이 이곳을 따라서 올라올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새 다가와 그들을 향해서 검을 휘두른 고블린이 없었다면 말이다.
서걱-
"...?"
한 병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 앞이 번쩍이자 움찔했다. 그가 본 빛의 선이 정확히 그를 훑고 지나간 것 때문이었다. 순간 적의 공격인가 싶던 그는 곧 멀쩡한 자신을 보면서 의아해 하려 했다.
스르륵-
미세한 절삭음을 냈던 그의 목은 그가 자신의 몸을 둘러보기 위해서 움직인 그 순간 미끄러져 내려간 것이다.
"루드!"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간신히 자세를 잡은 십인장은 대경실색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여러번의 번쩍임이 있었다.
잠시간 그들의 시야를 어지럽히던 그것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뒤에 한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의 직검을 들고 있던 그는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관심은 없다는 듯, 그대로 곧장 나아가 병사들이 올라온 밧줄을 검으로 잘라냈다.
"..."
그런 그의 모습이 무색하게도 성벽 위에 올라선 병사들에게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곧 그들의 입을 통해서 피거품이 올라오고 그들의 목, 몸통, 사지가 허공에 흩날리면서 바닥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더 이상 성벽의 위로 올라서는데 성공하는 이들은 없었다.
"캬아아아앗!"
성문이 열리고 인간의 병사들이 더 이상 성벽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
무르디안, 최초 그가 지니고 있던 그 위풍당당함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으면서 성벽을 올라가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뭐지? 어디서 잘못된거지?'
성벽을 기세좋게 올라갔던 병사들은 주기적으로 밧줄이 잘리고, 떨궈지는 돌에 맞아 손에서 놓치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당연히 성벽에 올라서는 이들이 도통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나마 조금 전, 일단의 병사들이 성벽을 올라서는데 성공한듯 보였지만 곧 그들이 올라갔던 밧줄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 성벽 위의 고블린들에게 살해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마법을 쓸수도 없어. 함정 파괴에 대부분의 마력이 소비되었고, 그나마 마력이 남아있던 이들도 충차를 어떻게든 살리려다가 실패하면서 대부분을 날렸어. 아직 마력이 남아있는 이들은 있지만... 너무 극소수에다가 대부분이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하는 반푼이들 뿐. 어떻게 해야하지?'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더 이상 그가 고민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 전장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구궁-
그렇게 충차로 밀어버리려던 성문이 저 스스로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