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을 뜨니 고블린-226화 (226/374)

226화

수성

"..."

루프스는 그의 영역을 마음껏 침범하는 모습의 인간들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미 인간들이 충분히 고블린들이 쏘는 화살의 영역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대기중인 고블린들 중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공격하고 싶은 성격 급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의 지시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곧 이겠군"

적들이 마법의 영향을 받아 무너져내린 마지막 함정의 근처까지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냉정히 생각했다.

'마법이 닿은 곳에는 하나같이 함정들이 터졌으니, 당연히 저들도 마법이 닿지 못한 지점에 함정이 있는 정도야 알고 있겠지. 혹시나 화살을 경계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조심하기는 해도 이정도로 근접했다는 것은 우리가 활을 쓸거란 생각을 못하고 있거나, 우리를 아주 얕보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루프스는 냉정히 그들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양쪽 다 나쁘지 않지. 우리를 얕본다면 그만큼 녀석들을 상대하기는 수월해지는 거고. 활을 염두에 두고 있지 못한다면 지금 이 한번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을테니까"

둘 다면 더욱 좋다는 생각을 끝으로 그는 인간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곧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던 인간들이 멈춰섰다. 요새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새로운 진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절반 즈음 진행 되었을 무렵. 루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 휘- 휙

손짓으로 그의 주변을 가득 메운 고블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올렸고.

끼기기기긱

그에 맞추어 성벽 위에 올라선 궁병들이 활의 시위를 당겼다. 많은 인원이 단번에 당기는 활시위의 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소리를 들으면서 대기하던 그는 이내 손을 힘차게 내리쳤고, 그에 맞추어 시위를 당기던 이들의 손가락이 붙잡고 있던 화살을 그 손가락에서 풀어놓았다.

///

무르디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늪지와 함정이라는 두가지 문제를 건너뛰었던 만큼, 자신감이 차올라 있던 그였다.

그것은 조심히 전진해서 진지를 차리기 시작할때까지 변치않고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자만감으로 변질되었던 건가. 그는 가까워져도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는 고블린들의 모습에 일부러 요새의 성벽과 가까운 장소에 진지를 차렸다. 이미 함정지대의 절반 이상이 마법에 의해서 쓸려나갔으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는 고블린들의 모습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책이라고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순간까지... 일부러 활을 쏘기를 참고 있었다고...?!"

하나씩 하나씩 아군의 목숨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무르디안은 이를 갈았다. 설마 몬스터라는 녀석들이 참을성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짧은 시간만에 요새를 차지한것도 요행이었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고블린들에게 지능이 있을거라는 판단을 하는것은 어려웠다.

함정이야 대부분 조잡한 함정들,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은 정도였다. 실제로 함정들 중 일부는 흙의 색이나, 위장용 잡초의 색이 다른 곳에 비해서 유난히 튀는 장소도 있었으니 그가 그런 판단을 내리는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고블린들이 만든 함정들의 수는 무수했고, 위장이 완전치 못한 것은 짧은 시간만에 만드려하다 보니 생긴 실수였을 뿐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접근해서 진지를 차렸던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가 진지를 차린 자리에서 성벽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한다면 1,2분의 시간이면 도달할정도의 거리였다.

"후퇴... 후퇴다!"

결국 그는 후퇴를 결정했다. 제대로 정비도 되지 않은 군으로 돌진해보아야 희생만 늘어날 뿐, 성벽에 도달했을 때 유효한 병력은 드물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주변의 부관들에게 후퇴를 명령했고, 그의 부관들도 혼잡한 와중에도 명령을 내려서 후퇴를 재촉했다.

후퇴를 시작하고, 간신히 화살의 사거리에서 벗어난 무르디안은 다시 재정비를 시작했다.

부상병들은 후방으로 몰아내고, 비교적 멀쩡한 이들을 전진배치해 공격을 준비 한 것이다. 본래는 하룻동안 쉬고, 다시 마력을 회복한 마법사들을 이용해서 남은 함정들을 처리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시 이전에 차렸던 진지로 되돌아간다는 방법도 있지만, 화살을 쏘기 시작한 저들이 자신들을 그냥 놓아줄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위험하긴 하지만...'

그는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고, 그 순간 바로 그는 떠올렸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했다.

여전히 그의 주변을 지키는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지시를 전달받은 병사들은 바로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언뜻 그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엿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쨌든 승리만 한다면 저들이 더 이상 꺼려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다.

대열이 갖추어지자 무르디안은 병력을 이끌고 전진했다.

그들은 곧 다시 화살의 범위 안으로 들어섰고, 예상대로 이번에는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에게 날아들었던 화살들은 무르디안의 병사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이번 공격에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땅- 따다다다당-

연달아서 날아오는 화살들은 병사들의 방패를 내리쳤지만, 그들의 전진 속도를 조금 늦추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전진에 전진을 이어갔고, 곧 그들은 동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꿀꺽-

지나가는 길목마다 있는 함정들을 피하면서 구불구불 움직이지만 거침없던 그들의 발걸음은, 경계점에 도달하면서 멈칫했다.

이제 그들의 눈 앞에는 어디에 함정이 깔려 있을지도 모를 함정지대였고, 이곳을 돌파해야지만 자신들을 골탕먹인 저들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 목표인 요새 탈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발걸음을 옮겼고, 곧 그들은 조심스럽게 함정지대에 발을 내딛었다.

터벅-

여전히 날아오는 화살들에 의해서 방패에서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음에도, 단순한 한 걸음의 소리가 무르디안과 그 병사들의 귀에 더 크게 들려왔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내딛은 발이 있는 장소에서는 아무런 함정도 발동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껏 긴장한 상태로 발걸음을 내딛었던 한 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에도 그는 함정에 걸리지 않았고, 그에 안도한 것인지 병사들이 일순간 단체로 움직였다.

쿠르르르릉

그리고 그제서야 곳곳에서 함정들이 발동되었다.

"으... 으아아아아악!!"

"뭇...?!"

순간 짧은 거리라도 함정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자신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었는지 일순간 대부분의 병사들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중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인원들이 하나같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듯한 함정에 빠져 그 목숨을 잃거나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전열에 일시적인 공백이 생긴 순간, 계속해서 날아오던 화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졌다.

푹- 푹- 푸부북- 탱-!

"커헉!"

연달아서 날아오는 화살들은 방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반병들에게 날아들었다. 중요 부위만을 간신히 가린 조잡한 가죽갑옷에 얇은 천옷뿐인 그들에게 화살을 막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순간적인 틈은 많은피해를 주었고, 간신히 바로 뒷열의 병사들 중 일부가 새롭게 방패를 들고서야 피해가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과감히 움직였고, 이후에도 함정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요새의 바로 앞까지 도착하는데 성공 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