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수성
여전히 성벽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 루프스는, 멀리 보이는 인간들의 진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도록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만이 보일 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어쩐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왠지 그들의 태도에서 부터 그와 그가 이끄는 고블린들을 이기는 것 쯤이야 손쉬운 일이라는 듯한 모습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경거망동 할 이유도 없었고, 그들과 자신들 사이의 거리는 서로에게 무언가 위협을 주기에도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의 곁으로 부하들이 주기적으로 바뀌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금씩 조금씩 적들을 향한 대비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적들을 향해 홀로 눈싸움을 하던 루프스의 눈에 온전히 하루가 지나서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자신들의 움직임에 아무런 속임수도 이용하지 않고 대놓고 움직이던 그들은 요새를 향해서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과연 그래도 어중이 떠중이 병사들은 아니었는지,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대열을 갖춰나갔다.
곧 그들은 준비를 끝마쳤는지 선두의 한명이 루프스들의 귀에는 희미한 잡음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곧 그를 시작으로 대열을 갖춘 인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이 잡히자, 요새에 주둔중이던 고블린들도 황급히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고블린들이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인간들의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응?"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루프스는 인간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생각이 기우였다는 듯 이미 대열을 다 갖춘듯 보이는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었다. 대열을 갖추고 준비가 끝나는 순간부터 인간들은 고블린들의 대비를 뚫고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ㅡㅡㅡㅡ"
"ㅡㅡㅡㅡ"
"ㅡㅡㅡㅡㅡ"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이상함을 느끼고 인상을 쓰고 있던 루프스는 곧 그들에게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그다지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기껏해야 몬스터들끼리의 대 난투가 벌어졌을 때나 간신히 목격하는게 가능했던 광경.
하나의 불덩이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를 쫓듯이 물로, 바람으로, 뇌전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들이 공중을 날아갔다. 어디선가 돌풍이 불어오고, 우박이 떨어지면서, 대지에 스파크를 튀기면서 번개가 내달렸다.
일순간이지만, 모든것을 압도하는 듯한 화려한 광경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블린들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광경을 굳이 만들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광경에는 절로 시선을 빼앗기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게... 마법..."
루프스는 눈 앞의 광경을 보면서 더더욱이 표정을 굳혀갔다. 그 위험성은 이미 그들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통해서 이미 들어본바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마법의 위협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아무도 사용하는 이가 없어서 그리 큰 경계를 하지는 않았었지만, 지금의 광경을 보니 그런 생각은 접어두어야만 할듯이 보였다.
그들이 날린 마법은 무작위로 퍼져있는 함정들을 향했고, 잠잠히 적들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던 함정들은 일순간에 마법에 의해서 그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보여야만 했다.
쾅-! 쾅-! 쾅-!
콰지지직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흙먼지와 잡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함정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너져내린 바닥은 그 속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날카롭게 갈린 목창이 바닥을 빽빽히 메우고 있는가 하면, 마치 늪지와 같은 녹색빛, 보라빛의 액체들이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작정 깊이 파고든 듯이 밑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시커먼 구멍고 있었으며, 바닥 벽면 가리지 않고 날붙이가 붙어있는 함정도 있었다.
한번 빠졌다가는 목숨을 챙겨서 돌아오기 힘들것 같은 함정들의 모습에 인간들도 놀랐는지 마법을 사용해 기세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여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야말로 그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진지와 성벽 사이의 절반 정도에 있는 대부분의 함정들을 드러내는데 성공한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원거리에서부터 날아오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면에는 방패병들이 조심히 전진했고, 그들의 틈새에서 나온 이들이 늪지를 건너기 위해서 그 위에 넓은 판자를 놓았다.
인간들은 빠르게 늪지를 건넜고, 드러난 함정들의 끝에 머지않아 도착 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뚫려있는 함정을 피해서 조금씩 전진한 그들은, 주변에 있는 함정들을 보면서 표정을 찌푸렸다. 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훤히 보이는 땅속에 있는 것은 무너진 흙과 나무가 아닌, 자신들이었을거란 상상이 엄습한 것이다.
더 이상 함정들이 보이지 않는, 마법에 의해서 초토화 되지 않은 대지를 보고 조심스레 진지를 차리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쉬익-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온 물체가 한창 바닥에 못을 밖으면서 천막을 세우던 한 병사의 머리 한가운데로 파고들어갔다.
바로 옆에서 물건을 옮기고 있던 병사는 갑작스레 동료가 뒤로 쓰러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몸을 옆으로 비켰고, 곧 그의 머리에 박혀있는 화살을 발견했다.
"저...! 적스..."
푸욱!
이상의 발견과 함께 패닉에 빠져, 적습을 외치려던 병사는 또다시 날아오는 화살에 심장을 꿰뚫렸고 그 몸을 땅에 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무차별적으로 인간들을 향해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쉭- 쉭- 쉭-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은 진지를 차리는 이들의 손발을 꿰뚫고 불을 밝히고자 세워둔 화로를 엎었으며, 천막을 꿰뚫고 적병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생각보다 좋은 효과를 보인 마법 공격에 슬쩍 기분이 들떠있던 군대의 대장, 무르디안은 내심 새로운 임시 진지를 만들면서 고블린들에 대해서 얕보고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서 함정들을 쓸어버린다면 무슨 반응이라도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고블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순히 몬스터라는 것 뿐이었다. 요새를 점령했지만, 과거 요새를 점령한 몬스터가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요새를 점령한 몬스터들은 더욱 많은 전력에 의해서 다시 쓸려나가기만 했었다.
때문에 그는 요새를 점령한것으로 추정되는 고블린들의 전력보다 한수 우위의 전력을 이끌고 오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함정의 등장은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하루 동안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법을 이용해서 함정을 뚫고 당당히 그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 들때까지 아무런 공격도 오지 않자 그는 적들을 다시 무시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경각심을 가졌었다는게 마음에 안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마법에 의해서 뚫린 자리는, 비교적 요새와 가까웠지만 그는 요새 안의 고블린들을 압박한다는 생각으로 그대로 그 자리에 진지를 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루프스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이 진지를 차리기 시작하자 어느정도 작업이 진행되기 까지 공격을 아꼈다. 아직 함정이 모두 뚫리지는 않았으니, 곧바로 처들어오진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공격하라는 듯한 모습에 그는 경계를 가졌던 것이다.
단순히 적들이 자신들을 얕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요새 앞의 진지를 세우는 작업이 절반정도 진행되었을 떄 였다.
도망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전진하기도 어려운 이 타이밍에 그는 인간들을 공격할것을 결정했다.
당연히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는 고블린들의 모습에 그들이 활까지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그들이 진지를 치고 있는 장소도 넉넉히 잡는다면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을 정도의 거리이니 그리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화살은 날아왔고, 그것은 머릿속에서 오늘의 전투는 더 이상 없을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피어올리던 병사들에게 하나의 재앙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