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수성
댕댕댕댕
고블린들이 머무는 요새의 성벽. 그곳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적습! 키기긱, 적습!"
다급히 다리를 움직이면서 고블린들은 적습을 알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루프스와 프리트는 황급히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들이 짐작했던, 인간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음..."
한창 진지를 꾸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프리트는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설마하니..."
"무슨일이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긴듯이 눈살을 찌푸린 그를 보면서 루프스는 물었다.
"저게 의도한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군요"
지금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인간들의 움직임이라고는 희미하게 진지를 세우는 모습 뿐이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정확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까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리잡은 장소. 그리고 그들의 태도를 보는 프리트는 의심을 끊을 수 없었다.
그만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한 태도를 취하고 말은 하지 않자, 루프스는 그를 더욱 재촉했다.
"정확히 무슨일이길래?"
눈살을 찡그린 그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프리트가 그제서야 제대로 설명을 잇기 시작했다.
"아, 다른게아니라 녀석들이 진지를 차리는 위치가 너무 절묘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루프스의 입장에서도 그저 간과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저들이 자리잡은 저 장소, 정확히 늪지 함정을 벗어난 장소라는게 영 걸립니다"
그들의 눈 앞에 자리잡은 인간들이 진지를 꾸리는 장소. 그곳은 다름 아닌 프리트가 공들여 만들어놓은 늪지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우연일 확률이 높겠지만, 프리트로서는 만일을 가정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든 함정들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전법 중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함정이 간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루프스에게 경각심을 안겨주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그들이 만든 함정이 사전에 걸리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상대하던 이들이, 단순히 별 생각이 없던 몬스터였거나, 고블린들이 함정 같은걸 쓸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던 몇몇 인간들 뿐이었다.
하나의 나라에서 전체는 아니지만, 나름 세력이란것을 가진 이들이 만일에 대비하지 않았을리가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이 사실을 떠올린 루프스는 다급히 프리트를 향해서 물었다.
"그럼... 녀석들에게 우리가 만든 함정이 통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이야기로군.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초조한 상태에서도 나름 위엄차게 목소리를 내려 깔은 그의 질문에, 프리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군락지를 빠져나오고 겪는 고작 두번째의 전투에서 이런 골치아픈 상황이 생기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미 설치되어 있는 것들인 만큼, 저들의 발목을 잡아주기는 할 겁니다"
진지를 세우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듯,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들의 움직임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프리트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요새 전체를 둘러싼 넓은 범위에 무작위로 놓여 있는 함정지대는 하나하나 돌파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를 무력화시키고 다음도 무력화시킨다고해도 또 다음 함정이 나타나죠. 이런 상황에서 적들은 단번에 요새를 향해 밀고들어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습니다"
"함정따위 무시하고 돌진해 올수도 있지 않나?"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러겠지요. 무작정 돌진만 해봐야, 함정이란 함정에는 대부분 걸려들겁니다. 그러면 우리만 좋은 일이니 그 가정은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정은 무의미하며, 적들이 그렇게 행동만 해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거라는 그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일리가 없겠지요. 하다못해 처음엔 그렇게 움직 일 수 있다 하더라도, 함정에 의해서 피해자가 나오는 순간 저들은 곳곳에 깔려있는 함정에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저 함정에 의해서 나오는 피해는 줄겠지만,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바입니다. 함정을 파훼하는데 신경쓰는 순간, 절로 방비는 허술해질테고 그 때가 우리가 공격해야하는 절호의 순간이 될 겁니다"
"그래서 가장 걱정되는것은 어떤 경우지?"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펴지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일말의 걱정이 남아있는 듯이 슬쩍 그늘이 져있는 프리트를 보면서 루프스가 물었다.
"으음..."
그의 물음에 앓는 소리를 내던 프리트는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저희가 전혀 모르는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가 가장 걱정이군요. 아직 인간들에 대한 정보가 온전한것이 아니다 보니, 이상한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자꾸만 듭니다"
그의 걱정에 대해서 들은 루프스는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크게 웃으면서 그를 격려했다.
"크하하하핫, 걱정하지 말게. 그 지경까지 간다면 우리가 운이 없는거고, 만일 그렇다 해도 미리 함정들이 무력화된 순간도 가정해서 그에 대한 방안을 세워두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둘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날 하루가 지날 때 까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인간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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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굳건하지만, 아직 보수가 진행중인 요새의 모습이 보이는 자리.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진지를 꾸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높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홀로 멀뚱하니 요새 방향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어느새 다가온 한 인물이 그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대장님, 작업이 끝났습니다"
멍하니 정면을 향해 시선을 던져두고만 있던 그는 그 이야기에 정신을 차리고는 뒤쪽을 둘러보았다. 그의 이야기대로 황량한 풍경뿐이었던 그곳에는 어느새 많은 막사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들과 그 주변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생각보다도 오랜 시간을 멍하니 요새를 보는데만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그의 부관을 따라서 멀리 다른 막사들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 막사를 향해 다가갔다.
막사의 안은 별다른 장식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침상이 하나, 그리고 여러 작업과 식사를 위한 소박한 테이블 하나와 몇개의 의자가 이곳에 있는 전부였다.
구석진 곳에는 그의 짐들이 무작정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관과 함께 식사가 놓여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그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무덤덤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 부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분히 그에게 대답했다.
"그리 빠르진 않았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요새의 공략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그가 목적을 잊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부관은 자신의 상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음... 잊지는 않았네. 다만, 저 요새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그의 포크를 들어올렸다.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태연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부관은 그를 향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묵묵히 눈 앞에 놓여있는 음식물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여는 것은 어느새 눈 앞의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단,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있지"
그렇게 말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는 마저 남아있는 식사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