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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고블린-205화 (205/374)

205화

준비

마을의 비교적 너른 면적을 지닌 한 공터에 루프스를 비롯한 마을에 사는 고블린들 다수가 모여 있었다. 일반적인 고블린보다 큰 덩치를 지닌 넷의 몸에 맞춘, 비교적 크고 화려한 의자에 넷의 고블린이 앉아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부족의 족장을 제외하고는 최고 직위에 있는 세 고블린과, 족장인 루프스가 한자리에 모여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넷이 함께있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이렇게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에 이들이 모여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코볼트들, 그 중에서도 촌장들의 처형 때문이었다. 마을로 압송해온 뒤 처형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정보를 빼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어이없다고 해야할지 고문하려는 시늉만 해도 그들이 아는 정보를 툭툭 뱉어내니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들에게서 얻어낸 정보 중 유익하다고 할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단 하나, 그들에게서 정보를 받아간이들이 인간들이라는 이야기만은 루프스에게 한가지 확신을 주었다.

'역시. 인간놈들이라는 말이지. 그런데 그놈들은 어째서...?'

아직까지 엘프들을 구할 때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인간들과 불화를 일으킨 일이 없는 그는 의아해했다. 강변 마을에서 살던 무렵 포로로 잡은 일이 있긴 했지만 군락지 내부를 표류하던 자들이니 예외로 쳐야했다.

그렇게 잠시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 본격적인 처형이 시작되었다.

푸석푸석한 털과 썩은 동태와 같은 눈동자가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살집이 오른 몸통은 푸석한 털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한 코볼트가 고블린의 손에 이끌려 단두대로 다가갔다.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두대였지만, 지금까지 직접 사용된 일은 없었다. 그저 한 자리에 존재하면서 고블린들, 그리고 지금은 떠나있지만 코볼트들 또한 마찬가지로 죄를 짓지 말라는 위협만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번도 사용된적 없는 단두대는 눈앞의 코볼트로 그 불쾌한 개시를 시작했다.

"사...살려...!"

털로 뒤덮여 보이지 않을것임이 분명함에도 연상되는 창백한 인상의 코볼트는 비명을 질렀고, 그에 아랑곳할리 없는 단순한 도구인 단두대는 그저 중력에 이끌려 그 목을 베어버릴 뿐이었다.

서걱 쿵-

투- 투둑-

혀를 길게 빼물은 코볼트의 머리가 바닥에 놓인 나무 통에 떨어졌고, 그 모습을 처형대를 둘러 싼 고블린들이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보면 무관심하고 어찌보면 이리되는게 당연하다는 듯 보이는 고블린들의 태도는, 이제 곧 단두대로 끌려갈 운명의 코볼트들이 비명으로 소리지르기도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다.

코볼트를 끌고 온 고블린이 목을 잃고 쓰러진 코볼트의 몸을 밀어 비키게 만들었고, 곧 이어서 또 다른 고블린이 한 코볼트를 이끌고 도착했다.

그 뒤로는 같은 광경의 반복이었다. 코볼트들은 단두대로 들어가고, 남은 시체는 고블린들에 의해서 한쪽에 쌓여갔다. 그 비참한 모습이 코볼트들의 몰락을 보여주는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어서는 것은 세 마리의 촌장들이었다. 코볼트들 전체를 통괄하던 크링크와 각 마을을 담당하던 촌장들, 코볼트들의 최고 수뇌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모두가 잡혀들어온 것이다.

세 마리의 촌장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주변을 휙 휙 둘러보던 그들은 한쪽에 쌓인 시체의 산에 움찔 몸을 떨어댔다. 그리고 그들도 앞의 코볼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씩 단두대로 다가갔다.

"히...히이이...!"

서걱 쿵-

곧 마지막 코볼트의 머리가 머리통으로 가득 찬 나무통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굴러서 떨어지는 걸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모든 배신자들의 머리를 베어낸 단두대는 피로 물들었고, 그 피를 바라보며 통쾌하면서도 복잡한 시선을 보내던 고블린들도 모두 처형장에서 물러났다.

루프스와 세 고블린들도 마찬가지로 물러났다. 코볼트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그들의 행동을 더욱 재촉했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코볼트들을 죽인 지금부터 그들은 본격적으로 준비에 나섰다.

///

루프스와 세 고블린들이 지내던 숲속 마을의 입구 부근.

무수한,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을만큼 많은 수의 고블린들이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루프스와 세 고블린들, 그리고 그들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고블린들이 늑대에 올라타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절의 늑대 기병들이 그들의 뒤에 도열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뒤로는 방패병, 궁병 순으로 도열했다. 가장자리에는 정찰병들이 짧은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그런 대열의 맨 뒤쪽에는 앞쪽과 마찬가지로 기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당하기만 하던 고블린들이 반격을 위해 출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볼트들의 처형이 있고, 루프스를 필두로 한 고블린들은 출전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장해둔 곡식을 꺼내고, 모두가 지닌 무기들은 물론 예비용 무기까지 점검을 진행했으며, 출전에 참가할 이들과, 마을에 남아 경비를 담당할 이들을 골라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고, 그는 지금 마을의 입구에 섰다. 그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인간들과의 전투를 위해서.

"가자!"

가장 앞에 있던 루프스가 외쳤고, 그 외침을 따라 늑대가 한발씩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행군하는 그들은 곧 마을에서 멀어졌고, 출진한 이들의 절반도 되지 않은 병력만이 마을에 남아있었다.

///

거대한 성.

그 어디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정도로 대단한 성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의 심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 장소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크 녀석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말상을 한 젊은 남성이 이를 갈면서 오크들을 씹어댔다.

"덕분에 우리만 더 어렵게 되버렸군. 젠장"

또 다른 사람이 머리를 헝클면서 귀찮아졌다는 듯 대답했다.

"고작해야 고블린 놈들인데. 정보까지 가져갔으면서 그렇게 무참히 패배하다니. 쯧쯧, 무식한 오크들이 그러면 그렇지. 뭐가 3대 용병단이야. 이런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중년의 남자가 불평불만을 토해내면서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는건 그만해라.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봐야지"

다른 이들이 투덜거리는 동안 묵묵히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이 다른 세명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 고블린 놈들을 어떻게 전멸시킬지다. 단 하나라도 살려둬서는 안된다는것 명심하고"

그가 이야기하자 나머지 셋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한명이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비천한 몬스터를 신경쓰는 겁니까? 한 종족이라도 고블린이라면 그다지 위협적인 녀석들도 아닐텐데요"

"그러고 보니 매일 매일 사냥과 밀렵으로 죽어나가고 멸종하는 몬스터들과 비교하면 그런 하찮은 종족 하나를 신경쓰는게 이상하군요"

말상의 젊은이와 중년의 남성이 그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알 필요 없다. 다만... 이건 나 뿐만이 아닌 우리 가문 모두의 총의라고 보는게 맞겠지"

"총의요?"

"그래,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로도 우리는 고블린들의 멸절을 원하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테니 이정도만 알아두라는 그의 신호였고, 세사람은 그에 동의하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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