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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고블린-202화 (202/374)

202화

준비

오크들이 보인 일순간의 방심은 그들을 이승에서 떠나보낸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주었다. 지쳐서 들숨과 날숨을 티나게 쉬던 고블린들은 오크들이 보인 틈을 한순간에 파고들었고, 순식간에 그들을 쓸어버렸다.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방심한 틈에 파고들었기 때문인가 오크들은 그들의 품으로 파고드는 고블린들에게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았다. 사태파악을 했을 때는, 이미 많은 수의 오크들이 순식간에 그들의 손에 명을 달리한 뒤였고, 반격을 하려 할 때는 둘 셋씩 붙은 고블린들에게 손쉽게 죽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오크들을 정리한 고블린들은 달려서 앞서 간 루프스와 마인들과 함께 합류했다.

이 무렵 루프스는 이들을 이끄는 로투스와 그리고 마인은 그의 부관과 맞붙었다.

로투스는 처음 루프스의 무리가 나타났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애초부터 이들 고블린들에겐 자신과 맞붙을 수 있는 이가 하나밖에 없으며, 그와 그가 이끄는 정예라면 분명히 루칸이 이끄는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갔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그렇게 예상했기 때문에 그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저 주변을 순찰하던 이들이거나, 그들이 서쪽 마을에 접근하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부랴부랴 보낸 오합지졸의 병력이라 생각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반을 보내면서도 너무 많이 내보낸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은 쓸모가 없었다. 그가 보낸 이들은 그들 자신보다 강하거나 비등한 적들의 등장에 대처하느라 시야가 좁아졌고, 그 틈에 다수의 고블린들을 놓쳤다. 그리고 그들은 로투스가 대기하는 장소까지 다가왔고, 방벽으로 달려들기 시작한 오크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마음껏 공격을 하고 있던 오크들은 졸지에 위에서도, 뒤에서도 동시에 공격이 들어오자 당황했다. 한참 고블린들의 방벽을 넘어서 마을을 공격할 생각으로 가득차있던 그들 대부분은 바로 직전에 도착한 원군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이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대장인 로투스가 인원을 빼서 막아갔으니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프스를 비롯한 이들은 이미 이곳에 도달했고, 그들의 등장은 로투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그때까지 후방에서 오크들이 공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던 로투스와 그의 부관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 그들이 나서는 순간 뒤에서 접근하던 고블린들에게 피해가 생기는 듯 했지만, 그 때 그들의 앞으로 루프스와 마인이 다가와 막아섰다.

그때도 단숨에 쓰러트리고 지나가려 했던 둘이었지만, 루프스와 마인은 그들과 비등한 수준의 강자. 당연히 아무생각없이 일단 뚫고자 하고 다가오는 두 오크의 공격쯤은 가볍게 막거나 피하면서 반격했다.

"?!"

생각지도 못하게 목을 향해 다가오는 도끼날과 심장 어림을 향한 주먹질에 두 오크는 거의 동시에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눈 앞의 상대가 그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고블린들과는 전혀 다른 녀석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 둘은 서로 맞상대가 가능한 이들을 경계하면서 떨어졌고, 지금의 상황까지 온 것이다.

두 종족의 대치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서로의 빈틈을 찾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상대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이 대치상태를 이끌어 주었다.

그들의 대치를 끝낸것은 다름아닌 로투스였다. 서로 방심 할 수 없는 대치상황임에도 로투스와 루프스는 전체적인 상황을 살필 수 밖에 없었다. 루프스는 애초부터 오크들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로투스는 루프스와 대치하면서 만만히 볼 수 없다고 판단, 고블린들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으니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은 점점 고블린들에겐 유리하게, 오크들에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벽의 위쪽에 자리잡은 고블린들은 오크들이 올라오는 족족 떨어트렸으며, 그렇게 떨어진 이들은 바깥에서 다가오는 고블린들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한참 올라가는 이들을 방해해서 낙하시켜, 포위한 고블린들의 코 앞으로 떨어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상황이 점점 오크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숫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앞뒤로 고블린들의 사이로 끼이게 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들을 불리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상황을 루프스도 로투스도 확인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다급해지는 것은 로투스의 쪽이었다. 방벽이라도 무너졌거나, 고블린들이 그들보다도 훨씬 약한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지원을 온 고블린들은 루프스와 간부 고블린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정예로서 키운 이들이었다. 마을의 고블린들이 비교적 약한 축에 들어간다지만, 대체로 전투 경험이 많은 이들을 떨어트린다는걸 생각해보면 약한편에 속한 이들은 아니었다.

오크들도 약한편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로투스의 신경이 점점 고블린과 오크가 접전을 벌이는 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그 순간, 루프스가 달려들었다.

쉬익-

빠르게 로투스의 품으로 파고든 루프스가 그대로 도끼를 올려쳤다.

그가 자신에게 근접하고 나서야 눈치 챈 로투스는 다급히 손에 쥔 창을 들어올려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챙-!

날카로운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자, 그들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인과 부관오크도 서로를 향해서 달려드는 신호가 되었다.

그렇게 양 측이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싸우는 그 순간에도 오크들의 수는 차근차근 줄어들었으며, 후방에서 오크들을 상대하던 고블린들이 오크들 대부분의 목숨을 거두고 마을 방벽에서 싸우는 고블린들과 합류한 시점이 바로 이 순간이다.

챙- 챙-

루프스의 도끼가 휘둘러지고, 로투스의 창이 그의 도끼를 막았다. 본래라면 루프스와 호각으로 싸워야 할 그였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를 싸움에만 신경쓰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불리한 상황으로 이어지자, 그로서도 동족들의 안위를 걱정 할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를 챙기기도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온전히 루프스를 향해서 정신을 집중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를 상대하는 동안, 그의 정신이 다른곳에 팔려 있자 루프스는 먼저 마인과 싸우는 부관을 먼저 처치할 것을 생각했다. 그 홀로 지금의 적과 싸우는 것 보다는 끌어들일 이가 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투스의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그는 마인을 향해서 은밀히 분신을 보내서 조력했고, 그의 조력으로 마인은 손쉽게 적 오크 부관을 처치 할 수 있었다.

로투스가 간신히 루프스를 향해서 정신을 집중 할 무렵에는 이미 모든 작업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로투스로서는 전체적인 상황에서만 신경쓰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아군을 잃은 것이다.

적을 물리친 마인은 로투스의 뒤로 접근했고, 그 동안 루프스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흐읍!"

은밀히 적의 등 뒤로 접근한 마인은 한 순간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근육으로 부풀어오른 팔을 적의 등을 향해서 내질렀다.

푸확-

로투스도 등 뒤로 접근한 적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해서 막아야만 하는 루프스의 맹공이 쏟아져 몸을 돌리지 못했다. 자칫 뒤로 돌았다가는 그의 공격에 목이 달아날수도 있으니, 일단 뒤로 접근하는 이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에 루프스를 향해서 집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아니, 그가 온전히 루프스와의 싸움에 신경을 쏟지 않는 그 순간부터가 그의 과실이라고 보아야 했다.

마인의 주먹은 그의 심장이 있던 부위를 한순간에 꿰뚫었으며, 그것으로 그는 절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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