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준비
북쪽 마을이 있던 장소.
이곳에는 더 이상 고블린들이 머물지 않았다. 폐허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마을,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오크들에 의해서 바로 오늘까지 머물던 고블린들은 떠났으며,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발 아래 시체로 구르고 있었다.
현재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오크들은 이전, 고블린들과 싸웠던 오크들과는 그 복장부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오크 족장인 그룬돌은 갑주에 무기까지 완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 일반 오크들은 하나같이 제대로된 복장을 가지지 못했으며, 간신히 하반신만 가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오크들은 그룬돌과 마찬가지로 갑주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매끄러운 표면과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는 무기의 날은, 그저 마구잡이로 만든 무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곳곳에 불을 피워놓고 몇 그룹으로 나뉘어져 불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오크들 중, 유난히 거대한 덩치를 지닌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그륵,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가장 거대한 덩치를 지닌 오크가 주변을 둘러앉은 오크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보통 뚝뚝 끊기던 고블린들이 지금까지 만났던 오크들과는 차이가 보이는 매끄러운 말투였다.
"남쪽으로 가면 된다. 그르륵, 멍청한 그룬돌. 그녀석이 제대로 조사도 못하고 방향만 알아와서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와 비슷한 덩치를 지닌 한 오크가 불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크큭큭, 애초에 그 야만스런 놈을 받아들인게 이곳 출신이라 조사하라는 의미에서 였는데. 그런 간단한 임무도 못하다니. 거 참 웃음이 멈추질 않는구만 크크큭"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오크는 임무에 실패하고 팔까지 한짝을 잃고 돌아온 그와 같은 직위에 있는 그룬돌을 떠올리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세 오크는 서로 덩치도 비등하며, 딱히 서로 존칭을 하지도 않는것을 보면 비슷한 지위에 있는 이들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셋과 비교해서, 그들 주변을 차지한 오크들은 굳은 자세로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오크들은, 북쪽 마을을 궤멸시킨 주인공인 오크들의 대장들이며, 하나 하나가 그룬돌과 맞상대가 가능한 이들이다.
"비웃는건 그쯤 해둬라. 의뢰는 잊지 않았겠지?"
가장 처음 입을 열었던 오크가 다른 두 오크를 보면서 자신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를 상기시켰다.
긁적 긁적
비웃기 바빴던 오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에게 대꾸했다.
"의뢰라고 해도, 고작 고블린 퇴치일 뿐인데. 그르르, 세 부대씩이나 필요한가?"
과도한 전력을 투입한게 아니냐는 듯, 오크는 느긋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무리 패배해서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해도. 그룬돌, 그 녀석은 우리랑 비견되는 녀서이다. 그런 녀석과 비등하게 싸웠다는건 적어도 우리 용병대의 한 부대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게 타당하겠지"
"그럼 두 부대면 되는거 아닌가?"
그의 태평한 이야기에, 둘의 대화에 잠자코 있던 남은 오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르륵, 가능이야 하다. 하지만 그러다가 하나라도 손실이 나면 그 자체로 우리에게는 손해라는거, 잊은거냐?"
아무 말 없이, 그의 무기인 창 날을 갈면서 여유로운 오크를 노려보고는 으르렁 거렸다.
"칫"
그 말을 끝으로 계속 깐족거리던 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 오크들의 야영지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
고블린들이 한참 오크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면서 코볼트들이 배신까지 하느라 골머리를 썪이고 있는 그 때, 오크들은 갓 하루를 보내고 폐허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망친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세 부대장 오크 중, 일단 그들을 이끄는 총대장의 역할을 맡고있는 오크가 운을 떼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파견된 부대의 부대장들 중 가장 고참이다. 그리고 그는 셋 중에서 그나마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한 부대의 대장을 맡고 있음에도 남은 둘은 그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전날 느긋하면서 말만 많았던 오크는 전형적으로 부하들과 따로 노는 케이스였다.
전투가 시작될 때. 그는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지 않는다. 가장 선두에 나서서 적을 향해 파고드는 좋게 말하자면 맹장이요, 나쁘게 말하자면 미친개와도 같았다. 그래서 간혹, 작전도 잊고 그저 적을 해칠 생각만으로 적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일이 있다. 그나마 그가 본능이 강하다고 할지, 악운이 강하다고 할지 그 동안 목숨에 위협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지금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묵묵히 자신이 해야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타입이었다. 주로 홀로 임무를 수행해 왔으며, 그러다보니 저절로 하나의 부대를 이끄는 입장까지 올라온 이였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이끄는 오크는 용병대장의 직계손으로, 그들 중에서도 재능을 갖춘 오크다. 지금과 같은 규모의 전투를 여러번 치뤄왔으며, 승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잦으면서 지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끝을 보기로 그들 내부에서도 정평이 자자했다.
"마지막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서 진을 치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옆에서 보필하는 역을 맡은 한 오크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둘의 대화로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미리 그들이 처들어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매끄럽게 피신한 고블린들에 대해서였다. 특히나 그는 당시 고블린들을 이끌던 지휘자를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오크들이 북쪽 마을을 습격 할 때, 최소한의 인원만을 보냈었다. 충분히 상대할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고블린들에게 자신들이 처들어왔다는 소식을 늦추기 위해서 눈 앞에 있는 이들을 전멸시키는게 가능하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곧장 도망갔지"
고블린들은 그들을 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을을 빠져나가 도주를 시작했다. 예상과 전혀 다른 그들의 모습에 오크들은 다급히 그들을 쫓기까지 했다. 하지만 곳곳에 깔려 있는 함정은 그들을 쫓기 힘들게 만들었고, 기껏 쫓더라도 낙오자들 몇몇만 잡았으니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결과는 굳이 따지자면, 거점을 확보하게 된 그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오크는 아직까지도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시작은 그 녀석들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 볼까"
그렇게 말한 오크는 그와 동행한 모든 오크들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
마인은 고블린들을 이끌고 조용히 이동했다. 오크들에게서 도망치고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루프스로부터 이렇다 할 전언은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지금까지 만났던 적들과는 달리 체계가 잡혀있는 이들이었다. 직접적인 충돌은 적었지만 그들은 하나의 부대에 여러 병종들을 일정하게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저 손이 가는대로 익히고 써왔던 그들과는 달리, 애초부터 하나의 무기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훈련한 이들이다보니 여간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운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연이기는 했지만 상대가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행방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모습들을 포착하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고블린들의 틈에 포함된, 한 고블린의 능력 덕분이었다.
멀리까지 시야를 확장해서 확인이 가능한 능력으로 방해물도 뚫고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정찰에서는 상당히 쓸모가 있는 능력이었다. 단점은 능력을 사용한 순간, 시전자는 그대로 멈춰서 움직이지 못한다는것이 있었다.
그의 능력으로 오크들의 움직임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천천히 싸움을 피하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루프스의 전령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