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을 뜨니 고블린-183화 (183/374)

183화

준비

고블린들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늪에 빨려들어갔던 오크 족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허둥대던 고블린들이었지만, 그동안의 훈련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무기를 들어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퍼석-!

하지만 생각보다도 기민하다 생각되던 그들의 행동은 오크 족장의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오크 족장, 그룬돌이 휘두른 거대한 대검은 고블린의 무기를 수수깡 부러트리듯이 파괴하였다. 무기가 파괴된 고블린은 그룬돌의 무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가 달아나 절명했다.

그 후로는 그룬돌의 파죽지세였다. 늪으로 빨려들어가 농락당했던 것이 어지간히도 그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고블린들이 보이는 족족 베어냈다.

고블린들은 그를 막기 힘들것 같자, 망설임없이 몸을 뒤로 돌렸다. 고블린들이 도주하기 시작하자, 그룬돌도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한 고블린을 베어내는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몸이 두동강 나거나 깊이 베인 상처로 절명한 고블린들의 시체가 있었으며, 늪지의 건너편에서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는 오크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동족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은 없는 그였다. 직속 부하들만 있다면, 그 외의 오크들에 대해서는 알바 아니라는 생각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오크들에 대한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크들을 늪지의 건너편에 두고 보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직속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크들 중 그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해서, 그의 앞길을 뚫어주고 몸으로 장애물을 막아주는 것이 저들의 역할이었다. 그런 이들이 여기서 발목이 잡혀서는 그가 귀찮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오크들을 보던 시선을 돌려서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찌되었든 저들을 건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었다.

마침 그의 주변에는 늪지가 끝나면서 다시 우후죽순 자라난 나무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터벅 터벅

개중에서 가장 두꺼운 몸체를 가지고 길죽하니, 단번에 늪지를 가로지를 수 있을 법한 크기를 가진 나무를 향해서 다가갔다.

"흡!"

콰드드드득

한아름 나무를 껴안더니 그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바닥에서부터 나무를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한지 껴안은 나무는 버티지 못하고 깊이 박혀있는 뿌리는 끊어지고, 얕은 뿌리는 흙을 들어내면서 바닥에서부터 뽑혀져 나왔다.

나무를 뽑아낸 그는, 늪지대의 위로 그 거체를 눕혀버렸다. 나무는 늪지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늪지대를 가로지르게 놓인 나무는 돌기둥을 받침처럼 이용된 덕분이었다.

늪에 빠졌던 오크들은 그대로 가라앉아 목숨을 잃었다. 그룬돌처럼 늪지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는 그들은 그대로 가라앉아 질식사로 죽어가기만 했다. 하지만 아직 오크들의 수는 많이 남아있었다. 늪에 빠져 죽어가는 오크들의 모습에 멈칫했던 이들이었다.

살아남은 오크들은 그가 놓아준 다리를 건너갔다. 빠르게 건너지는 못하였다. 나무 하나에 의지하고 건너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나무를 벗어나는 순간 빠르게 다시 올라오지 않는 이상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 거의 확실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룬돌은 그들이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 나무를 다시 하나씩 뽑아내면서 그들이 넘어올 길을 넓혀주면서.

점점 늘어나는 통나무 다리는 오크들이 건너오는 시기를 빠르게 앞당겨주었다. 오크들이 모두 건너오자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오랜시간 계속 이어지던 진군은 그들의 몸도 마음도 지치도록 만들었다. 특히나 고블린들의 영역에 들어오고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하루를 밤을 지세우도록 진군을 해도 지치지 않던 그들은, 함정에 빠지고, 기습을 당하며, 늪지에 빠지기까지 하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룬돌도 그저 눈 앞의 흔적을 정신없이 쫓느라 지치는것도 모르고 있었다. 흐름이 끊기고 정신을 차리면서 온몸의 피로를 느끼고 있던 것이다. 거기에 다른 오크들이 건너도록 온 힘을 다해서 나무를 뿌리채 뽑기까지 했으니 지치지 않는것이 이상할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룬돌은 오크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

오크들이 지친 몸을 휴식시키는 동안, 고블린들은 그들 나름대로 바빴다. 현 상황을 살피던 마인은 이 자리에서 ㅇ크들을 막기는 불가능하리라 보았다. 특출나게 강한 녀석들은 적었지만, 그와 버금가는 강자들도 하나에서 둘 정도는 보였으며, 바로 밑에 있는 이들도 여럿 있음을 파악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감당하기 힘든 오크가 존재하니, 그로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도가 없다고 본 것이다.

결국 그는 마을을 버리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약 일년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그가 전력을 다해서 키워왔던 마을을 이렇게 버리는것은 괴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오크들을 막아설수는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루프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이틀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그가 다시 이곳에 도착하는것은 못해도 하루는 걸리며, 길게 잡으면 이틀도 넘게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만일 오크들을 무조건 막으라고만 하지도 않으셨지. 그저 시간을 끌라고만 하셨을 뿐. 오크들이 이렇게 빠르게 처들어올 가능성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겠지'

마인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있는 고블린들을 보면서 루프스가 당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두번째 저지선에서 그는 오크 족장이 늪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비록 멀리서 지켜보면서 상황을 조율하느라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도 오크 족장이 올바른 지점을 밟지 못해서 늪지로 빠지는것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렇게 빠져나올 줄이야'

까드득

잘 흘러가던 전투 상황이 단번에 휙 뒤집혔던 그 때를 떠올리자 그는 이가 절로 갈렸다.

오크 족장이 갑자기 늪지대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그는 속에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대로 늪지대 밑으로 빨려들어가 질식할거라는 그의 생각은, 어긋난 것이다. 비록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는 힘은 그런 몰골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마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일순 멍해졌다. 그의 모습은 어째서 그의 아버지가, 족장이 그렇게 경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단신으로 늪지 건너편에서 오크들을 괴롭히던 고블린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때야 말로 그가 오크 족장을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확신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는 퇴각을 결정했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미 고블린들은 찢어져서 흩어지려고 하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내려진 그의 지시는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명령을 전달받은 고블린들은 그 즉시 퇴각을 실행했고, 일사 분란하게 흩어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촌장,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그에게 준비가 끝났음을 한 고블린이 알려왔다.

"그럼 마지막 처리만 끝내고 바로 숲을 빠져나가지"

그렇게 말한 마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나름의 고별을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을을 지켜보던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고블린들을 향해 다가갔다.

곧 마지막 작업을 끝낸 그들은 그대로 마을 밖으로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