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준비
북쪽 마을로 돌아온 루프스는 경계의 강화를 마인에게 지시해 두었다. 이미 한차례 경계 강화를 명한적이 있기 때문에 마인은 의아해 했지만, 이내 그가 오크들의 진지를 정찰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지시에 수긍하고 마을 전체의 경계를 강화시켰다.
이전에는 단순하게 순찰 몇번에 마을을 통하는 출입구만 지키고 섰던 경계정도였다. 루프스의 지시를 받은 지금은 마을의 목책과 함께 세워진 첨탑에 올라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으며,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게 다였던 순찰은 만일에 대비해 인원을 확충 했으며, 각자 지정된 장소에서 감시가 한 순간도 끊이지 않도록 교대로 적이 나타나는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지정된 장소들은 과거 만일에 대비해서 파놓은 땅굴들로, 적이 발견하기 어려운 구도로 되어있으며, 주변은 흙으로 덮고 모형 식물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들키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고블린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지시사항이 잘 전달된것을 확인한 마인은 그의 아버지가 어째서 이런 것을 지시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서 그를 찾아갔다.
"어째서 경계 태세를 더 굳히게 하신겁니까? 이런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저희 힘만 빠지는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무언가를 보거나 알아챘기 때문에 경계태세를 강화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오크들에게 이렇게 경계심을 갖는것은 너무 과도한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음... 그러고보니 너는 모르고 있었겠구나"
그런 마인의 태도에 루프스는 과거, 그가 고블린들을 이끌고 한 무리의 오크들과 싸웠을 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음을 떠올렸다. 게다가 마인이 봐왔을 오크라고는 오우거 밑에서 어정쩡한 모습만을 보이던 약한 녀석들 뿐이니 그가 의아해하는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루프스는 과거 그와 그의 부하들이 보았었던 오크들을 떠올리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또는 당연히도 마인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존경하고 따르는 아버지가 하는 말이니 믿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내용이 전혀 공감되지 않으니 믿음이 가지 않는것도 사실이었다.
본래 오크들은 고블린들보다 종족적으로 우위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동안 워낙 한심한 모습과, 별달리 강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보지 못했던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보면서 루프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가 짐작하고 있는 하나의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다름아닌 그와 버금가는 강자가 그곳에 있을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 이야기에 마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그의 아버지, 루프스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갖는 환상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보아온 강자라고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보다 강한 이는 분명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강자 중에서는 그의 아버지인 루프스보다 강한자가 없는것도 사실이었다. 부족 안에서도 현재의 그보다 강한 이는 없었으며 그동안 적들로 마주친 이들 중에서도 지금의 그를 넘어서는 이들은 없었다. 그와 버금가는 이도, 일전의 오우거들의 족장이나 그와 비슷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오크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이가 그보다도 강하다고 하니 마인이 놀라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루프스는 그에게 한가지를 더 당부해 두었다.
"오크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싸우려 들지 말거라, 최소한 수에서 우위를 점하거나 아니면 내가 돌아올 때 까지 후퇴를 해서라도 버티고만 있어야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북쪽 마을에서 나와 병력들을 모아오기 위해서 숲속 마을을 향해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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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했던 오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지금의 오크 족장, 그룬돌은 휴식중 느껴지는 이질감에 눈을 떴다. 그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동족이 아니라면 넘지 않으려 하는 선을 넘어서려던 이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르욱"
이내 뒤로 물러나듯이 사라졌지만 그것이 그의 흥미를 더욱 돋구는 결과를 주었다. 바로 조금전까지 자신에게 도전해오던 상대를 깔아뭉개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하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언뜻 느껴진 그의 실루엣은 그 덩치가 좀 크긴 하지만, 분명히 고블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얼마전에 오크들을 고블린들의 영역에서 사냥을 하도록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그 고블린은 오크들이 처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의 근원지를 쫓아왔던 것일 것이다. 게다가 이전에 지내던 곳에서 확인했었던 고블린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저들은 자신들이 본래 어디에 있던 오크들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오크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저들이 자신들을 발견한 이상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을거란건 자명한 일이다. 그가 비록 이전에는 오크들의 맹장 또는 용장으로서 행동하느라 머리를 쓸줄은 잘 몰랐지만, 자신들을 공격했던 적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거란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본능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막 부족을 옮겼던 시절의 격렬한 싸움을 떠올린 그는 온몸이 흥분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것을 느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도전자와 싸웠지만 그에겐 너무도 싱거운 싸움이었다. 몽둥이질 한두번에 고꾸라지는 적들에게 그는 싸움이라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었다.
자리를 완전히 잡은 이후로 그는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일이 없었다. 허약한 도전자들과, 싸움걸 용기도 없는 나약한 적들은 과거 거의 매일을 싸움속에 살았던 그에게 일말의 흥분도 주지 못했다.
그룬돌은 비교적 어둡던 움막의 바깥에서 밝은 빛이 쪼이자 눈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싸움이 가까워지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져, 그의 표정은 찡그리면서도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의 큰 덩치는 그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잘 보이도록 해주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오크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모습으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예를 표시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그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간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부족의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 그를 따랐던 이들도, 새롭게 족장이 되고나서야 그를 따르기 시작한 이들도, 그의 태도를 통해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것이란걸 알 수 있었다. 항상 전투를 갈망하고 전투를 행하고자 할 때만 웃는 그의 모습은 못 알아차리는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오크들은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부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크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아주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갓 태어난 오크들과 그들을 돌보는 일부의 암컷 오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룬돌은 고블린들의 부족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강자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싸움을 원하고 싸움을 쫓던 그는 하급에서 중급으로 올라설때 얻은 능력은 강자가 흘리고 다니는 흔적을 쫓는 눈이었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큰 흔적을 남기는 그것은 강자일수록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하고 있었다.
이미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그의 눈은 침입자가 남긴 흔적을 포착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오크의 영역을 한바퀴를 빙 둘러싸고 있는 흔적은 그가 오크들의 부족을 찾으려던 노력으로 보였다. 그는 느긋하고 의연한 태도로 일부러 빙 둘러서 돌고 있는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부디 그 사이에 충분히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준비가 끝마쳐져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