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준비
고블린들이 오크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하는 그 때, 오크들은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넓은 영역을 확실히 쥐어잡고 있을 수 있던 힘은 보이지 않았다.
"그우우우"
오크들의 부족에는 생기를 잃은듯이 비틀비틀 걷는 오크들이나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크들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리저드맨들과의 전투 도중 발생한 이변 때문이었다. 리저드맨들과 오크들의 경계, 그 중에서도 오크 부족의 중심지와 리저드맨 중심지와 제일 가까운 지점. 그곳에 주둔했던 오크들과 리저드맨들이 모두 몰살되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서로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두 몬스터들의 싸움은 더욱 격화되었었다. 특히나 그곳에 주둔했던 오크들을 이끄는 이와 리저드맨들을 이끄는 이는 두 종족 내부에서도 중요한 입장이며, 그들 중에서도 특출난 강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끌던 부하들과 함께 싸늘하게 토막난 시체로 돌아오면서 당시의 오크 족장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더욱 리저드맨들을 몰아치려고 했다. 그들 두 몬스터들 영역의 경계지역에 나타난 이상한 몬스터 하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것은 검은 형체의 양손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부정형의 몬스터였다. 한창 전투중인 오크와 리저드맨의 사이 한복판에서 나타나 양손을 칼날처럼 만들어 썰어버리거나, 후방에서부터 습격해서 둔기처럼 바꾼 양손으로 오크들과 리저드맨들을 날리기도 했다.
당연히 오크족장으로서는 그런 적의 행태는 꼴보기가 싫었다. 특히나 그들의 전쟁터에서 멋대로 개입하는 그 모습은 그가 학을 떼면서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오크들은 리저드맨들과의 휴전, 그리고 그림자 몬스터를 협공하기로 협정했다.
하지만 두 몬스터들의 협공으로도 그림자 몬스터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거나 그도 못하고 전멸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오크와 리저드맨이 그림자 몬스터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그것은 나타났다. 무수한 스켈레톤과 좀비를 이끌고 있는, 온몸이 부패한 그렇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좀비 드래곤이 그들의 영역에 나타난 것이다.
먼저 오크들의 영역에 들어선 그 존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 몬스터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렇게 두 몬스터의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들과 가까이 있던 마을에서 살아가던 오크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살아남은 오크들도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들이 짐작하기에 두 몬스터들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단순 여파만으로 그렇게 되었을 거란 점이다.
실제로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중상자들이 제법 발생했던 오크들로서는 타당한 추리였다. 그것도 직접적인 여파가 아닌 간접적인 날아오는 돌 파편이나, 부서진 나무와 같은 물체에 얻어맞았기에 생긴 부상자들이었다.
오크 족장과 리저드맨 족장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두 몬스터들에 의해서 점점 피해가 커져만가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두 몬스터는 각자 자신이 가진 힘에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족장의 자리에 앉은 그들이지만, 지금의 경지에 오르고는 서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적수를 겪은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 두 족장은 두 불한당과 같은 몬스터들의 싸움을 끝내고자 그들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들의 자신감은 사실 아예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없었다. 두 족장 모두 현재 고블린 족장인 루프스와 비교했을때도 두단계는 우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닿는 곳에서 싸우는 두 몬스터는 수일에 걸친 싸움으로 기력과 체력이 매우 소모되어있을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오크 족장과 리저드맨 족장은 자신감을 가지고 그들의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 족장은 실패했다. 그냥 실패도 아닌 그 자리에서 살아 돌아오지도 못한 대실패였다. 패배의 원인은 여럿이지만 특히나 그들이 지닌 힘은 두 족장과 비교해서도 월등했으며, 좀비 드래곤은 체력이란 의미가 없는 자이고, 그림자 몬스터의 경우에는 어두운 지역에서라면 체력을 무한히 회복하는 특성을 지닌 몬스터였다. 지쳤을거라는 그들의 짐작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몬스터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족장은 살아남지도 못하고 그들의 부족도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개입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크 족장이 지닌 두껍고 거대한 도끼는 좀비 드래곤의 몸에 기다란 흉터를 만들어 주었다. 리저드맨 족장의 길고 두꺼운 창은 그림자 몬스터의 몸통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서로를 견제하던 두 몬스터가 오크 족장과 리저드맨 족장을 무시하면서 생겨난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 직후 두 족장은 두 몬스터의 손에 의해서 그 목이 절단되고, 신체 전체가 완전히 썩어 사그라들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좀비 드래곤과 그림자 몬스터의 싸움은 그렇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둘이 입은 상처는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둘의 움직임을 늦추고, 그 틈새를 정확하게 공격한다면 먼저 공격한 이에게 승리가 넘어갈 정도의 균형을 깨트릴 정도는 되었다.
오크 족장과 리저드맨 족장을 죽인 둘은 잠시간 서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것은 그림자 몬스터였는데, 그는 좀비 드래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좀비 드래곤은 녀석과의 싸움을 지속할 의사가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은 좀비드래곤만 신경쓰면 되지만, 그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숨어있는 스켈레톤과 좀비들과 그때의 지쳐있을 그를 떠올리면 이 싸움을 지속하긴 어려웠다.
결론을 내린 그림자 몬스터는 몸을 돌려 좀비 드래곤에게서 도주했고, 좀비 드래곤은 그런 그림자 몬스터를 그저 놓아주었다. 좀비 드래곤이 어째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멀리서 그들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던 오크와 리저드맨들도, 그의 휘하를 자처하는 언데드들도 몰랐다.
좀비 드래곤과 그림자 몬스터, 오크들과 리저드맨으로서는 더 이상 대적할 방법이 없는 두 몬스터들의 싸움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오크들과 리저드맨들은 그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그들의 족장이 죽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구심점이 위험지대로 진입하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안감을 느낀 그들은 각자 친한 이들을 따라서, 그들이 족장 다음으로 믿는 상급자를 따라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음을 느꼈지만 오래도록 족장이 돌아오지는 않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여전히 남아있자 부족에 남아있던 오크들은 그리고 리저드맨들은 영역에서 물러나 다른곳으로 도주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리저드맨들은 새로운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지 돌아오지 않았고, 오크들은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의 행색은 영 정상적이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쫓기듯 도망쳤는지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 도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얼마나 굶었는지 앙상하게 뼈를 드러내는 오크들도 있었다.
돌아오는 오크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피폐해지고 뭔가 지쳐보였다. 마치 패잔병과 같은 모습의 오크들은 아무도 살지 않으면서 폐허처럼 변한 부족의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과거처럼 대부족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들 사이 어디에도 과거의 강자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제대로 거동이 가능한 이도 적은 모습은 과거의 모습은 일말의 파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거의 부족으로 돌아오는 오크들의 수가 늘어만 갔다. 그나마 그들이 외적의 공격을 받지 않고 수가 늘어나는게 가능했던 것은 여전히 좀비 드래곤의 잔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검은 대지의 안으로 굳이 들어서고 싶은 몬스터들은 오크들을 빼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루프스가 오크들을 염탐하도록 시킨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