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을 뜨니 고블린-131화 (131/374)

131화

전장의 축복(5)

루프스는 환상이란 능력을 가지고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저 적이 인식하는 무기의 위치에 혼란을 주는 정도로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후에 분신과 상대의 감각에 간섭하는 능력을 얻으면서 두가지만을 중점적으로 이용할 뿐 본격적인 환상을 이용했다고 볼 순 없었다.

그렇게된 가장 큰 이유는 환상의 능력이 적에게 딱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것에 있었다. 분신처럼 힘을 부여하면 임시로 물리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힘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불을 일으키면 겨우 따뜻할 뿐이고, 그 외 상황을 속이는 것은 감각과 동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바로 풀리는 등 일종의 결함품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용방식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바뀌었다. 환상으로 만든 불이 머문 자리에는 불타올라 재가 돼버린 풀이 있었으며 가짜로된 돌이 떨어진 자리에는 움푹파여 마치 그 자리에 실재했었던것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루프스는 이렇게 현실에 반영되는 최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알아보기 쉬운 불을 이용했다. 최대한 넓은 범위에 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덧씌운 것이다. 그리고 가짜 불길에 휩싸인 숲의 일대는 실제로 불이 난 것처럼 타올랐다. 비록 불의 기세 그대로 타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이 나타난 것이다. 불이 꺼진 숲은 실제로 불길의 영향 그대로 타오른것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풀은 실제 탄것처럼 재만 남았으며 비교적 큰 초목은 그 형상은 온전히 남고 곳곳에 불이 탄 흔적으로 그을음이 묻어나고 있었으며 그 겉은 그을음 말고도 약간의 재를 날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분신과 같이 단순한 환상에 물리력이 생겨난 것이다. 다만 그의 분신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의 분신이 그가 지닌 힘을 온전히 지니고 나타나는것에 반면 가짜로 만들어진 현상은 실제에 못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루프스는 점검의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사용해볼 생각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소수의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몬스터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자신에게 힘을 사용했다.

힘을 사용하자마자 이상이 찾아왔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던 숲의 모습이 끝에서부터 하나씩 분쇄되면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가 서있는 곳에서부터 그의 시야가 닿는 모든곳이 새하얀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루프스는 스스로에게 사용한 힘이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타난것에 당황했다. 그가 봐야할 광경은 지금과 같은 광경이 아니었다. 그저 기억속에 있는 고층건물로 가득한 모습을 떠올렸는데 전혀 다른 새하얀 공간이 나타난것에 의혹을 느꼈다.

저벅저벅

당혹감에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귀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볍지만 느릿한 발걸음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갔다.

그는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에 거뭇한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고 시야가 가려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그 실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루프스는 그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가 허리가 굽은 고블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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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나듯 몽롱한 기분을 느끼면서 루프스는 눈을 떳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것은 능력을 사용하기 전 타다만 흔적이 좀 남아있는 숲에 해가 지면서 노을이 지는 모습이었다.

"돌아가봐야겠군"

노을이 지는 모습에 그의 발걸음은 느긋하게 부족으로 향했다.

부족으로 천천히 돌아가던 그는 정보창을 불러냈다. 아직 그가 확인하지 못한것이 두가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숨겨진 특전이라는 항목을 살펴보았다.

[특전: 통역]

[특전: 지능 향상]

[특전: 하나의 기억]

[특전: 치유의 흔적]

"네가지? 그리고 통역이야 내가 지금까지 만난 이종족들의 언어를 알아듣는거랑 연관이 있겠고 다른 세가지는?"

[지능 향상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의 지능이 올라갑니다. 특전자의 지능이 약간 올라갑니다.]

[하나의 기억

타 차원의 존재의 기억을 원래의 기억에 덧씌웁니다. 이전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이 특전은 죽음에 이를것이 확실한 이에게만 적용될수 있습니다.]

[치유의 흔적

'특전: 완전한 치유'의 흔적입니다. 죽음에 이르렀던 부상이 치유된 기억이 육체에 남았습니다. 자연 치유력이 증가합니다.]

루프스는 밝혀진 특전의 내용에 놀랐다. 고블린들이 점점 목 끓는 소리를 내는 경우가 줄고 말이 점점 유창해진다는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가 처음 마주친 고블린들은 존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하급 미만의 고블린들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모두 자신에게 존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저 조금씩 변화한다고는 생각했고,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혜택이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그는 그 밑에 또 하나의 특전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 이건가..."

루프스는 과거 자신이 처음 눈을 떳을 때를 떠올렸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곳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고블린 시체더미 사이에서 깨어났었다.

"그때 기억을 받고 치유됬던건가... 허, 참"

루프스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적들을 처죽이고 비위상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별다른 동요가 없을 때 기억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의 괴리감이 매우 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이 가진 기억이 자신의 기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의심을 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같은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의심하는것과 확신하는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최초 깨어났을 때는 기억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를 이어가고 고블린들을 이끌면서 고블린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두터워 졌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최초 엘프들을 납치하는 인간들과의 충돌에서도 인간들과 싸우길 꺼려해 무의식적으로 오크들에게 집중했다. 코볼트 왕의 지하에서 갇혀 이성을 잃고 죽어가던 인간들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그리고 인간들과 싸우기를 은근히 꺼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확신하게 된 루프스는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게 되었다.

최근 그는 인간들과의 대대적인 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 부족에 있는 인간들과 동맹인 엘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인간들이 고블린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으니 죽이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죽음을 원하는 인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예전에 잡은 인간들의 입으로 알아 낼 수 있었다.

모든걸 알았지만 인간의 기억이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는 거리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깊숙히 숨어들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이 인간이었던 적이 없는, 그저 발전된 한 문명 안의 한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그에게 인간들을 상대한다는 것에서 오는 거리낌이 사라진 것이다.

"이번 축복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군"

루프스는 힘뿐만이 아닌 결심까지 쥐어주는 축복에 그리고 그 축복을 내려주는 이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완전한 고블린으로서 그 의식을 다시 세운 그는 어느새 도착한 부족으로 들어갔다.

축복으로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프스라는 고블린을 바꿔줄 귀중한 정보였다. 그가 고블린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더라도 인간의 기억은 알게모르게 여전히 그에게 영향을 줄것이다. 그리고 깨어나고 지금까지 살아온 행동은 그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반을 완전히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과의 전투를 더 이상 꺼려하지 않는다는것. 단 한가지만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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