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을 뜨니 고블린-121화 (121/374)

121화

이주

루프스의 무리가 새로운 터전에 자리잡은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엘프들과 힘을 합쳐 만들어낸 밭에서는 순조롭게 식량이 생산되고 있었다. 한번은 강의 범람이 일어나 거주지 부근까지 물이 밀고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후 강가에는 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물길과 수문을 만들어 밭에 쓰일 물을 비축해놓는 저수지를 만들어두었다.

부족도 내부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 살았던 이미 망가진 부족의 터에서는 독의 연구를 위한 장소가 필요하면 적당히 빈자리에 짓고, 대장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밭도 이곳저곳에 지어져 관리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던 루프스는 이번에는 부족을 새로 짓는 김에 그런 불편을 개편하고자 했다. 대장간을 한 곳에 몰아 넣었다. 인간 대장장이들의 밑에서 일하던 고블린들 중에는 슬슬 그들에게 기초적인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대장간에 모두가 몰려있는것은 비효율적이기에 대장간들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은 고블린 병사들이 훈련하기 위한 병영이었다. 훈련에 사용할 무기들을 조달하기 위해서 대장간 구역과 가까이에 조성되었다. 이 구역에는 오직 병영 하나만 있었지만 이곳에는 단체로 무기술을 훈련할 장소 그리고 가까이에는 임의로 다양한 지형을 형성해서 모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만들어져있다.

병영에서 약간 거리가 떨어진 장소. 홀로 부족 전체에서 동떨어져있는듯한 인상의 장소는 다름아닌 고블린들이 독을 연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연구소였다. 병영이나 대장간 구역에는 고블린뿐이 아닌 인간들이나 코볼트들 간혹 엘프들의 모습도 보이는것과 달리 이곳에는 오로지 고블린들만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블린들은 선천적으로 독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그동안 간혹 적들에게 사용하는 독이 생각 이상의 효율을 보이는 경우가 잦았지만 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자료들과 연구소 주변에 접근하는 고블린들과 다른 종족들의 반응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고블린들의 독 저항능력은 특출나지는 않았다. 그저 효과가 조금 약하게 든다거나 공기중에 남아있는 잔향에 영향을 받지 못하는 정도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연구소가 위치한곳에 퍼져있는 독의 잔향에 영향을 받아 중독되는경우가 생기면서 연구소는 오로지 고블린들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넓은 공백지를 사이에 두고 치료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워낙 큼직한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부상자들을 신경써주지 못했다. 대체로 금방 털고 일어난것도 이유중 하나였다. 하지만 큰 전투에 뒤이어 대대적인 이주까지 행해지면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새로 부족을 지으면서 익숙치 못한 건축과정에서 자주 사고가 일어났었다. 치료소에는 그 부상자들까지 더해서 여전히 치료받고 있었다.

연구소에 비교적 가까이 지은것은 연구소에서 나오는 결과물 중에는 치료에도 유용한 물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연치유력과 치료능력자로 모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치료능력자들의 수가 전체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떄문에 약초들을 이용해서 도움을 받는데 부족 내에서 소비되는 모든 약품들은 연구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치료소의 근처에는 늑대들이 거주지가 있다. 방생해서 키우는 만큼 전체적으로 영역만 지정해 주었기 때문에 늑대들이 살지 않는다면 그저 허허벌판인 장소였다. 대체로 늑대들이 이곳에 방생되어 키워지고 있으며, 기병들과 정찰병들의 훈련도 병영이 아닌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식량이 생산되는 밭은 부족의 바깥에 지어져 있었다. 연구소에서 피어오르는 독기와 대장간에서 배출되는 열기는 작물에게 안좋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밭에서 또 떨어진 장소에는 석벽이 세워져 있다. 마치 인간들이 사용한다는 성벽처럼 그들이 살아가는 외곽을 전체적으로 두르고 있으며 중간 중간 지어진 망루에서는 밖의 동채를 살피는 고블린들과 상시 수비병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족원이 머무는 거주지는 부족의 중심부에 만들어져있었다. 밭을 일구는 이들이 예외적으로 밭의 근처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외의 이들은 모두 부족 중앙에 만들어진 거주지에서 살아간다. 각각의 구역은 서로에게 필요하기도 하다. 그에 대한 교류를 위해서도 살아가는 장소는 중심부에 모두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터전에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부족의 내부에서 루프스는 한 정찰병 고블린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흠... 그러니까 다시 동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키익. 그렇습니다. 족장, 전혀 보이지 않던 동물들이 어느순간부터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개체수는?"

"아직 이렇다할, 키익. 수는 아닙니다.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 정도라 아직은 사냥하기에는 이른것으로 보입니다"

"알았다, 물러가도록"

꾸벅

정찰병 고블린은 뒤로 물러나서 새로 건축된 건물에서 벗어났다. 그가 물러나자 루프스는 고심을 이어갔다.

'동물들이 돌아오고 있다라... 그럼 동물들을 따라서 몬스터들도 돌아올수도 있겠군'

이곳에 오랜시간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은 예전 나타났던 사기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영향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사기에 의해서 넓은 지역이 식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공백지대가 되었단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영향이 줄어든것을 느낀것인지, 슬슬 불안감이 희석되서 다시 되돌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들이 다시 나타난것은 다시 이곳에 살던 몬스터들이 돌아올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그도 언제까지 이곳이 텅텅 빈 공백지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제가 되었든 사기를 잊은 몬스터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는 생각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 자리잡은 부족의 터전으로 침입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할 대비를 시작했다.

'아마 한꺼번에 몰려오지는 않을거야. 지금 서식하는 곳에서 견제하는 다른 몬스터들이 있는 녀석들도 있을테고, 새로 자리잡은 곳이 마음에 든 녀석들도 굳이 이곳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겠지. 이곳에 돌아오려는 녀석들은 아마 대부분 영역다툼에서 패해서 되돌아오는 것들이 대부분일게 분명해'

그는 영역다툼에 패해서 돌아오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길 원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욱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

한 인간이 제법 깊숙한 구덩이에서 눈을 떳다. 구덩이의 위쪽으로는 위장을 위해서인지 특별히 제작된 엮인 나무들 위에 초목들을 얹어놓은 위장풀이 얹혀 있었다.

"흐읍..."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이곳까지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이 새우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수 있었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처음 군락지로 들어오면서 확보해둔 퇴로는 이미 다른 몬스터들에 의해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근처의 밖으로 나가는 길에는 모두 강력한 몬스터들이 자리잡고 있어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더욱 안으로 들어가기 까지 했다. 들어온 김에 정보를 더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은 어느순간 사라져버렸다.

"그건 정말 오만한 생각이었어..."

그녀는 한 지역에 들어서면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퇴로를 차지한 강력한 몬스터들이 안쪽에서부터 벗어나 자리잡은 것들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차렸다. 그만큼 안쪽에 남아있는 몬스터들은 약하거나 별로 없을거라 예상하고 안으로 들어갔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동안은 비어있는 공백지들을 확인하면서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 조사대는 한가지 간과한것이 있었다. 그들은 생각했어야 했다. 어째서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뛰쳐나왔는지를, 몬스터들이 갑작스럽게 폭동을 일으킨 원인을 찾으러 자신이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한번 더 상기했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