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 버려진 자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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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의 침실에는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벽이 두 면이나 있었다.
한쪽 면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지금 반태수와 아리아나는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침실로 왔다고 해서 마력을 섞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코어를 가진 두 사람이 마력을 섞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좀 궁금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궁금하긴 해도 욕망이 들끓거나 하진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반태수도 그렇고 아리아나도 그렇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정리하는 중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반태수였다.
“제법 오랫동안 날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반태수의 물음에 아리아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당신을 노렸다고요? 그럴 리가. 전 오늘 당신을 처음 보는데요?”
"그래서 의문이야. 분명히 날 처음 볼 텐데, 준비는 굉장히 오랫동안 한 것 같거든.”
아리아나가 묘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확신을 하고 계시네요?”
“오늘 수작을 부렸으면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거든. 최소 몇 달 동안 아주 느릿느릿 수작을 부렸으니까 내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제인이 당했지.”
“당신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로군요. 단순한 기공술사가 아닌 것 같아요.”
반태수가 급소를 찌르듯 훅 말했다.
"나도 마법사는 처음 봐.”
아리아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저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까 탐지마법을 통해 반태수를 스캔했다.
정밀 스캔은 못했지만 마력회로를 분명히 확인했고, 그 수준도 파악했다.
수준은 오늘 파티에 참여한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래봐야 단순한 기공술사에 불과했다.
마법사인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한데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걸 아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그냥 알아봤다는 뜻이다.
대체 어떻게?
아리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반태수를 노려봤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고 싶지만 그러지 않았다. 최대한 잡아떼야 한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마법사라니.”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놀라지나 말고 잡아떼지 그랬어. 연기도 제법 하는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표정이 드러나서 깜짝 놀랐네."
"하!”
아리아나가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마력을 감춰서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 혹시 아까 그 마력 파동……!”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 내가 한 거야.”
아리아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고작 그걸로 내가 마법사라는 걸 알아냈다고요? 마력을 제대로 감췄는데 어떻게 파악한 거죠?”
"내가 한 수 위니까?”
"말도 안 돼!”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못 믿겠으면 테스트 해보든가.”
"하라면 못 할 줄 알아요?”
아리아나는 바로 마법을 썼다.
코어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 마법진을 그렸는데, 반태수가 아는 마법과는 약간 결이 달랐다.
하지만 분석은 충분히 가능했다. 어차피 마법이라는 것이 기초에서 쌓아가는 거니, 결이 다르다고 해도 마법은 마법일 뿐이니까. 아리아나가 쓴 것은 전격 마법이었다.
그냥 단순한 전격 마법이 아니라 제법 고차원적인 마법이었다.
허공 한 점에서 스파크가 튀고, 그 스파크가 빠르게 증식하며 주변을 전격으로 싹 잡아먹는 마법이었다.
채 스파크가 튀기도 전에 분석을 끝낸 반태수는 그것을 역산해 마법을 디스펠 해버렸다.
마법진이 발동함과 동시에 마법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아리아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녀도 분명히 느낀 것이다. 마법적 힘이 작용해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 해버린 것을.
그제야 반태수가 왜 테스트 해보라고 했는지 알았다.
이렇게 한 번 직접 겪어보고 나니, 실력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아리아나의 특기는 이런 식의 마법 전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법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것을 훨씬 잘했다.
아무튼 아리아나는 살짝 낭패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설마…… 당신도 마법사인가요?”
"그건 비밀이라서 말해주기 어렵고. 내 얘기보다는 네 얘기를 먼저 해보자고.”
아리아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체 뭘 알고 싶은 건지도 궁금하네요, 이제는.”
반태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마법사가 된 거지?”
아리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반태수는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였다.
왠지 패트릭을 볼 때마다 느꼈던 감각이 반태수를 보면서도 느껴졌다.
"그냥…… 됐어요.”
"계약한건가?”
아리아나의 눈이 또 커다래졌다.
"알면서…… 물어본 거군요?”
반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짐작해 본 거다.”
아마 자신과는 다른 계약일 것이다.
반태수는 예전 카르멕이 말했던 포탈을 만들고 나서 쓸모가 다해 버린 지구인이 떠올랐다.
아마 그 지구인이 바로 아리아나인 듯했다.
“카르멕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아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도 모르고 계약을 한 건가?”
"그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리아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좀 절박했거든요. 아마 그 절박함이 그 사람을 불렀나 봐요.”
“뭘 걸고 계약한 거지?”
"전 마법을 받고, 그 사람은 절 중계기로 쓴다고 했어요.”
"몸을 빌려준 건가?”
아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내 몸을 그가 쓴 건 아니에요. 그가 시킨 대로 행동을 하고 내 몸을 중계기로 이용해서 마법을 쓴 거죠."
"무슨 마법을 썼는지는 기억하나?”
“당연하죠. 이면세계로 가는 게이트들을 만들었어요.”
게이트를 하나하나 만든 것이 아니라 마력을 모아 응축한 다음 씨앗을 뿌리듯 마법을 썼다.
그 씨앗이 자라 게이트를 구성할 토대가 되고, 특정한 자극을 받으면 게이트가 생성되도록 설계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정교한 마법이었어요. 지금의 제가 엄두도 못 내 정도였죠.”
"생각보다 코어도 크고 마법 실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그런데도 어렵다고?”
아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마법의 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포탈을 만들며 늘어난 실력 덕분에 마법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쪽으로는 큰 발전이 있었다.
향후 마법을 더 연구해도 그쪽 방향의 발전이 훨씬 빨랐고.
"내 몸을 중계기로 쓸 때는 마법 실력도 빨리 늘고 코어도 쭉쭉 자랐는데, 버려지고 나니까 마치 신기루처럼 재능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아리아나의 표정에는 짙은 상실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면세계로 가서 찾아볼 생각은 안 했나?”
최소한 아리아나는 반태수가 처음 이면세계로 갈 때보다 마법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
아마 갔으면 제법 큰 활약을 하면서 금세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아리아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길 어떻게 가요. 자길 다시 만나면 모든 걸 빼앗겠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카르멕의 협박 때문에 이면세계로 못 가고 지구에서만 활동한 것이다.
"그놈이 그런 협박을 할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그런 상황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런 대단한 걸 몸으로 겪게 해줬는데. 가면 바로 잡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정말로 그 사람,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아, 생각해보니 위험했을 수도 있겠네. 어쨌든 카르멕이 이면세계의 왕이긴 하니까.”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아리아나가 투덜거렸다.
"거봐요. 안 가길 잘했지. 그리고 거기 안 가도 난 충분히 지구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가서 뭐하겠어요?”
그러다가 뭔가 이상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반태수를 바라봤다.
"기공술사는 이면세계에 못 가는 거 아니었나요?”
반태수는 피식 웃었다.
“모든 기공술사가 그럴 거라는 편견은 버려.”
아리아나가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왜 제인한테 접근해서 그런 짓을 했는지도 얘기해 줘야지?”
"아, 그거요. 포션 때문에요.”
“포션?”
"구입해서 분석을 좀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에서 뜬금없이 나올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거든요.”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사가 그런 포션을 직접 지구에서 생산한다고 하면 의심의 시선으로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포션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만나보고 싶었나?”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확인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어요. 워낙 정보가 CEO중심으로 이뤄져 있어서. 마법도 정말 많이 썼고요.”
아리아나는 반태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제인한테 접근하기가 제일 수월하더라고요. 뭔가 변하고 싶었나 봐요. 클럽도 자주 가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려 하고.
그래서 제인에게 꾸준히 마법을 써서 토대를 닦았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그 뒤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리아나는 자신의 외모가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자도 아름다운 여자에게 끌린다.
한데 남자는 오죽하겠나.
그녀에게는 미모만 있는 게 아니라 마법도 있었다.
일단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나면, 각종 마법을 써서 정보를 뽑아낼 계획이었다.
포션 제조법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아리아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굳이 하지 않을 뿐이다.
그거 말고도 큰 힘 들이지 않고 돈을 벌 방법이야 엄청나게 많으니까.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이런 포션을 만든 사람의 정체가.
한데 막상 반태수를 만났을 때부터 일이 계속 꼬이고 있었다.
설마 역으로 자신의 정체가 털릴 줄이야.
아리아나의 설명을 모두 들은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아무튼 잘 만났네.”
버려진 자가 알아서 자신에게 접근해 오다니, 그저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카르멕의 중계기가 돼서 포탈의 씨앗을 뿌린 거 말고 또 뭘 했지?”
"그게 다예요. 사실 그 다음에 시스템인지 뭔지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 못 하고 갔어요. 시간이 다 되었다나 어쨌다나.
반태수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있는 건가?”
아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극히 일부, 초반부에 대한 지식만 있어요. 시작만 하고 끝났거든요.”
“어디에 만들려고 했는데?”
아예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기초가 다져진 곳에서 시작하면 훨씬 편하지 않겠는가.
"필라델피아에 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시스템이라는 게 규모가 상당하거든요. 필라델피아에 빌딩 여러 채를 지어서 서로 연동하는 방식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빌딩을 여러 채 짓는다고?”
"네. 일단 기초공사는 끝났고, 그 뒤로 건물을 올리다가 중단한 상태예요. 어차피 시스템을 만들 것도 아닌데 굳이 거기에 돈을 더 투자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 지어서 팔아버리는 게 낫지 않나?”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빌딩 위치가 별로 좋지 않아요. 입지를 따진 게 아니라 시스템의 연동을 따져서 자리를 선택했거든요.”
반태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걸 인수해서 자신이 완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시스템을 만들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저렇게 준비가 되어 있다면 슬쩍 시작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죠? 눈치를 보니까 시스템이 뭔지도 아는 것 같고. 솔직히 나도 시스템을 만든다고만 들었지 그게 뭔지는 모르는데 말예요.”
반태수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혹시 그놈이 왜 포탈을 만드는지, 시스템은 또 왜 만드는지 아는 거 있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한 건 아니지? 물어라도 봤을 거 아냐. 안 그래?”
"뭐…… 그렇죠. 궁금할 때마다 물어보긴 했죠. 대답을 들을 때도 못 들을 때도 있긴 했지만.”
"그래서 왜 그런 것들을 만들었대?”
아리아나가 눈웃음을 쳤다.
“저만 계속 말하는 거 같네요? 이제 당신 얘기도 좀 듣고 싶은데.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반태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계속 감출 생각은 없었다.
"나도 마법사야.”
아리아나의 눈이 또 한 차례 커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역시 그랬군요. 그럼 저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겠네요.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당신 기공술사 아닌가요? 어떻게 마법사와 기공술사가 양립할 수 있는 거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건데?”
"그게 안 된다고 누가 정했는데? 원한다면 너한테도 마력회로 새겨줄 수 있어.”
"예? 정말요?”
“그러니까 협조 좀 부탁해. 그놈의 목적이 대체 뭐지?”
아리아나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말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지구에 오는 거라고 했어요.”
"지구에 온다고?”
"그쪽 사람은 지구에 못 온다면서요. 그걸 궁극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더라고요.”
"궁극적으로 해결? 그걸 어떻게 해결하지? 몸을 빼앗는 거 말고는 답이 안 보이는데?”
아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제 몸도 못 빼앗았는걸요.”
"네 몸은 애초에 빼앗을 생각이 없었을 거다.”
카르멕은 지독한 색마다. 여자 몸을 얻으려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아리아나를 버리고 반태수를 찾은 거겠지.
"아무튼 몸을 빼앗는 건 아니고, 영혼으로 뭘 어쩌겠다고 했는데, 더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어요.”
“영혼?”
반태수의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영혼으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걸까?
아무래도 영혼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더 깊이 있게 해야겠다.
아울러 지구에 시스템을 만들면서 마법도 더 발전시키고.
그래야 카르멕의 지식이 더 넘어올 테니까.
‘영혼이 융합되는 게 마음에 좀 걸리지만, 그래도 지식이 필요하긴 하니까.’
반태수는 그렇게 억지로 합리화했다.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자, 그래서 이제 어쩔 거죠?”
아리아나의 물음에 반태수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그 말에 아리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미소였다.
‘신기하네. 왜 저걸 보면서도 욕망이 안 생기지?’
반태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리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대신 제가 마법사라는 비밀은 지켜주세요.”
“내가 할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내밀어 꽉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