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 과거를 읽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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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반태수를 만난 이후, 능력을 훨씬 자주 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실력이 향상되면서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이제 30분 정도는 너끈히 저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반태수가 하는 요청도 아주 가볍게 여겼다.
그렇게 30분 분량의 영상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제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반태수를 보며 말했다.
"일단 영상은 저장했는데, 아무래도 능력을 한 번 더 써야 할 것 같은데요?”
"또 써야 한다고요? 길이가 깁니까?”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전 여기 서서 뭔가를 하신 줄 알았는데, 좀 많이 돌아다니셨더라고요. 이 자리에서 찍힌 건 걸어와서 여기에 선 것뿐이에요. 나머지 시간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 제가 맞습니까?”
제인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훨씬 어려보이지만, 분명히 보스였어요. 우리 보스는 어릴 때도 굉장한 미남이셨네요. 어리니까 귀여운 맛도 있고, 아주 눈 호강 제대로 했네요.”
제인의 말에 반태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커피가 필요하다는 거죠?”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오늘 어쩌면 커피를 토할 때까지 마셔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 일단 영상은 보내드릴게요.”
제인은 항상 들고 다니는 대용량 저장장치에 머릿속에 저장된 영상을 보냈다.
반태수는 커피를 준비해 주었다.
이제 제인이 능력을 한 번 쓸 때 필요한 커피의 양을 정확히 알기에 전용 용기에 담아서 주면 된다.
제인이 그걸 단숨에 마시고 다음 기억을 읽으려 준비를 하는 동안 반태수는 영상을 확인했다.
제인이 말한 대로였다.
산기슭 텅 빈 공터만 계속 나오다가 영상이 끝날 무렵에 17살 반태수가 등장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을 감은 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자신의 기억에 남은 위치에 발을 디딘 순간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깜빡했다.
저 상황은 기억이 난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가만히 서서 머리를 정말 열심히 굴렸다.
한데 아무 기억도 없이 마법 지식만 계속 쏟아져서 크게 당황했었다.
진짜 기억을 깡그리 잃어서 그 후 몇 달 동안 제법 고생했다.
하지만 반태수의 머리가 워낙 좋아서 빠르게 적응했고, 마법도 빠르게 익혀서 응용했기에 삶의 질이 굉장히 좋아졌다.
아무튼 이걸 보고 있으니 당시의 기억이 주르륵 떠올랐다.
별로 되새길 필요가 없는 기억들인지라 얼른 털어내고 제인을 쳐다봤다.
제인은 어느새 두 번째 기억을 머릿속에 저장한 뒤였다.
"아, 이거 너무 답이 안 나오는데요? 왜 이렇게 돌아다니셨어요? 보아하니 이 근방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거 같은데, 뭐라도 찾고 있었던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반태수는 어깨를 으쓱 했다.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아예 기억에 없는데.
반태수는 솔직히 말했다.
"내가 그 당시의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확인하려고 부탁한 겁니다.”
제인이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아…… 그랬군요. 미안해요.”
"제인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오히려 도와줘서 고맙지.”
제인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얼른 커피 주세요.”
반태수는 미리 준비한 커피를 내밀었다. 아공간에서 꺼내주는데도 제인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반태수와 관계된 일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는 모양이다.
반태수는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영상을 확인했다.
여기서 제인의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 확 느껴졌다.
제인은 반태수가 걸어온 경로를 유추해서 마치 카메라로 따라가듯이 영상을 찍었다.
덕분에 첫 번째 영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17살 반태수의 모습을 잡아낼 수 있었다.
역시나 17살 반태수는 눈을 감고 걸어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반태수는 집중해서 영상 속 17살 반태수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열심히 들었다.
‘이거 이면세계 쪽 말인데?’
반태수가 중얼거리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이면세계에서 쓰는 언어였다.
대체 어떻게 17살 반태수가 이면세계의 언어를 알고 있는 걸까?
정작 자신은 처음 포탈을 넘어 이면세계에 갔을 때 말을 전혀 몰라 눈치로 배우느라 제법 고생했는데 말이다.
‘그게 아니야. 섞여 있어.’
이면세계의 언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1인 2역을 하는 식으로 이면세계의 언어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태수는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카르멕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카르멕은 이면세계 언어로 말하고 반태수는 한국어로 말하고.
어차피 의사소통은 심상공간에서 이뤄지기에 언어를 뭐로 쓰든 상관없이 대화가 이어진 것이다.
상황을 보니, 심상공간에서 하는 대화가 반태수의 육체를 통해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반태수라면 결코 그럴 일이 없겠지만, 17살 반태수는 아직 모든 면에서 미숙했기에 저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 동네에서 저러고 다녔으면 정신병원에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굳이 산기슭 주변을 돌아다니며 저런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카르멕이 나름 배려를 해준 것이다.
‘하긴, 자신이 쓸지도 모를 소중한 몸인데 관리를 잘 해주는 게 맞지.’
아직 카르멕의 의도를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목적이 육체라고 짐작했다.
아무튼 이제 대화를 파악해야 한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거라서 잠꼬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발음도 뭉개질 때가 많고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리는 구간도 많아서 파악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해서 듣는 사이, 제인의 세 번째 영상이 완성되었다.
세 번째 영상은 두 번째보다 더 훌륭했다.
17살 반태수가 어떤 경로로 움직이는지 훨씬 정확하게 예측해서 더 많은 정보를 담았다.
그렇게 네 번째, 다섯 번째 영상이 완성되었고, 여섯 번째 영상을 확인하고는 작업을 종료했다.
여섯 번째 영상 마지막 부분에서 반태수가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나왔으니까.
"고마워요. 힘들었죠?”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커피도 실것 마시고 좋았어요. 그리고 귀여운 보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어서 설렜고.”
제인은 요염함이 한껏 묻어나는 눈빛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설마 오늘 저 그냥 보낼 건 아니죠?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 말이 지금까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반태수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아무래도 지구에서의 여자관계도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결국 제인과 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 날 오전까지 함께한 다음에야 그녀를 미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한 번 불이 붙은 제인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가끔 보여주던 그 요염한 눈빛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반태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며 헤어질 수 있었다.
돌아갈 때도 당연히 공간이동으로 데려다줬기에 시간을 굉장히 아낄 수 있었다.
원래는 딱 거기까지만 하고 어제 얻은 영상을 분석하려고 했는데, 오늘 카페 위자드에 또 찾아가기로 약속했기에 거기도 다녀왔다.
점심은 이서영과 함께 먹었고, 나중에 합류한 한서현까지 해서 디저트와 차도 마셨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카페로 가서 먹었다.
반태수는 이해하기를 포기했기에 그냥 그녀들이 하자는 대로 순응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자신의 시간이 생겼다.
왠지 앞으로도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살짝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영상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편집부터 했다.
여섯 개의 영상 전부에 17살 반태수가 풀로 등장하는 건 아니었다.
동선을 예측해서 찍었기 때문에 없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시간 순으로 잘라서 17살 반태수가 나오는 부분만 이어 붙였다.
그 다음부터는 무한으로 반복해서 보고 들으며 카르멕과 17살 반태수의 대화 내용을 뽑아내려 애썼다.
‘차라리 마법 연구하는 게 낫지.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그래도 시간을 투자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하고 머리를 있는 대로 굴려서 대화를 차근차근 복원해 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카르멕과 17살 자신의 대화였다.
한데 내용은 예전 카르멕이 말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계약을 한 것은 맞다.
카르멕은 17살 반태수를 마법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반태수의 기억 대부분을 가져가겠다고 한 것도 맞다.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반태수에게 남은 건 언어에 대한 기억과 없으면 안 될 삶에 직결되는 기억 몇 가지뿐이었다.
카르멕이 한 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데 그 뒤로도 한참이나 대화가 더 이어졌다.
- 우리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내 영혼을 떼어서 네 영혼에 섞어야 돼.
- 영혼을 섞는다고? 그게 가능해?
- 아무나 가능하진 않지. 영혼과 영혼의 파장이 잘 맞아야 돼. 너랑 나는 상성이 굉장히 좋아. 마치 같은 영혼에서 분리된 것처럼.
- 신기하네.
- 그래서 내 영혼에 마법 지식을 넣어 네 영혼에 넣고, 네 영혼에 기억을 넣어서 내 영혼에 넣는 방식을 택했어. 어때? 공평하지?
- 좋아. 그렇게 해. 마법사가 되면 내 삶도 좀 달라지겠지.
-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기대해도 좋아.
- 그래. 그럼 이제 끝난 건가?
-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해. 영혼을 섞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거든.
- 그렇겠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 강력한 의념이 중요해. 네 기억을 영혼에 담아 넘긴다고 강력하게 염원하지 않으면 영혼이 떨어져 나오지 않아.
- 기억을 영혼에 담고 그것을 떼어서 주면 되는 거잖아.
- 그렇지. 난 지식을 영혼에 담고 그것을 떼어서 주는 거고. 모든 절차는 계약에 따라 진행되니까 자잘한 걱정은 안 해도 돼.
- 자잘한 걱정? 무슨 문제가 생길 수도 있나?
- 문제야 생길 수 있지. 하지만 그러지 않도록 내가 조절할 수 있어. 너한테 주는 내 영혼에 끈을 이어놓을 테니까.
- 끈을 이어놓는다고? 그게 오히려 더 문제가 될 것 같은데?
- 맹세코 문제될 일은 없어. 그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할 뿐이지.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렇게 할 수도 없어.
- 설마 나중에 내 몸을 빼앗는다거나 뭐 그러려는 건 아니지?
- 내 존재를 걸고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지. 그럴 일은 없어. 그리고 솔직히 가능하지도 않고.
- 불가능하다고?
- 내가 너랑 같은 지구인이고 지금 이 실력을 갖고 있다면 가능했겠지. 하지만 사는 세상이 달라서 불가능해. 이렇게 서로의 영혼을 섞는 것도 나나 되니까 하는 거지, 원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 그런가?
- 그래. 그래서 끈을 이어놓으려고 하는 거야.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뭐, 지금의 계산으로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잖아. 100%는 없어.
- 후우. 좋아. 그럼 그렇게 해.
- 그럼 더 시간 끌 필요 없으니 시작할까?
- 그래.
그 뒤로 둘은 영혼을 교환했다.
영혼을 교환하는 과정은 영상으로 보기에는 정말 별 거 없었다.
하지만 반태수는 이 과정 자체가 카르멕의 수작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영혼을 다루는 법 자체를 모르는 17살 반태수가 과연 제대로 정확히 기억만 담아서 영혼을 떼어줄 수 있었을까?
반면 카르멕은 영혼에 대한 막대한 지식을 가진 자였다. 영혼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결코 공정하지 않은 교환을 했으리라.
특히 강한 염원을 통해 영혼을 건네주는 방식도 마음에 안 들었다.
반태수는 생각보다 자신의 원래 영혼이 카르멕에게 많이 갔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르멕의 영혼도 그와 같은 양으로 자신에게 왔을 것이다.
게다가 카르멕은 자신의 영혼에 끈을 이어두었다.
반태수는 그 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초록색 관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심상공간으로 카르멕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데 대화중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몸을 빼앗는 게 불가능하다고?”
카르멕은 심지어 그걸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했다.
마법사의 맹세는 결코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맹세를 어길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굉장한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
아마 존재를 걸고 맹세했으면 그걸 어길 경우 존재 자체가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어쩌면 존재가 지워질 수도 있는 위험한 맹세다.
살짝 혼란스러웠다.
‘몸을 빼앗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목적이 뭐지?’
일단 의도적으로 강한 염원을 통해 많은 영혼을 보내도록 한 것, 그리고 영혼에 끈을 이어둔 것 외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을 찾기 어려웠다.
카르멕은 분명 뭔가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그건 지난 번 만남에서 확인했다.
'대체 그게 뭘까?’
아무래도 직접 만나야 뭔가 해결이 될 듯하다.
반태수는 차분히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정리해 봤다.
일단 영혼의 힘을 더 키워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에 카르멕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끈을 잘라내야 한다.
그럼 더 이상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리고 속성 종족.’
속성 종족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한다.
그들이 만든 의자의 정체도 알아내야 하고.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영혼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반태수는 당분간 이면세계로 가지 않고 지구에서 영혼의 힘을 키우기로 했다.
"일단…… 미국으로 가야겠어.”
아는 사람들을 쭉 만나면서 영혼을 키울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워낙 오랫동안 영상에 집중했더니 정신적 피로가 장난 아니게 쌓였다.
반태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깊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