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 나중을 기약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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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마법진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했다.
정말로 찰랑이는 바다였고, 바다는 마법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수한 위상에 마법진이 겹쳐지고 또 겹쳐진 채로 사방 모든 마법진과 상호작용했다.
반태수는 그 마법진들 사이를 유영하면서 마법진에 담긴 의미를 분석했다. 아니, 그냥 받아들였다.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것이 시스템이로구나.’
반태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실 처음 있는 경험 아닌가.
그저 시스템을 집중해서 분석하고자 했을 뿐이다.
한데 의식이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에는 이것이 훨씬 효과적이긴 했다.
물론 효과적이 라고 해서 불가능했던 분석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었다.
원래라면 티끌만큼 분석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손톱만큼 할 수 있는 정도?
아무튼 그게 어디인가.
반태수는 마법진의 바다를 유영하며 끊임없이 시스템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하지만 이 집중의 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별로 오래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주변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반태수는 아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아……!”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반태수는 자신이 탑의 벽에 양 손을 짚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분석을 시작할 때의 자세였다.
반태수는 천천히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야, 너 괜찮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답지 않게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집중 상태에서 영역화고 뭐고 다 풀려 버렸다. 그래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영역화를 펼치고 있었어도 시스템에 집중했기에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슨 일 있었느냐고?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이 미친놈아!”
반태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저 난리란 말인가.
“너 사흘 동안 그 자세로 있었어!”
“예?”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탑에 손만 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고!”
워낙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사흘 동안 여기를 지켰고.
그나마 아공간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항상 준비하고 다니기에 굶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시시각각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한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으니 갑자기 심술이 확 올라왔다.
“인간적으로 그럴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라니까요? 알았으면 미리 얘기했죠.”
반태수는 반사적으로 변명을 한 다음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흠. 당연히 감사해야지. 나중에 커피나 한 잔 주든가.”
반태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슬슬 맥주 제조에 도전해볼 계획인데, 잘 만들면 한 잔 대접할게요.”
"맥주?"
데드릭 벨크리스가 솔깃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언제 할 건데?”
“글쎄요. 이번 일 끝나고?”
틈틈이 공부는 해왔다. 하지만 특별한 맛을 덧씌우는 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아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리라.
그러려면 한동안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일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진행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타노로스 놈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단 말이야.”
모든 걸 타노로스 탓으로 돌리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투덜거림에 반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영감님, 이제 할 거 다 했으니 슬슬 떠나죠.”
“떠나긴 뭘 떠나. 나 오늘은 잘 거야. 사흘 동안 한숨도 못 잤는데 지금 떠나자고?”
반태수는 얼른 수긍했다.
“그럼 내일 떠나죠.”
사실 비행선을 타고 가면 비행선에서 자면 되니까 굳이 하루 미룰 필요는 없다.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가 제법 고생했으니 저 정도는 받아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전혀 피곤하지가 않네.’
반태수가 느낀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사흘 동안 가만히 서서 시스템을 분석한 셈이다.
그런데도 몸에서 활력이 넘쳤다.
마치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밥도 계속 굶었을 텐데 허기지지도 않는다.
마치 밥을 먹고 잠시 시간이 지나 안정된 것처럼.
반태수는 시스템이 깃든 탑을 잠시 쳐다봤다.
시스템과 자신의 연결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이번 집중이 어떤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뭐해?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뇨. 가서 쉬어야죠. 가시죠. 커피 한 잔 마시고 푹 주무세요.”
“자려는 사람한테 커피 주는 거냐?”
“제 커피 특별한 거 아시잖아요. 잠 안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그럴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반태수도 따라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하부 도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향했다.
***
호텔에 도착한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자신의 객실로 갔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나서서 호텔을 예약했기에, 물론 직접 예약한 사람은 데드릭 벨크리스의 수행원들이었지만, 호텔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방을 얻었다.
반태수는 객실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상당히 좋은 소파였다. 안락함을 주는 마법까지 걸린 마도구이기도 했고.
소파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 아니, 지난 사흘 동안 있었던 일을 가만히 떠올려봤다.
설마 그런 식으로 시스템에 뛰어들어 직접 마법진을 분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성과가 상당했다.
마법 실력이 늘어나거나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라서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벽을 넘은 것보다 훨씬 대단한 걸 얻었다.
반태수는 시스템과의 연결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주 끈끈했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매달리는 것처럼.
연결이 강화된 후부터 시스템의 적용 범위를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일단 연산보조를 쓸 수 있는 범위는 제한이 없었다.
어디 있건 이면세계에 존재하기만 하면 연산보조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연산보조를 제외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쓰는 모든 마법은 시스템이 있는 곳, 그러니까 탑을 기준으로 한다.
이 도시가 아니면 시스템의 강력한 힘을 쓸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걸 연산보조로만 써먹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시스템에 담긴 힘 자체가 정말 엄청났다.
타노로스와의 전투에서 쓴 건 시스템이 가진 힘의 티끌만큼도 뽑아내지 못한 거였다.
잘 쓰면 달도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을 쓸 수도 있었다.
아니, 이 행성을 멸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시스템에 담긴 힘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그 힘을 제대로 뽑아 쓰려면 쓰는 자의 역량도 중요했다.
아무튼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기에 반태수는 쿨하게 포기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시스템이 이거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면세계에는 이것 말고도 시스템이 또 존재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이번에 시스템에 뛰어들어서 얻은 정보 중 하나였다.
과연 몇 개의 시스템이 더 있을까? 만일 그 모든 시스템과 연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반태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려서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스템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는 하루를 쉰 후, 아침 일찍 바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크랙톤이었다.
비행선을 타고 가기에 일직선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있는 퍼즐 유적들을 클리어하기 위해 경로를 좀 복잡하게 꼬았다.
너무 멀리 있는 것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었고, 그저 돌아가는 길에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유적만 골라서 클리어했다.
당연히 데드릭 벨크리스와 함께 했는데, 반태수가 하는 걸 보고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죽은 유적을 되살려서 기어코 클리어까지 한 셈이니까.
지금까지 반태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반태수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었다.
이제 비밀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도 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크랙톤까지의 거리가 절반쯤 남았을 때, 데드릭 벨크리스가 궁금증을 못 참았는지 결국 물어봤다.
“저 유적들 클리어하면 대체 뭐가 있는 거냐? 유물이지?”
“유물이죠.”
반태수는 대수롭지 않게 유적을 클리어하고 얻은 유물, 그러니까 부품을 보여줬다.
그걸 본 데드릭 벨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지? 뭔가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유물이네?”
데드릭 벨크리스는 유물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마력도 넣어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려고 이런 저런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도 먹혀들지 않았다.
“이거 대체 뭐냐? 넌 뭔지 아니까 계속 모으는 거 아냐. 그렇지?”
“뭐, 별 거 아닙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이걸 자랑할 만한 사람이 한 명 생겼다.
“그럼 잠깐 쉬어 가면서 구경이나 좀 해볼래요?”
“구경? 뭘?”
“이거 뭔지 궁금하다면서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비행선이 근처에 착륙했다.
거대한 평원이었는데, 마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이러다가 갑자기 마수들이 떼로 몰려올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면세계의 도시 밖이니까.
물론 지금은 마수들이 좀 몰려와도 된다. 아주 멋진 시연이 되지 않겠나.
비행선에서 내린 반태수는 아공간에 보관하던 로봇을 꺼냈다.
“으헉! 이게 대체 뭐야! 이거 로봇이야?”
데드릭 벨크리스는 기겁을 했다. 그리고 황홀한 눈빛으로 로봇을 바라봤다.
“유적에서 얻은 건 부품입니다. 그걸 모아서 조립하면 저런 걸 얻을 수 있죠.”
“설마 트릴린드라에서 타노로스 놈들이랑 싸울 때 썼던 그 전투기! 그것도 그 부품을 조립해서 만든 거야?”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입을 쩍 벌리고 반태수를 바라봤다.
“왜요? 도둑질 당하는 것 같아요?”
반태수가 씨익 웃으며 묻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 무슨 멍청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개소리야? 너 아니면 어차피 죽은 유적인데. 젠장! 더럽게 부럽네! 특히 저거! 저거 설마 탈 수 있는 거냐?”
반태수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저건 원격조종으로 움직여요. 유적 털다 보면 탑승형도 하나쯤 있지 않겠어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탑승형 나오면 그거 나 주면 안 될까? 내가 진짜 소원이거든? 대가로 뭐든 달라는 대로 다 주마!”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당장 약속하긴 그렇고 일단 구하고 다시 생각해보죠.”
이제 시스템의 힘까지 얻었으니 부품을 분석해서 복제하는 능력도 더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제 이 로봇도 추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로봇을 구해도 그것 역시 복제할 수 있으면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한 대 주는 것이 뭐 어렵겠나.
데드릭 벨크리스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로봇을 바라봤다.
“저거 한 번 움직여봐라. 구경 좀 하게.”
반태수는 바로 제어 마법진을 활성화해서 로봇을 움직였다.
거대한 마력이 움직이며 로봇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내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그저 단순히 걷고 뛰는 것뿐인데도 반응이 아주 열광적이었다.
이내 로봇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쏟아내고 하늘을 날자, 데드릭 벨크리스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는 결국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유적 따먹으러 가자!”
따먹긴 뭘 따먹는단 말인가.
반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어찌나 재촉하는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데드릭 벨크리스가 알아서 퍼즐 유적에 대한 정보를 잔뜩 뽑아서 반태수에게 건넸다.
안 그래도 벨크리스 가문의 가주가 허락까지 했으니 데드릭 벨크리스는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유적에 대한 정보를 싹싹 긁었다.
크랙톤으로 돌아가는 경로가 변경되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는데, 지금은 범위가 훨씬 넓어져서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게 훨씬 빠를 텐데.’
반태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데드릭 벨크리스가 많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주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퍼즐 유적, 정말 많았다.
하긴 그래야 그 많은 부품들을 조달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 길고 복잡한 경로를 모두 돌파해 결국 크랙톤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설계도를 하나 찾아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렇게 소망하던 탑승형 로봇의 설계도였다.
그걸 확인했을 때, 데드릭 벨크리스는 너무나 기뻐 펄쩍 뛰었다. 정말로 점프해서 정수리가 천장에 쾅 부딪혔다.
아이가 장난감을 선물 받으면 아마 딱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크랙톤에 도착한 이후,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를 빼고 혼자서 유적을 찾아다녔다.
타노로스를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주전함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