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 5대 가문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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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 나이를 먹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멋대로 사느냐.”
모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노인의 모습은 데드릭 벨크리스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흥. 형님이나 잘 하쇼. 그리고 커피 마시고도 똑같은 소리 할 수 있으면 내가 진심으로 인정해주지.”
데드릭 벨크리스의 형인 하네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네놈의 인정을 받아서 뭐하게?”
데드릭 벨크리스가 얄밉게 웃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지. 뭐, 형님이라면 말로 세운 자존심이 중요하니까 끝까지 안 마시겠지만.”
하네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같잖은 도발은. 내가 고작 커피 따위에 의미를 둘 것 같으냐?”
“오오, 커피 따위라. 내가 그 말 아주 똑똑히 기억했으니까 형님도 잊지 마쇼. 아, 이거 녹음이라도 해뒀어야 하는데.”
하네릭 벨크리스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하, 이놈 봐라? 그래, 그 잘난 커피 어디 한 번 보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바라봤다.
어찌나 당당한 눈빛과 태도로 바라보는지 마치 당연히 커피를 지금 내놔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커피, 맡겨놨습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뭐 그리 빡빡하게 그래? 여기 몇 명 안 되잖아. 딱 한 잔씩만 마시자. 이후의 요청은 내가 책임지고 막아주마.”
반태수는 시선을 돌려 벨크리스 가문의 가주를 쳐다봤다.
가주는 굉장히 흥미로운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가주의 물음에 반태수가 되물었다.
"방금 우리 영감님이 한 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가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숙부님을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정말로 친한 모양이군. 아무튼 우리 숙부님을 누가 말리겠나.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관철시키는 분인데.”
가주에게 직접 저런 말을 듣고 나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 가문에서 가지는 위상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얼마나 개또라이 취급을 당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그럼 영감님이랑 가주님만 믿겠습니다.”
그 뒤로 아공간을 열고 커피를 준비했다.
따로 뭘 할 필요도 없었다. 아공간 안에 충분한 양의 커피가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
최근 제작한 커피맛을 최대한 끌어올려주고 보존해주는 마법이 담긴 머그컵을 사람 수에 맞게 꺼냈다.
머그컵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마력에 다들 눈을 번득였다.
한눈에 봐도 보통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특히 이런 물건 보는 눈이 정말로 뛰어난 가주는 이 머그컵들이 하나하나 거의 유물에 근접할 정도로 대단한 가치를 가졌다는 걸 바로 파악했다.
“대단하군.”
그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고작 이걸 보고 대단하다고 하면 나중에는 기절이라도 하겠군.”
이내 컵에 커피가 적당히 채워졌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잔을 먼저 챙겼다.
“자자, 다들 잔 집으시고…… 이거 귀한 거니까 물 마시 듯 함부로 마시지 마시고 아주 조금씩 입에 머금고 맛과 향을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일단 향부터 한 번 맡아보시죠.”
다들 데드릭 벨크리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저 사람이 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시선이 커피로 향했다.
대체 이 커피가 무엇이기에 천하의 데드릭 벨크리스가 저러는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일단 향은 기가 막혔다.
다들 잔을 들고 데드릭 벨크리스가 말한 대로 아주 조금만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입안에서 휘몰아치는 맛과 비강을 꽉 채우는 향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창처럼 뇌리에 콱 틀어박혔다.
다들 보유한 마력량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막대했기에 커피가 그들에게 주는 자극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다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꿀꺽.
그제야 커피를 삼켰다. 여전히 남은 맛과 향의 여운이 뇌리를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이러다 기절하는 게 아닐까 싶은 순간 서서히 여운이 가라앉았다.
다들 천천히 눈을 뜨고 두려움과 환희가 뒤섞인 표정으로 손에 든 커피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맛과 향을 설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반태수는 묘한 눈으로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이다.
보통은 한 번 입을 대면 끝까지 커피를 마신다.
한데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모금, 아니, 반 모금 정도 마신 후에 다시 커피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방에서 커피를 계속 즐기는 사람은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 둘 뿐이었다.
물론 반태수도 커피를 천천히 마시는 중이었고.
“뭐야. 다들 커피 안 마셔? 이거 그냥 맛있기만 한 커피 아니야. 몸에도 좋아.”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하네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하네릭 벨크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응.”
하네릭 벨크리스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엔 처음보다 더 진하고 황홀한 맛과 향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하, 대체 이게 뭐지?”
하네릭 벨크리스는 결국 커피에 굴복했다. 그 뒤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이 커피 한 잔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획득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들 하네릭 벨크리스와 비슷했다.
끝까지 버텨낸 사람은 딱 한 명, 가주뿐이었다.
반태수는 신기한 눈으로 가주를 쳐다봤다.
“안 드실 겁니까?”
“무서워서 못 마시겠군.”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괜찮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마력량이 많은 사람은 반태수다.
그런 반태수도 커피로 인한 부작용이 없다.
한데 고작 이 정도 마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걸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중독 안 됩니다. 커피 없다고 어떻게 되는 거 아닙니다. 좋아하는 기호식품 하나 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반태수의 말에도 가주는 반신 반의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더 마시자마자 굳이 이걸 왜 참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데.
결국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몽땅 마신 가주가 좌중을 둘러봤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데드릭 벨크리스와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의 하네릭 벨크리스의 구도가 재미있었다.
아마 한동안 하네릭 벨크리스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놀림을 견뎌야 하리라.
부디 적당히 해주길 바랄 뿐이다.
가주의 시선은 좌중을 쭉 훑은 다음 마지막으로 반태수에게 도달했다.
굉장히 신기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이번 타노로스의 습격을 통해 확인했다.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였다.
아마 시스템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한데 이런 대단한 커피까지 갖고 있다니. 좀 결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보통이 아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그리고 대화도 그리 많이 해보지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호감이 더욱 짙어졌다.
보아하니 자신만 그러는 게 아니라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앞으로는 뭘 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가주의 물음에 반태수는 바로 대답했다.
“일단 타노로스와 싸울 준비를 할 계획입니다.”
“타노로스와 싸워?”
가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봤다. 설마 교묘한 말로 꼬드겨 반태수를 타노로스와의 싸움으로 끌고 간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가주의 시선에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알고는 열심히 손사래를 쳤다.
“내가 뭘 한 건 아닐세. 오히려 저 녀석이 날 끌고 다니면 끌고 다녔지, 내가 끌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저건 순수하게 저 녀석의 선택이라네.”
반태수도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타노로스가 생각보다 강해서 싸우다보면 얻는 것도 많거든요.”
가주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잘 아는군. 타노로스, 우습게 봐선 안 될 조직일세. 감춰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정말로 싸우려면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해야 하네.”
“그럴 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얼마든지 해줄 테니.”
실로 파격적인 말이었다. 다들 처음에 저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반태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유적을 좀 둘러보고 싶습니다.”
“유적?”
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애매한 부탁이었다. 자신의 직권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사이에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 유적 있잖습니까. 문제를 내고 풀어가는 방식의.”
“아아, 그런 유적, 있지. 대부분 문제를 풀다 못 풀고 유적이 닫혀 버리지만.”
“그 닫힌 유적에 대한 모든 정보와 출입 권한을 얻고 싶습니다.”
가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어려울 것 없지. 새 유적도 아니고 이미 닫혀버린 유적이니까.”
반태수는 빙긋 웃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리스트를 업데이트 했는데도 아직 모자란 느낌이었다. 아마 리스트에 올라오지 않은 유적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괜히 몰래 숨어서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조심하지 않고 마구 유적을 클리어 하면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다.
반태수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일렁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우주전함을 조립하고 말리라.
***
“야, 꼭 하부 도시에서 머물러야 하는 거야?”
데드릭 벨크리스가 투덜거렸다.
지금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는 하부 도시, 정확히는 시스템이 깃든 탑 근처에 있었다.
탑을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탑을 지키는 사람들과 드론들만 잔뜩 있었다.
그 높은 탑을 드론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적당한 간격으로 떠서 감시했다.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는 탑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시스템을 확인하려면 상부 도시가 훨씬 낫지 않아? 전에 등록했던 거기로 가야지. 뭐…… 열쇠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찌저찌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영감님은 그냥 가셔도 된다니까요? 숙소도 상부 도시에 잡으시고 갈 때 만나서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야, 나 데드릭 벨크리스야. 한 번 같이 가기로 했으면 끝까지 같이 간다.”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그럼 조용히 따라오세요.”
“그럴까?”
반태수가 탑 쪽으로 걸어가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탑을 지키는 능력자와 군인들이 제법 많았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는 사람인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근데 영감님 만날 사람 많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반태수의 물음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많아졌어.”
“예?”
“내가 입방정을 떨어서 커피를 같이 마시는 바람에 날 만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고. 지금은 그냥 도망칠 타이밍이야.”
“그럼 그냥 떠나도 되는 거잖아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너 할 일 있잖아. 하려던 거 해. 내가 좀 기다리면 되니까.”
반태수는 잠시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탑으로 향했다.
탑을 조사하는 일정을 최대한 줄여봐야겠다.
‘아무래도…… 시스템이 여기 하나만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건 불현듯 찾아온 직감 같은 거였다.
일단 탑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시스템을 이용한 영역화를 통해 탑 내부를 확인했다.
영역화를 탑에 꽉 조여서 집중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탑 내부의 모습이 확연하게 그려졌다.
탑 내부는 얇은 유리판 같은 것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유리판과 유리판 사이의 간격은 10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냥 유리가 아닌데?’
유리처럼 보이지만, 재질이 유리와는 전혀 달랐다.
반태수가 처음 보는 재질이었다. 유리와 비슷한데 그 안에 마력이 채워져 있었다.
그냥 채워진 게 아니라 다양한 패턴을 이루면서 채워져 있었다.
그 자체로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법진이 유리판 하나에 수십 개가 겹쳐져 있었다. 당연히 위상 겹침을 이용했다.
유리판과 유리판 사이의 빈 공간에 그렇게 겹쳐진 마법진들의 간섭 현상을 통해 전혀 새로운 패턴의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그 모든 마법진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간섭하고 보완하고 가끔은 단절하기도 하고.
“와, 진짜. 이걸 어떻게 해석하지?”
지금 반태수의 실력으로는 해석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스템의 힘을 이용하면 어떨까?
반태수는 연산 보조를 이용해 탑 내부의 마법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에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는 능력답게 조금씩 해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을 아주 오래 들이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수십 년은 투자해야 그나마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반태수에게 그 정도 시간은 없다.
이건 얻을 것만 얻고 나중을 기약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날 수 없으니 며칠 동안만 오기를 부려봐야겠다.
반태수는 탑에 바짝 붙은 채 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갔고, 이내 세상을 전부 잊고 오직 시스템에 매달렸다.
마치 시스템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사흘이 훌쩍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