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 5대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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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뒤처리는 도시에서 알아서 진행했다.
사실 뒤처리 할 것도 별로 없었다.
반태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가 푹 쉬었다.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도 반태수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뒀다.
반태수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파묻혀 잤다.
열 시간 정도를 자고서야 일어나 씻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피곤할 일은 없었는데,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이 생각보다 굉장히 피곤한 일이거나.
하지만 시스템을 쓸 당시에는 별로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워낙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서 아주 편안했다.
아무튼 열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해졌다.
밥은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먹었는데, 맛이나 분위기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글락 호텔의 조식보다 더 맛있었다. 그동안 겪은 웬만한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음미하듯 충분히 요리를 즐긴 반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식당으로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가 들어왔다.
"뭐야, 벌써 다 먹은 거야?”
데드릭 벨크리스가 성큼성큼 걸어 반태수에게 다가갔다.
반태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그냥 올라간다고 해도 저 두 사람이 바로 쫓아올 테니까.
두 사람은 그런 반태수를 보며 씨익 웃고는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잘 쉬었고?”
“푹 잤습니다.”
“어제 아주 그냥 활약이 끝내줬다며? 나야 싸우느라 못 봤지만.”
“영감님도 어제 아주 잘 싸우시던데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어제 좀 끝내줬던 거 같아. 마력회로, 인정이다. 최고야. 솔직히 어제 전투복 안 입고 갔어도 다 때려잡을 수 있었을 것 같더라.”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였다. 어제 데드릭 벨크리스는 싸우는 내내 신 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확 드러났다.
반태수가 전격의 창으로 도와서 전투가 일찍 끝나긴 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승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식사는 안 하십니까?”
이 식당은 뷔페식이었기에 가서 음식을 가져와야 한다.
"밥이 뭐가 중요해?”
데드릭 벨크리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살라자 샤마쉬가 냉큼 말을 꺼냈다.
“가문 수뇌부에서, 정확히는 도시 관리 위원회에서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네.”
그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내가 하려는 말을 왜 가로채?”
“누가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얼른 얘기하고 빨리 상황을 마무리 하는 게 중요하지.”
반태수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시스템에 마력지문 등록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손을 휙 내저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그건 절대 문제될 게 없다고.”
반태수는 시선을 살라자 샤마쉬에게 돌렸다.
저 말을 믿어도 되냐는 눈빛과 함께.
살라자 샤마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님 말, 믿어도 되네, 이번에 부르는 건 어제 타노로스의 습격 때 세운 공 때문이니까."
반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좀 나서긴 했는데…… 솔직히 안 나섰어도 비슷한 결과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5대 가문의 저력이 대단하잖습니까. 솔직히 어제는 그저 지켜보기만 한 것 같던데. 아닙니까?”
살라자 샤마쉬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한데, 그거야 속사정을 잘 모르니 이유는 알 수 없지. 그냥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서려고 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정 때문에 나서지 못했던 건지.”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살라자 샤마쉬를 쳐다봤다.
“이상할 건 없네. 어쨌든 어제의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자네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까.”
반태수는 반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만든 판이지만 어쨌든 공은 공이니까.
“언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도시 중심부에 있던 빌딩 기억하나?”
반태수가 마법을 썼을 때, 탐지를 날렸던 빌딩이다.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보기로 했네. 보통 별 일 없으면 오전에 출근하듯 다들 모이니 언제 가도 괜찮을 걸세.”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사 후에 바로 가죠.”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니었기에 밥만 먹고 가면 적당히 시간이 맞을 듯했다.
“됐다. 밥은 무슨. 당장 가자. 어차피 늙은이들이라 아침 잠 없어서 다들 나와 있을 거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서자, 살라자 샤마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들은 곧장 호텔에서 나가 비행선을 불러 탔다.
여긴 정말 비행선을 이용한 교통이 잘 이뤄져 있었다.
반태수 일행은 편안하게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
상부 도시 중심부에 있는 높은 빌딩.
빌딩의 최상층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빌딩 최상층은 한 층을 통으로 쓰게 되어 있었는데, 기둥조차 없었다.
그저 넓기만 한 공간 한가운데에 길쭉한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테이블 주위에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곱 명의 노인이 적당한 자리에 띄엄띄엄 앉은 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노인들은 각기 다른 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중 흰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대화를 주도했다.
“이렇게 답답한 전투는 처음이었어.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건 영 내 체질에 안 맞아.”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 요즘 장로원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 이건 나만 그러는 게 아니야. 우리 바로 아래 계층에서 제법 소요가 일어나고 있어. 이건 심각한 상황 아닌가?”
“어떻게든 정리해야지. 그건 우리의 능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
“초점이 우리보다는 장로원 쪽에 맞춰져 있다니까?”
5대 가문은 장로원을 비롯한 몇몇 협력 기관을 천 년이 넘게 운영해왔다.
그동안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장로원에 대한 의구심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 지시가 문제야. 다들 불만이 팽배해 있어. 언제 터질지 조마조마하다고.”
“아니, 장로원은 대체 왜 그따위 지시를 내린 거지?”
장로원이 아니었다면 이번 습격은 정말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타노로스도 진심으로 덤빈 건 아닌 듯하고 간을 본 느낌이 강했다.
“타노로스 놈들, 아무리 그동안 이해가 안 가는 짓을 많이 했어도 이번은 정말 이상한 거 같지 않나?”
“확실히 이상하긴 했지. 그래서 그나마 불만이 아주 폭발하진 않은 거고.”
결과가 나빴으면 아마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 것이다.
“젊은 녀석들이 너무 혈기왕성해서 이번이 그걸 분출할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차후에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줘야지.”
다들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힘이 너무 쌓이고 있어.”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내부에 힘이 쌓이고 불만도 쌓이기 마련이다.
거기에 균열이 생기면 큰 문제로 발전한다.
그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만큼 확실한 조치는 없다.
“마지막 전쟁 기록이 언제쯤이었지?”
“80년 전이었지. 오래 되긴 했어.”
“맞아. 그때쯤 타노로스랑 전쟁을 했었지. 80년…… 힘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라진 거 같지 않나?”
“빨라졌지. 그 전쟁 전에는 200년이나 평화로웠는데.”
“200년 다음에 80년이라…… 짧아져도 너무 짧아졌는데?”
“아직 모르는 건데 짧긴 뭐가 짧아. 우리가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번에도 타노로스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겠지. 셰딤이 무너졌으니까.”
“부디 이번 습격을 보고 타노로스의 힘을 오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다들 피식 웃었다.
“어린 녀석들이 우리 얘기를 귀담아듣겠어? 큰코 다쳐봐야 정신 바짝 차리지.”
“그럼 타노로스 놈들이 그걸 노린 건가?”
“그렇다기엔 그놈들이 쏟아 부은 물량이 너무 많아. 고작 성공할지 확신할 수도 없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그런 낭비를 한다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
“아무튼 우리라도 준비를 철저히 하자고. 희생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지나치게 확대되면 곤란하니까.”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검은 로브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무슨 악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악당은 무슨. 우리가 나서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타노로스라면 아마 전쟁 시작 전에 곳곳에서 대형 테러를 잔뜩 저지를 거야. 그러니 그거에 대한 대비도 좀 해야지.”
다시 얘기를 진행하다가 흑색 로브 노인이 흰색 로브 노인에게 물었다.
“전쟁이 언제쯤 일어날 것 같나?”
횐색 로브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늦어도 3년 안에는 일어날 것 같네. 빠르면 몇 달 후에 일어날 수도 있고.”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졌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상층과 1층만 운행하는 엘리베이터였기에 저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는 것은 여기로 올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누구지?”
“확인해보면 되지.”
흰색 로브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튀겼다.
그러자 허공에 화면 하나가 훅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내부를 찍은 CCTV 영상이었다.
세 사람이 보였다.
“아, 보자고 했던 사람이 오는군.”
“생각보다 일찍 왔네?”
“뭐, 시간 끌 일이 아니긴 하지.”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세 사람이 나왔다.
반태수는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곱 노인을 슥 둘러봤다.
마법사와 능력자가 섞여 있었다.
다들 대단한 노인들이었다.
마법사는 세 명이었는데, 전부 10서클이었다.
능력자들 역시 마력이 어찌나 잔뜩 응축되어 있는지 주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일 지경이었다.
“자네가 반이로군."
흰색 로브 노인이 앉은 채로 반태수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하, 이 영감들 진짜. 손님이 왔으면 대접할 생각을 해야지, 전부 앉아서 뭣들 하는 거야?”
노인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걸 보고도 당당하게 서서 말을 이었다.
“얼른얼른 보상이 뭔지나 말해. 우리 시간 별로 없으니까.”
흰색 로브 노인이 말했다.
“우린 네 뒤에 있는 마법사 반과 얘기하고 싶은데. 왜 네가 나서지? 대변인이라도 되나?”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나도 보상을 받을 당사자잖아. 그러니까 나하고 얘기하면 돼.”
“보상 얘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다.”
“그럼, 뭐? 또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하려고? 그리고 보상이 제일 중요한데 보상 얘기는 왜 안 해?”
흰색 로브 노인이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래. 보상으로 뭘 원하지? 뭘 주고 싶어서 이렇게 속을 긁어?”
“상부 도시 시민권.”
그 말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함부로 내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5대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시민권을 얻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좀 곤란하군.”
“그 정도 공은 세웠다고 보는데? 여차하면 내 공이랑 저기 저 녀석 공까지 더해서 처리해도 돼.”
데드릭 벨크리스는 살라자 샤마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노인들도 무작정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안 그런가?”
흰색 로브 노인이 반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반태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받아놓으면 쓸 일이 있겠죠.”
상부 도시 시민권이라니. 구미가 확 당겼다.
언제든 여기 와서 지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고 싶을 때마다 와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일곱 노인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짓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 로브 노인이 반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민권을 발급해주지. 대신 모든 공을 그거 하나로 상쇄할 걸세.”
“알겠습니다.”
반태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들이 굳이 시민권을 달라고 말한 이유는 이런 식으로 조금씩 반태수와 자신들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5대 가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벽이 서 있기 마련이다.
반태수는 좀 덜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은 도시에 시민으로 묶여 있으면 좀 더 친밀감이 생기지 않겠는가.
“자, 그럼 영감들 용건을 말해. 우리 할 일은 끝났으니까.”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흰색 로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조만간 큰 행사가 열릴 예정이네.”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 행사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후계자 승인 행사 말입니까?”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가 편하겠군. 거기에 꼭 참석해줬으면 하네.”
안 그래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흰색 로브 노인이 말했다.
“그냥 와서 구경만 하라는 얘기가 아닐세. 다른 후계자들과 함께 승인 행사에 참여하라는 뜻이네.”
반태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니까 그 초록색 액체가 든 관에 인사하는 요상한 행사에 직접 참여하라는 말인가?
“이유가 뭡니까? 전 후계자도 아닌데.”
“장로원의 결정이네.”
반태수는 반사적으로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 쪽을 쳐다봤다.
장로원에 데드릭 벨크리스의 큰형인 쿠오릭 벨크리스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했는데, 표정만 봐도 그들의 의견이 어떤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장로원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듯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행사일 보름 전에 알려주겠네.”
반태수는 이 사안은 거절하고 말고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말은 권유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반태수도 그 얘기를 들은 순간,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죠. 참여하겠습니다.”
다들 환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네. 아마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걸세.”
반태수는 과연 정말로 그럴지 궁금해졌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