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포탈 쟁탈전 >
======================
"어우, 귀찮아 죽겠다. 이거 언제까지 계속될까?"
엄대협이 엄살을 피웠다.
하지만 아예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찾아오고 연락이 오고 심지어 시정부에서 부르기도 하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정신이 없어서 실수도 여러 번 저질렀을지 모른다.
"잘 참고 견뎌. 아마 공사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테니까.”
이종균은 엄대협에게 협박한 대로 사업에서 발을 빼거나 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느꼈나보다.
아무튼 그 뒤로 끊임없이 엄대협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모양이었다.
어찌나 저자세로 애처롭게 나오는지 엄대협도 함부로 대하기가 미안해서 되도록 피했고, 마주치더라도 오히려 쩔쩔 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결국 그쪽은 쇼핑몰을 받게 되는 건가?”
"그렇겠지?”
"넌 괜찮아? 안 아까워? 돈도 많이 넣었을 텐데.”
"변두리에 아무리 그럴듯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쇼핑몰이 잘 될 것 같아?”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도심지에도 쇼핑몰은 많아. 그런데 굳이 변두리로 간다고? 위험부담을 안고?”
"그만한 메리트를 주면 되지. 예를 들어 가격을 확 낮춘다거나, 아니면 쉽게 얻기 힘든 마도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매장을 크게 연다거나.”
"그런 마도구를 아무나 팔아도 되는 거야?”
"아무나라니. 당연히 허가를 받아야지. 그 정도 허가 받는 거야 일도 아니고.”
이번 일을 하면서 엄대협은 시정부에 아주 굵직한 끈을 연결했다.
앞으로 웬만한 일은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기…… 그 훈련장 포기할 생각은 없지?”
"당연하지. 그 훈련장 때문에 여기 발을 들인 건데.”
"대체 거기 무슨 꿀을 발라놨기에 다들 이렇게까지 목을 매는 거야?"
그냥 꿀 정도가 아니라 지구에서 온 능력자들에게는 귀환이 달린 일이었다.
포탈이 막히면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반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훈련장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애초에 확실히 얻으려고 설계를 그런 식으로 변경한 것이기도 했다.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 실수 없이 포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반태수는 잠시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뭐가 있긴 있구나. 확실히.”
엄대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뭔가가 걸려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더 열심히 해야지.
둘이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가볍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저택의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이 저택에 손님이 올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엄대협을 보기 위해 이종균이 자주 오긴 한다.
"이종균?”
"아닙니다. 오스윈 프리든 님과 페일라 린치필드 님입니다.”
엄대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이만 가보는 게 낫겠네. 생각해보니 밖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깜빡 했어. 기대하라고 조만간 진짜 끝내주는 의뢰 하나 잡아올 테니까.”
엄대협은 그 말을 남기고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저놈은 왜 그렇게 오스윈 프리든을 무서워하는 거야?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반태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를 맞이하러 나갔다.
초대한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방문했으니 커피와 쿠키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슬슬 새 메뉴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커피와 쿠키가 워낙 강력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메뉴의 다양성을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레시피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실력이 진짜 많이 늘긴 했나보네.’
요즘은 뭘 하든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해보면 생각과는 좀 다르지만.
반태수는 일단 오스윈 프리든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반 마법사님.”
응접실 안에는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함께 있었다.
반태수가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커피와 쿠키를 준비하겠습니다.”
반태수는 빠르게 커피와 쿠키를 준비했다.
커피 내리는 거야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었고, 쿠키는 아공간에 잔뜩 보관 중이었다.
커피와 쿠키를 테이블에 놓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와 쿠키를 모두 먹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커피와 쿠키를 모두 먹은 뒤, 입을 닦으며 오스윈 프리든이 말을 꺼냈다.
"반 마법사님이 알아보라고 하신 것, 재미있더군요.”
페일라 린치필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도시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해서 가능한 곳만 확인했어요.”
그것만 해도 100개가 넘었다. 정말 많은 도시를 짧은 시간 동안 확인한 것이다.
"실제로 특이한 사업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더군요.”
오스윈 프리든의 말을 페일라 린치필드가 받아서 이어갔다.
“크랙톤의 변두리 개발 사업처럼 급하게 결정되고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리고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대부분 신분을 최근 획득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반태수가 살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 100군데가 넘는 도시에서 그런 식의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겁니까?”
이건 생각보다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페일라 린치필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사한 도시가 그 정도라는 거고, 그 중에서 실제로 그런 식의 개발이나 공사를 진행 중인 곳은 스물다섯 군데 정도에 불과해요."
하지만 25군데라도 해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곳만 언급한 것 같았다.
아마 의심스러운 곳까지 다 하면 수가 두 배는 늘어나리라.
반태수도 그 모든 곳에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크랙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장악하는 거고, 다른 도시는 보험 성격이 강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대여섯 개쯤 더 추가로 포탈을 확보하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어느 포탈을 확보하든 반태수는 원하는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애초에 모든 포탈을 장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5대 가문이 나서면 가능할지도.’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도시의 지배자이니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구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 듯하고 말이다.
"혹시 그 중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오스윈 프리든이 빙긋 웃었다.
"전부 가능합니다. 어차피 우리 가문과 린치필드 가문 휘하의 도시니까요.”
물론 그렇게 하려면 그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과 협의해야 하지만, 이쪽에서 원한다면 큰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무조건 협조할 것이다.
"그 도시들을 빠르게 둘러보면서 일을 진행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마치 합창하듯 동시에 대답했다.
드디어 반태수와 함께 하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인지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언제 출발할까요? 일단 비행기부터 예약할까요?”
"도시들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스윈 프리든이 품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냈다.
테이블에 지도를 쫙 펼치니, 그곳에 붉은 색으로 표시한 도시들이 보였다.
오스윈 프리든은 아무 표식도 없는 도시를 짚었다.
"여기가 크랙톤입니다.”
반태수는 빠르게 붉은 표식이 된 도시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비행선을 타는 게 효과적이겠네요.”
도시에 도착한 뒤에 이동하는 시간도 있으니 비행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들이 생각보다 크랙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두 사람이 기대감이 한껏 섞여 반짝이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럼 바로 움직일까요?”
반태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고작 30분 후에 비행선이 떠올랐다.
***
반태수는 비행선을 타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포탈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시켰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함께 하는 일정이라서 그런지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술술 풀렸다.
오스윈 프리든은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그 도시에서 진행하는 개발 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다.
그리고 도시의 예정지역에 도착하면 바로 포탈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지도를 살펴봤다.
개발될 지역의 지도, 그리고 개발예정도를 동시에 태블릿에 띄워서 보여주면 반태수가 그걸 보고서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결정한다.
결정과 동시에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가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에 연락을 한다.
가문에서 시정부에 지시를 내리면 끝이다.
그 도시의 포탈은 반태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거기에 포탈이 있다는 걸 모른다. 그 개발 계획을 세운 지구의 능력자들 외에는 말이다.
워낙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하고 다니니 시간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데 가신 가문의 후계자들이 돌아다니면서 개발 계획에 끼어드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더구나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도시에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제법 눈에 띄었다.
보통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한데 거기에 반태수가 끼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반태수를 주시하는 5대 가문의 사람이 둘이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둘은 5대 가문 내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반태수 일행이 하는 일을 조사했고, 뭔가 재미있다고 생각해 더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번에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가문에 보고를 해버렸다.
이건 좀 더 크게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5대 가문 역시 뭔가 있다고 여겨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무려 5대 가문이 직접 나서서 하는 조사였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도 며칠 만에 100개가 넘는 도시를 조사했다.
그러니 5대 가문이 대대적으로 나서면 어떻겠는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수한 도시를 조사하고 결과를 뽑아냈다.
상당히 많은 도시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한 5대 가문은 즉시 움직였다.
반태수 일행이 돌아다니면서 했던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이 무수한 도시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 일은 지구의 능력자 연합들을 패닉에 빠트렸다.
***
넓은 회의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큰 테이블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인종도 다양했고, 국적도 다양했다.
이들은 전 세계에 있는 각 능력자 연합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수십 명이나 모였는데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표정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한 사람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겁니까. 얼른 대책을 마련해야죠.”
하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책이야 당연히 마련하고 싶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혹시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신 분은 없으십니까?”
여전히 다들 침묵했다. 한데 그 침묵의 끝에 구석에 앉은 누군가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짐작이 좀 가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다들 얼른 말해보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단숨에 시선을 모은 사내, 이종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시작은 크랙톤인 것 같습니다.”
“크랙톤? 그게 어디입니까?”
"한국에 있는 문 몇 개랑 프랑스에 있는 문으로 갈 수 있는 도시입니다.”
다들 빠르게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리고 크랙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두리에 무법지대가 있는 평범한 도시로군요. 인구는 2천만쯤 되고.”
"맞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종균은 자신이 겪은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얘기를 모두 들은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그 반이라는 마법사가 크랙톤의 개발 사업에 깽판을 놓은 게 시작이라는 말이로군요.”
확실히 날짜나 정황을 봐도 크랙톤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한데 그래서 뭘 어쩌잔 말인가.
이종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든 연합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해서 그 마법사를 압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법사를?”
이종균의 말은 좌중에 또 한 차례 침묵을 끼얹었다.
마법사는 위험한 존재다. 물론 마음먹고 상대하면 이기지 못할 건 없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한계가 있고, 이면세계든 지구든 숫자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이니까.
"싸우자는 게 아니라, 그 마법사와 대화를 나눠 보자는 뜻입니다. 그 대화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한 번쯤 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화를 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 마법사가 이번 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거라면 해소할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그 마법사가 확보한 포탈이라도 확실히 손에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종균은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마법사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뭔가를 눈치챘다면, 고작 크랙톤 한 군데의 문만 확보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게 했다면 최소 열 군데는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마법사 하나만 제대로 잡으면 최소 열 군데의 포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크랙톤의 포탈은 확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 좀 더 논의를 해봅시다.”
그날의 회의는 그 뒤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마법사에게 포탈을 양보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