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 인사를 다니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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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반태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여전히 손에 든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에라 나서스의 반응이 너무 예상 외였다.
방금 전화를 통해 들은 키에라 나서스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그저 반가움만 담겨 있지 않았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리고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온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평소의 키에라 나서스와는 좀 달랐다.
잠시 멍하니 있는데, 저 멀리서 비행선 한 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행선은 순식간에 도착했다.
호텔 근처에 비행선을 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용케 비행선이 딱 들어갈 만한 자리를 찾아 착륙했다.
조종사의 솜씨가 상당했다.
이내 비행선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키에라 나서스가 뛰어내렸다.
그녀는 비행선을 타고 오면서 호텔 앞에 서 있는 반태수를 미리 확인했는지 곧장 반태수를 향해 달려왔다.
반태수는 다가오는 키에라 나서스로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키에라 나서스와의 관계는 사실 그리 깊지 않았다.
다만 몸을 섞었기 때문에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정도가 다였다.
솔직히 인간적인 친밀감을 성장시키기에는 둘이 함께 한 과정이 좀 삭막하지 않았나.
반태수는 오직 키에라 나서스의 후계자 경합을 위해서만 일을 했다.
키에라 나서스도 정확히 그렇게만 반태수를 대했고.
한데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키에라 나서스의 주도로 마력을 섞었다.
딱 그 정도였다.
한데 지금 달려오는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과 태도를 보면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 거의 장기 출장 갔던 남편을 마주하는 듯하다.
어느새 키에라 나서스가 반태수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반태수에게 안겼다.
반태수도 굳이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어쨌든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도 키에라 나서스와의 관계를 잘 다지기 위해서였으니까.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어…… 좀 바빴어요. 아시지 않나?”
키에라 나서스가 반태수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얼른 입을 맞춰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찌나 절절한지 반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키에라 나서스의 얼굴에 진한 만족감이 맴돌았다.
“바쁘셨던 거 잘 알죠. 그리고 왜 저한테는 말 편하게 안 하세요?”
“어…… 그런 것도 알아요?”
“부탁 좀 했어요. 글락 그룹이랑 우리 가문이랑 엮인 게 좀 있거든요.”
그건 반태수도 안다.
나서스 가문의 주력 사업은 식량이다. 하지만 오직 그것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었다.
식량에서 파생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고, 전혀 관계없는 분야의 사업도 여러 개 돌리고 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건 드론 사업이고.
나서스 가는 글락 그룹과 특수한 드론 부품에 관해서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그걸 계기로 글락 그룹과 나서스 가가 절반씩 지분을 가진 연구 전문 회사를 세워 운영 중이었다.
반태수가 혹시나 하고 살펴봤는데, 신기할 정도로 셰딤과 얽히지 않았다.
왠지 셰딤이 일부러 그쪽은 피해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그러니 글락 그룹 내에 나서스 가의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본사에도 나서스 가문의 사람이 일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반태수와 아네스에 대해 많은 소문과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반태수가 아네스를 정말로 편하게 대하며, 누가 봐도 연인인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키에라 나서스는 자신도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고 강하게 염원했다.
“그래서 안 해주실 거예요?”
반태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렴지 않지.”
솔직히 어려울 줄 알았다. 부담스러울 것 같았고.
한데 막상 저 부탁을 듣고 나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꼭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랑 함께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데?’
반태수는 키에라 나서스와 살짝 떨어진 채 그녀를 가만히 살펴봤다.
보면 볼수록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오스윈 프리든은 반태수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점점 더 깊어졌다.
페일라 린치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태수도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는 자신 역시 두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이 점점 깊어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데 바로 그 느낌이 키에라 나서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대체 원인이 뭐지?’
이건 너무 부자연스럽다.
만일 키에라 나서스가 처음 반태수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뭔가 이면세계의 특수성 같은 걸로.
하지만 키에라 나서스는 그게 아니라 중간에 변했다. 무언가를 계기로 말이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 잠깐 고민했다. 답을 도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후계자 승인이었다.
키에라 나서스는 후계자 경합에서 우승한 후, 상당한 일정을 소모해 5대 가문의 본가가 있는 곳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후계자 승인 의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법 오랫동안 키에라 나서스와 연락을 하지 않아서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달라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후계자 승인이 그 계기가 되었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생각이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로 이어졌다.
그 두 사람은 애초에 반태수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후계자 승인 절차가 모두 끝난 사람이었다.
반태수는 후계자 승인 절차에 무언가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이 후계자들을 반태수와 친밀하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상한데? 난 지구인이잖아. 그런데 나랑 5대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런 식으로 이어지지?’
이건 분명히 더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또한 최근 계속 느꼈던, 자신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마법 지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존재, 어쩌면 자신의 속에 있을지도 모를 그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건 5대 가문의 본가에 방문하지 않는 한, 알아낼 방법이 없다.
자연스럽게 반태수의 향후 계획이 잡혔다.
‘아마 쉽지는 않겠지.’
데드릭 벨크리스, 살라자 샤마쉬와 제법 친해졌지만, 그게 5대 가문의 본가에 방문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않는다.
아마 두 사람도 반태수가 그런 부탁을 하면 곤란할 것이다.
게다가 그냥 본가에 방문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거기서 후계자 승인 절차에 쓰이는 모든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 과정 중에 있는 특정한 어느 하나가 문제인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키에라 나서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여전히 반태수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갑자기 생각난 게 좀 있어서.”
“뭔데요?”
“후계자 승인.”
키에라 나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계자 승인이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혹시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철저한 비밀이라서 안 되나?”
키에라 나서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휙 내저었다.
“에이, 비밀은요, 무슨. 정말 별 거 없었어요. 그냥 옷 갈아입고 새하얀 공간으로 가서 제단에 놓인 유리관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끝났어요.”
“그게 다야? 유리관엔 뭐가 들어 있었는데?”
“크기가 딱 사람 한 명 들어갈 정도였어요. 초록색 액체 같은 걸로 꽉 채워져 있었는데, 안에 뭔가 있긴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초록 색 액체 때문에 잘 안보였어요.”
초록색 액체가 투명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예 불투명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 인사하고 끝났다고?”
“네. 근데 정말 신기하긴 했어요.”
“신기했다고?”
“진행 자체가 굉장히 느렸거든요. 걸음걸이에도 신경 써야 하고 심지어 옷을 입을 때도 신경 쓸 것이 많고, 아무튼 계속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키에라 나서스는 반태수가 자신의 말에 집중해 주는 것을 보며 살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과정 자체는 짧은 편이거든요? 옷 갈아입고 하얀 공간에 걸어가서 초록색 유리관에 인사하고 끝났으니까요. 그런데 의식이 다 끝나고 걸린 시간을 보니까 무려 두 시간인 거예요.”
“두 시간? 고작 옷 갈아입고 걷고 인사하는데?”
“네. 옷을 입는 방식이 좀 복잡하고 느리게 움직여야 해서 시간이 좀 필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시간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어요.”
반태수는 이 부분은 오스윈 프리든, 페일라 린치필드와도 한 번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거기에 뭔가 있었다.
키에라 나서스가 반태수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란히 서서 팔짱을 꼈다.
“그런데 우리 계속 여기 서 있을 건가요? 바로 앞에 호텔이 있는데.”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야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으니까.
키에라 나서스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미리 예약해뒀어요.”
그렇게 급하게 전화를 끊고 오더니, 그 사이 예약까지 해뒀을 줄이야. 하여튼 대단한 여자다.
반태수는 호텔로 들어가 그녀가 잡아놓은 객실로 갔다.
과연 여기서는 며칠이나 있게 될까?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객실로 들어갔다.
***
“하, 이놈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력 한 번 얻어 보겠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걸 손에 쥔 반태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데드릭 벨크리스는 개척도시 아리크에 있었다.
아직 한창 공사를 진행 중인 개척도시인지라 볼 것도 할 것도 없었다.
도시 밖 숲 속 호숫가에 가면 볼거리가 있고, 생각보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 퀴무르에 가면 유흥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는 한 시도 여길 떠날 수 없었다.
언제 반태수가 여기에 올지 모르지 않나.
만일 유흥을 즐기고 있을 때 반태수가 와서 케트라 브리저와 홀랑 자고 사라져 버린다면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전부 날아가 버린다.
“야, 우리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오늘이 11일 째입니다.”
“하아. 더럽게 오래됐네.”
그러니 이렇게 좀이 쑤시고 온몸이 뒤틀리는 거 아니겠나.
“저…… 어르신.”
엄대협이 조심스럽게 데드릭 벨크리스를 불렀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것 같다.
“왜?”
“언제쯤 크랙톤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신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하, 그래. 넌 정력이고 뭐고 이미 받았다 이거냐?”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똑바로 들어라. 지금 당장은 네 아픔이 아닌 것 같지만, 언제 그게 네 아픔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거다. 정력 있으면 뭐해? 거기가 박살 나면 못 쓸 거 아니냐.”
엄대협은 순간 소변이 마려웠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빛이 정말로 살벌했다.
‘건드리면 안 되겠다.’
엄대협은 앞으로 먼저 말을 걸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케트라 브리저가 다가왔다.
“숙소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냥 퀴무르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반 마법사님이 오시면 제가 바로 연락드릴게요.”
“됐다. 어차피 비행선에서 지내니까 별로 불편할 것도 없다. 넌 가서 너 할일을 해.”
케트라 브리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상대는 데드릭 벨크리스. 5대 가문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어르신이다.
그 앞에서 함부로 한숨도 쉴 수 없었다.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내 할일을 하라는 거야.’
반태수가 오면 당연히 케트라 브리저를 만날 테니, 데드릭 벨크리스는 엄대협과 함께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물렀다.
심지어 비행선도 그녀의 막사 근처에 두었다.
혹시라도 자는 동안 반태수가 올까봐.
“그 아네스라는 분에게 연락을 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살짝 짜증을 냈다.
“연락을 안 받아.”
사흘쯤 기다렸을 때 연락을 했고, 그녀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마침 반태수가 옆에 있었고, 연락을 받지 말라고 했다.
아네스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왠지 그 연락을 받으면 바로 반태수와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아네스는 반태수의 여자다. 연락 한 번 안 받았다고 가서 지랄할 수는 없었다.
“그럼 아직 거기 있는 모양이네요. 생각보다 오래 있는데요? 혹시 나중에라도 다시 연락해 보셨어요?”
케트라 브리저의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한 번 안 받았으면 그걸로 끝이지 뭘 구차하게 또 연락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케트라 브리저가 계속 바라보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쓰며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바로 받네?”
그 뒤로 이어진 아네스의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벌써 떠났다고? 떠난 지 며칠이나 지났단 말이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했다.
며칠이나 지났으면 벌써 여기 오고도 남았다. 그런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아!”
갑자기 데드릭 벨크리스가 탄성과 함께 주먹으로 손바닥을 퍽 때렸다.
엄대협과 케트라 브리저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키에라 나서스! 내가 그 녀석을 잊고 있었네.”
그때 분위기 잘 살려 보라고 살라자 샤마쉬와 함께 자리까지 피해주지 않았던가.
데드릭 벨크리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시발, 그럼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리고 옆에 있던 케트라 브리저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여자가…… 좀 많으시네요.”
엄대협은 그렇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역시 높은 분들은 피하는 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