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 인사를 다니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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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어요.”
아네스는 옷을 벗은 채 소파 뒤쪽 전면 유리를 통해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오늘 같이 출근하면서 내심 이러려고 작정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문까지 잠근 것 아니겠나.
하지만 그건 굉장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오늘 마침 반태수가 찾아왔고, 함께 출근하면서 그런 생각이 났을 뿐이다.
그동안은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나.
확실히 회장실이 좋긴 좋다.
굉장히 편안하게 일을 치렀으니까.
아네스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반태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살짝 당겼다.
아네스가 살짝 당황하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그녀를 넓은 소파에 눕힌 다음, 뒤집었다.
소파가 어찌나 넓은지 웬만한 침대보다 편했다.
아네스는 편안하게 눈을 감고 엎드린 채 반태수가 무엇을 할지 기대했다.
“자, 이제부터 재미난 걸 할 거야.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말도 하지 마. 그리고 네 모든 걸 나에게 맡긴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
아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마음가짐이 그러하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럴게요. 그런데 뭐 하시려는 거예요?”
“몸에 좋은 걸 해주려고. 마력회로라는 건데, 일단 받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원래 마력회로부터 만들어주고 나머지 일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순서가 바뀌어 버렸다.
생각보다 정욕에 불타는 아네스를 상대하면서 마력회로를 설치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력을 섞는 동안은 토대만 살짝 닦아뒀다.
원래는 그조차 안 되는 것이 정상인데, 마력을 섞고 있어서 그런지 코어의 마력을 써서 마력회로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드는 건 할 수 있었다.
아마 여기서 조금만 더 집중하고 실력이 올라가면 마력을 섞으면서 마력회로를 설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마력회로를 설치하는 실력 자체는 계속 상승 중이었다.
매일 연구하기도 하고, 실제로 자신의 몸에 무수한 테스트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아무튼 토대를 만드는 건 전체 마력회로의 규모를 결정해 마력회로를 새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굉장히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아네스의 마력을 이용해 마력회로를 설치하는 것뿐이었다.
엄대협에게 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토대를 만들기도 했고, 그때보다 실력도 늘었으며, 자신을 던지는 일도 아네스가 훨씬 잘했다.
일말의 거부감도 없으니 반태수는 마치 자신의 마력을 쓰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편안하게 마력회로를 새겼다.
사실 아네스의 몸에 손을 댈 필요도 없었지만, 반태수는 굳이 엎드린 아네스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마력을 움직여 마력회로를 새겼다.
등에서 손바닥이 움직이는 묘한 감각과 내부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감각이 뒤섞이면서 아네스에게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아네스의 숨결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반태수는 그녀의 상태가 변하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력회로를 새기는 데에 집중하고 있기에 다른 신체적인 변화까지 신경을 쓰지 못 했다.
반태수가 아네스를 위해 선택한 마력회로의 구조는 하리뮬러 가문의 것을 응용했다.
원래 하리뮬러 가문의 마력회로는 일곱 개의 동심원 구조로 되어 있다.
한데 반태수는 그것을 아홉 개로 늘렸다.
하리뮬러 가문의 마력회로는 태어날 때 새기고 기공술 수련을 통해 차근차근 활성화 시킨다.
하지만 아네스에게 새긴 마력회로는 애초에 모든 회로가 열려 있었다.
굳이 동심원을 아홉 개로 늘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홉 개의 동심원 중 두 개는 아무 수련 없이 일곱 개의 동심원을 활성화 시켰을 때 나올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새긴 마력회로였다.
당연히 이 마력회로는 반태수가 활성화를 시켜줘야 한다.
엄대협에게 새긴 마력회로나 백진희에게 새긴 마력회로는 스스로 마력회로를 활성화 시킬 수 있지만, 이건 그것들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향후 키에라 나서스와 케트라 브리저에게도 마력회로를 새겨줄 텐데, 지금 아네스에게 새겨준 것을 기본으로 해서 그들에게 맞게 약간씩 변형해서 설계했다.
아무튼 제법 긴 시간 동안 마력회로를 새겼고, 당연히 성공적으로 육체에 안착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활성화 시켜주었고.
반태수가 아네스의 등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아네스는 반태수가 움직이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했기에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이제 끝났어. 뭔가 달라진 거 느껴져?”
아네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달라진 게 느껴지냐고? 지금 그런 걸 차분히 생각하고 알아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반태수를 덮쳤다.
반태수는 당황스러웠지만, 달려드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었다.
이번엔 제법 오랫동안 마력을 섞어야 했다.
***
아네스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민망함과 만족감이 뒤엉켜 있었다.
“이제 좀 후련해?”
반태수가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아네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얼른 말을 돌렸다.
“달라진 거 느껴져요. 이게 마력회로라는 건가요?”
“제법 특별한 마력회로지. 내가 정말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서 만든 거거든.’
반태수는 마력회로의 성능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아네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놀라움이 점점 짙어지더니 나중에는 경악한 채로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마치 수십 개의 유물을 압축해서 몸에 심어놓은 것 같네요.”
“그거랑은 좀 다르지. 이건 성장의 여지가 있으니까. 기공술이라는 건데, 수련이 가능해. 점점 더 마력회로에 익숙해지고, 마력회로로 발현할 수 있는 능력도 더 강해지는 거지.”
“정말 대단하네요.”
아네스의 마력회로가 가진 능력은 엄대협에게 해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했다.
서로 상호작용을 해서 시너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아네스에게 준 능력은 머리 쓰는 쪽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몸을 보호하는 쪽 능력이 많았고.
반태수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이고, 그 다음이 그룹 경영 능력이었다.
아네스의 마력회로에는 패트릭의 마력회로에 담긴 통찰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마력회로가 이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쓰면 쓸수록 통찰력은 굉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두뇌 쪽에 할당한 능력들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시너지를 일으킬 테니까.
아네스는 자신이 가지게 된 능력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확실히 나서서 싸우고 이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전투와 관계된 능력도 다양하게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에 관한 것들은 제대로 수련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안전에 관계된 능력은 꾸준히 수련해. 나중에 확인할 테니까.”
“알았어요.”
아네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밥도 못 먹었네요. 늦었지만 점심 먹고 올까요?”
평소에는 나가서 먹지 않고 비서들에게 시켜서 간단히 패스트푸드로 때우지만, 반태수와 함께인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여기서 먹자.”
반태수의 말에 아네스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꼭 밖에 나가서 먹으려던 건 아니었다. 반태수를 챙기고자 하는 마음이었지.
“그럼 비서실에 연락 좀 할게요.”
반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 미리 만들어왔어. 그러니 일단 그걸로 대충 때우고, 저녁을 괜찮은 걸로 먹자.”
아네스가 놀란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정말요?”
반태수는 생각해보니 자신이 아네스에게 커피를 대접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네스와는 틈 날 때마다 마력을 섞느라 바빴으니 제대로 대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 복잡한 마력회로까지 얻었으니 훨씬 맛있게 마시지 않겠나.
반태수는 아공간에서 토스트를 꺼냈다.
사실 밤에 마력을 열심히 섞고 난 다음 혹시 출출하면 먹으려고 미리 준비해두었다.
그러니 지금 먹으면 타이밍이 딱 괜찮다.
“토스트네요?”
아네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음식을 만들어왔는지 궁금했는데, 토스트를 보고 나니 부담이 살짝 줄어들었다.
굉장한 요리를 만들어왔으면 정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물론 마음은 굉장히 기뻤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기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기쁨의 크기는 똑같다. 반태수가 직접 만든 요리 아닌가.
“잘 먹을게요.”
아네스는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토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그녀가 마치 마비라도 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움직이는 건 오직 입뿐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토스트를 씹었다. 눈이 점점 커지더니 정신없이 토스트를 먹어치웠다.
반태수는 자신이 들고 있던 토스트도 아네스에게 넘겼다.
그녀는 그것을 거의 낚아채다시피 가져가서 먹어치웠다.
반태수가 아공간에서 몇 개의 토스트를 더 꺼냈다.
아네스가 제정신을 차린 건 8개의 토스트를 먹어치운 다음이었다.
정신을 차린 아네스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굉장히 민망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저 너무 추했죠?”
“그럴 리가. 잘 먹어서 보기 좋던데. 맛이 제법 괜찮았지?”
토스트 얘기를 꺼내자 아네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맛있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모든 음식을 통틀어 제일 맛있었어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네스가 흥분해서 말을 마구 쏟아냈다.
“대체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재료는 어떤 걸 쓰셨죠? 역시 아주 특별한 재료나 향신료가 들어가는 건가요? 재료만으로는 저런 맛을 낼 수 없을 것 같은데,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거죠?”
반태수는 흥분한 아네스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렇게 30초쯤 있으니 아네스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다.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아직 남았어.”
아네스가 깜짝 놀랐다.
“먹을 게 또 있어요?”
“밥을 먹었으니 커피도 한 잔 해야지."
그 말에 아네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커피요? 커피 안 드시잖아요. 항상 드몬트 차만 드시지 않으셨어요?”
“그러게. 그래서 좀 반성 중이야. 내가 여기서 워낙 정신이 없어서 커피 대접을 못 했네.”
아네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내가 원래 커피 장사 좀 했다고 말 했었나?”
아네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법 유명한 카페 사장이었어. 카페를 유명하게 만든 커피가 바로 이거고.”
반테수는 머그컵에 가득 담긴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툭툭 내려놓았다.
컵을 든 아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와아!”
그녀는 나직이 감탄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후룩 마셨다.
아까 토스트를 한 입 물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아네스는 그대로 굳은 채 커피의 맛과 향에 푹 빠져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황홀함이 피어올랐다.
반태수는 그녀의 표정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저건 마력을 섞을 때, 절정에 이르러서야 보여주던 표정이다.
역시 마력회로가 복잡하니 반응도 확실하다.
아네스는 그 뒤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커피를 전부 마셨다. 끝까지 음미하면서.
반태수는 쿠키는 나중으로 미뤘다.
여기서 쿠키까지 제공했다가는 자극이 너무 강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반태수는 원래의 계획과 달리 에라리스에서 무려 열흘이나 머물러야 했다.
이틀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쌓인 아네스의 욕구불만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면서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걸 풀 방법이 없으니 계속 쌓이기만 한 것이다.
그것이 한 번 터져 나오니 반태수도 차마 매정하게 떠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러려고 온 거니 열흘 정도 투자하는 거야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타노로스와의 싸움이 뒤로 미뤄지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마음에 걸렸다.
아마 지금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반태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네스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나.
원래는 열흘로도 모자랐다.
하지만 반태수가 잔뜩 건넨 커피와 쿠키 덕분에 간신히 열흘로 끝낼 수 있었다.
커피와 쿠키를 통해 나름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커피와 쿠키가 다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서 다시 채워주기로 하니 아네스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지금 반태수는 아네스와 충분히 오랫동안 작별 인사를 하고, 포탈을 통해 두 번째 목적지로 가는 중이었다.
열흘 동안 아네스와 지내면서 그녀에게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글락 그룹을 샅샅이 조사하다가 타노로스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글락 그룹이 타노로스와도 뭔가 거래를 했던 모양이다.
그 흔적을 토대로 타노로스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찾은 것이다.
한데 그 정보가 제법 대단했다.
타노로스가 다스리는 도시에 대한 정보였다.
물론 존재만 확인할 수 있었고, 도시에 대한 위치를 비롯한 다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찾으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오카리타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예전 오카리타에 왔을 때, 머물던 호텔에 도착했다.
반태수는 일단 키에라 나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는 며칠이나 있게 될까?’
원래 계획은 하루였지만 아무래도 훨씬 길어질 공산이 컸다.
‘영감, 몸 좀 달았겠네.’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신호음이 몇 번 가고 이내 키에라 나서스가 전화를 받았다.
“나 오카리타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비명에 가까운 답이 들려왔다.
- 정말요?
생각 이상의 격한 반응에 반태수는 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 예전 내가 머물던……."
- 바로 갈게요!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반태수는 한동안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거기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