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인사를 다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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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릭 벨크리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반태수의 저택, 어제 중간상인을 심문한다는 기쁨에 아주 잠깐 잊었던 정력 문제를 얘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는 엄대협으로부터 반태수가 떠날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고.
반태수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엄대협이 아침 일찍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오지 않았으면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엄대협은 커피를 얻어 마시면서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급히 문자를 보냈다.
지금 오지 않으면 한동안 반태수를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고.
그 문자를 받자마자 부랴부랴 비행선을 타고 날아온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엄대협을 볼 수 있었다.
그걸 본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설마…… 아니지?”
“그 설마가 맞습니 다. 3분 전에 떠났습니다.”
“고작 3분? 넌 3분도 시간을 못 끌어서 그냥 보냈고?”
“딱 3분 끌었습니다. 더 끌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나 급해 보이던지……."
3분이나 시간을 끌어줬다는데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반태수 상대로 그 정도 해줬으면 잘 한 셈이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작 3분 때문에! 아오! 옷을 입지 말고 올걸 그랬어! 옷 입는 시간만 아꼈어도!”
엄대협은 그 말에 끔찍한 표정으로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옷 입는데 무슨 3분이나 쓴단 말인가. 그거 아껴봐야 어차피 반태수를 만나지도 못했다.
한동안 꿍얼거리던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엄대협을 바라봤다.
“그래서, 어디로 간다더냐?”
“여러 군데 들를 모양이던데요? 일단 시작은 에라리스인 것 같았습니다.”
“인 것 같다고? 확실히 못 해?”
“명확히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 게 아니고, 대화를 통해 유추한 거라서 불확실성이 있긴 하지만, 아마 거의 맞을 겁니다.”
“에라리스라…… 아네스 보러 간 거로군.”
데드릭 벨크리스가 오랜만에 머리를 팽팽 굴렸다.
“하, 이놈 봐라? 야, 혹시 퀴무르에 간다는 얘기는 없었나? 개척도시 아리크나.”
“어…… 그쪽도 아마 들를 것 같던데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역시.”
데드릭 벨크리스가 다 알아냈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여자들 챙기러 간 거네. 하긴, 주기적으로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이 시드는 법이긴 하지. 그래서 귀찮고.”
엄대협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런 엄대협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 너도 아직 멀었구나. 테스트는 해봤고?”
테스트라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엄대협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했습니다.”
“성공?”
“대성공.”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말이 짧네? 어디서 건방지게.”
“했습니다. 짧은 게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에 뜸을 좀 들인 겁니다. 극적 연출을 위한 작은 장치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흥, 입은 살아서. 아무튼 난 정력을 내려줄 마법사 잡으러 갈 테니까, 너도 따라와.”
“예? 저도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팍 썼다.
“서포트 해준다며. 뭐야, 역시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냥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나? 아, 생각해보니 그날도 날 개무시 했었지?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모른척하고 눈 피하고. 아주 가관이었던 기억이 나네.”
“비행선 타면 됩니까? 바로 출발하시죠. 어르신 비행선이 더 빠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분명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따라잡긴. 너 아직도 반이 어떤 놈인지 모르냐? 그놈 비행선은 가져가지도 않았어.”
“예? 그럼 거기까지 어떻게 간답니까? 비행기는 여기서 에라리스까지 직항이 없을 텐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비행기를 타겠어? 아무튼 그놈은 그놈만의 방법이 따로 여러 개 있는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뒤쫓아 가는 건 답이 없어. 우린 미리 앞질러야 한다고.”
“어…… 그게 가능합니까?”
“당연하지. 일정을 알잖아. 누굴 만나러 가는지도 다 알고. 가서 기다리면 오겠지.”
“그래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리크.”
“개척도시 말입니까? 거기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케트라 브리저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잘 아네.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거니까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돼.”
“예?”
엄대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사람이 반태수의 여자라고요?”
케트라 브리저의 의뢰를 반태수에게 물어다 준 사람이 바로 엄대협이었다.
그러니 당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쉽게 남녀관계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봤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케트라 브리저의 말도 안 되는 외모가 떠오른 엄대협은 갑자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인생.”
찰칵.
갑자기 들리는 셔터 소리에 엄대협이 화들짝 놀라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는 손에 든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낄낄 웃고 있었다.
“저…… 어르신?”
“사진 잘 나왔네. 네 한탄과 부러움이 잘 살아있어. 한 번 볼래?”
데드릭 벨크리스가 보여준 사진을 본 엄대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의 그 절절한 심정을 레이디 로잘린이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할까.”
엄대협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 이번엔 제가 진짜 잘하겠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으며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그래야 할 거야. 아, 속이 다 시원하네.”
데드릭 벨크리스는 몸을 휙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뭐 하냐. 얼른 가자!”
엄대협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반태수의 저택 정원에서 데드릭 벨크리스의 비행선이 떠올랐다.
***
반태수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에라리스였다.
에라리스에서 다음 장소로 갈 때 포탈을 이용할 수 있으니 단숨에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니 첫 번째 장소는 에라리스로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일단 계획은 여기서 하루나 이틀쯤 보내고 오카리타로 가는 것이다.
거기서 키에라 나서스를 만나 하루 정도 함께 보내고, 마지막으로 개척도시 아리크로 가면 된다.
이참에 각각의 도시에 혹시 귀환 포탈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좋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첫 번째 도시인 에라리스에 도착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출근하겠네.”
아침 일찍 왔기에 아직 출근시간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한다.
반태수의 목표는 출근하기 전에 아네스를 만나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다음 같이 출근을 하든 아니면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든 할 계획이다.
반태수는 왜곡을 쓴 채 하늘을 훌쩍 날아 빠르게 아네스의 거처로 향했다.
아네스는 반태수와 함께 했던 글락 호텔의 스위트룸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마음에 들었는지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글락 호텔 최상층의 객실은 반태수도 인정할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특히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감각으로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는 건 좀처럼 질리지 않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밖에 다른 시설이나 서비스도 상당했고.
게다가 길만 건너면 글락 그룹 본사 빌딩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물론 아네스가 그런 효율로 거처를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반태수는 금세 호텔에 도착했다.
사실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방은 이제 아네스의 것이다. 그러니 실낱같은 예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일단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 아네스가 있는 건 확실했다. 영역화로 미리 확인했으니까.
아침부터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었기에 아네스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누구시죠?”
역시 이렇게 문을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받는 건 취향이 아니다.
반태수는 그냥 문을 열어버렸다. 어차피 아네스가 문 바로 뒤에 왔으니까.
문이 활짝 열리자 아네스가 화들짝 놀랐고, 문을 연 사람이 반태수라는 걸 확인하고는 놀람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환희로 그 모든 감정을 뒤덮었고.
아네스가 냉큼 달려와 반태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제 왔어요.”
“좀 바쁜 일이 있었어.”
반태수는 아네스를 살며시 안아주고는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내 아네스가 진정했는지 고개를 들어 반태수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출근 하려던 거 아니었나?”
“지금 그딴 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이 왔는데.”
“아니, 그게 회장님 앞에서 할 소리야?”
반태수가 웃으며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러자 아네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회장님, 저한테 잘 보이셔야죠. 왜요, 이제부터 직접 경영하시게요? 저 내쫓고요?”
“그럴 리가. 왜 농담에 죽자고 달려들고 그래? 알았으니까 아네스 하고 싶은 대로 해. 출근하기 싫으면 그냥 있고, 나랑 같이 출근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아네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같이 출근해도 돼요? 정말요?”
“나도 명색이 회장이야. 출근 하루 이틀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네스가 얼른 반태수에게서 떨어졌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안으로 후다닥 달려가 외투와 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반태수의 팔을 감싸 안듯 팔짱을 꼈다.
“자, 그럼 우리 같이 출근해요. 출발!”
반태수는 웃으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
글락 그룹은 반태수를 새 주인으로 맞이한 이후, 제법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네스가 사소한 거 하나까지 모두 조사해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는 부분을 철저하게 검증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에서 상당부분이 폐기되었고, 또 폐기 예정이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삐걱거렸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지금에 와서는 그 변화가 글락 그룹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었다고 다들 인정할 정도였다.
그만큼 썩은 부분도 많았고, 셰딤과 연계되면서 말도 안 되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기도 했다.
아무튼 그 변화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당연히 글락 그룹 본사였다.
반태수는 아네스와 함께 출근을 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일단 예전에 비해 로비에서 이뤄지는 그 철저한 보안이 한껏 허술해졌다.
예전에는 보안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글락 그룹 회장이 셰딤의 총수 역할까지 했으니까.
그룹 본사 빌딩 내부에 셰딤과 관계된 것들이 무수히 있었으니 그걸 감추려면 보안이 얼마나 대단해야 하겠는가.
심지어 그때는 그렇게 보안이 강력했음에도 정작 글락 그룹 자체에 대한 보안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대부분의 보안이 셰딤 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니까.
아네스는 그것을 정상으로 돌렸다.
그래서 훨씬 가벼운 보안 체계로 예전보다 오히려 더 괜찮은 수준의 보안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일단 매일 출근할 때마다 겪는 그 말도 안 되는 보안절차를 대폭 약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안 검색대는 없었고, 보안 요원 몇 명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네스는 반태수와 나란히 걸으며 설명해주었다.
“저 위에 있는 감지기들이 사원증의 정보를 읽고 얼굴을 확인해요. 직원들은 그냥 로비를 지나가기만 하면 되고요.”
다른 지사들도 전부 이런 식으로 바꿨다고 아네스가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로비를 지나갔는데,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실 아네스와 함께 가니 시선이 어느 정도 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한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럴 줄 몰랐다고요? 우리 직원들이 회장님 얼굴도 못 알아볼 거 같아요?”
비록 이면세계로 오면서 외모를 건드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외모가 상당한 수준이기에 직원들 사이에서 회장님의 각종 사진이 몇 번이나 돌았다고 한다.
“난 사진 찍힌 기억이 없는데?”
“저랑 찍은 사진 많잖아요.”
반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사진을 찍긴 했다. 아네스가 원해서.
한데 그 사진들의 대부분이 밤에 침대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설마 그런 사진을 유출했단 말인가?
반태수가 놀란 눈으로 아네스를 보자, 그녀가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가, 뭐가 떠올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 하는 생각 얼른 치워요. 그런 거 아니니까.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했을 거 같아요? 우리 사진 그거 말고도 많아요!”
아, 생각해보니 같이 데이트 하면서 몇 장 찍긴 했다. 밥 먹으면서 한 장, 차 마시면서 한 장, 산책하다 뜬금없이 한 장, 이런 식으로. 아네스는 반태수를 데리고 얼른 회장실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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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평범한 일이 이어졌다.
아네스는 회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업무 보고부터 했다.
그동안 꾸준히 반태수에게 문자나 이메일을 통해서 보고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보고도 필요한 법이다.
보고가 끝난 아네스가 반태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회장실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비서들에게 얘기해뒀다. 반태수와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하니, 따로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그리고 문도 잘 잠갔다.
상황과 장소가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태수는 그거 말고도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반태수는 코어에서 마력의 실을 뽑았다.
아네스에게 심을 마력회로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설계를 다 끝내뒀다.
이제 새기기만 하면 된다.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눈빛이 오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