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타노로스의 중간상인 3 >
===============================
반태수는 미리 봐두었던 건물로 들어갔다.
근처에 사람이 아예 없는 지역에 있는 건물이었다.
변두리 중에서도 이런 곳은 찾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크랙톤도 인구가 2천만이 넘는다.
그러니 아무리 위험한 변두리라고 해도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가끔 혼자 숨어 지내는 자들도 있기에 아무리 한적한 곳이라도 대부분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근처에 아무도 없는 곳은 드물다.
우연에 의해 생겼거나, 아니면 무언가 위험한 요소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강제로 사람을 쫓아냈거나, 셋 중 하나이리라.
아까 타노로스의 중간상인이 거래하던 곳은 두 번째와 세 번째가 혼합된 경우였다.
강제로 사람들을 쫓아낸 다음, 위험 요소를 심어서 혹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사람들이나 우연히 들어올 사람들을 막은 것이다.
당연히 타노로스 측에서 그렇게 관리했고.
지금 반태수가 찾아낸 이곳은 우연에 의해 생긴 곳이다. 그러니 이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 한다.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 안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아무튼 반태수는 텅 빈 건물로 들어가 그나마 가장 깔끔한 층으로 올라갔다.
4층 건물이었는데, 3층이 괜찮았다. 분리되어 있지 않고 층이 통으로 터 있어서 뭘 하든 편리했고.
거기에 두 중간상인을 대충 던져놓은 다음,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제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 한다.
‘일단…… 나노머신부터 처리해야겠네.’
반태수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노머신들이 계속 따라왔다.
아까 중간상인과 싸우던 곳에 깔려 있던 것들이었다.
솔직히 아까 싸울 때, 중간상인이 나노머신을 이용할 줄 알았다. 한데 끝까지 안 써서 좀 의외이긴 했다.
한데 보아하니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감춰둔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 나노머신들을 이용해 이쪽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반태수는 자신을 중심으로 적당한 범위의 통신을 완벽하게 차단해 두었다.
그러면서 저 나노머신들이 보내는 신호들을 포착하기 위한 마법을 여러 개 깔아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까지 오면서 나노머신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신호를 보냈다.
어디로 보내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방향이 전부 제각각이었으니까.
개중에는 하늘로 보내는 신호도 있었다.
하늘 하니까 갑자기 위성이 떠올랐다.
‘하긴, 위성으로 신호를 보내는 게 제일 확실하긴 하겠지.’
하지만 신호를 그쪽으로 보낸다고 해서 반드시 위성이 있으라는 법은 없다.
저 나노머신들은 정해진 프로토콜에 의해 신호를 보내게 되어있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위성이 있는지 확인해봤다.
일단 시야가 확보되어야 하니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올려봤다.
여러 번 했더니 이젠 위성을 확인하는 것도 굉장히 빨랐다.
위성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중간상인인데 작업하는 곳에 위성 한 대 정도는 갖다 둬야 하는 거 아냐?’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3층으로 돌아갔다.
물론 움직이는 내내 중간상인들과 나노머신을 전부 끌고 다녔다.
이제 저 나노머신들을 회수할 시간이다.
반태수의 마력이 나노머신들을 크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안으로 확 범위를 좁혔다.
마력의 그물이 나노머신들만 정확히 포획해서 한데 모았다.
아직 나노머신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지만, 이걸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연구결과를 얻어냈다.
그 중 하나가 나노머신만 선별해 포획하는 마력의 그물이었다.
반태수는 그렇게 모은 나노머신을 전용 용기에 담아 아공간에 넣었다.
그 다음, 두 중간상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제 이놈들의 몸속에 있는 나노머신을 뽑아낼 차례다.
방금 썼던 마력의 그물을 또 쓰면 좋겠지만, 체내에 들어간 나노머신을 뽑아내는 데에는 쓸 수 없었다.
나노머신을 못 뽑아내는 건 아닌데, 완벽하게 모든 나노머신을 뽑아낼 수 없었다.
이미 안에 들어가 세포와 결합한 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대협의 몸에 들어간 나노머신을 뽑아낼 때에 정말 고생했다.
자칫하다간 나노머신 하나 뽑아내자고 체내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엄대협의 나노머신을 뽑아낸 경험이 있어서 이 두 놈의 나노머신을 뽑아내는 건 좀 더 수월할 것이다.
엄대협 때와는 달리 상처 좀 입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기도 하고.
반태수는 코어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중간상인의 몸에 꽂았다.
마력의 실이 그들의 몸을 헤집으면서 무수한 정보를 반태수에게 전달해 주었다.
반태수는 그들의 몸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차근차근 분석해 나갔다.
***
엄대협은 놀란 눈으로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5대 가문에서도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솔직히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계속 피해 다니기만 했고, 오늘 싸우는 걸 봤지만, 그건 자신이 없었다면 결판이 어떻게 날지 알 수 없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데드릭 벨크리스의 위용을 확인했다.
무려 세 대의 비행선이 날아와 운전석이 날아간 트레일러를 견인하고 있었으니까.
비행선을, 그것도 저렇게 비싸 보이는 비행선을 동시에 세 대나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심지어 그 비행선들로 하는 일이 고작 저 트레일러를 견인하는 거라니.
이건 데드릭 벨크리스니까 가능한 일 아닐까?
웬만해서는 비행선이 저따위 일을 하려고 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어? 저거 하나 가져간다고 일이 끝나?”
“예? 그럼 남은 일이 또 있습니까?”
“당연하지.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았잖아.”
엄대협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할 일이 남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치울 것도 없고 딱히 할 만한 일도 찾지 못했다.
“설마 저 트레일러에 타고 가라는 건 아니시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낄낄 웃었다.
“왜? 타보고 싶어?”
엄대협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 있겠나. 타더라도 비행선을 타지 왜 트레일러를 탄단 말인가.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그럼 제가 할 일이 대체 뭡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더없이 날카로웠다.
엄대협은 그 눈빛에 움찔 놀랐다.
“설명해.”
“예?”
“성능은 어땠어? 효과가 좀 있어?”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엄대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 아직 실전 테스트는 못 해봤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안 하고 뭐 했어? 고자냐?”
“고자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조루도 아닙니다.”
“실전에서 안 써먹었다면서 어떻게 알아?”
“그냥 압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냥 안다고? 나도 그거 받으면 그냥 알게 되나?”
“어…… 아마도요?”
“그러니까…… 너만 정력을 받았다는 거네.”
“어…… 그, 그렇겠죠?”
“내 기분이 별로 좋지가 않다. 이거 어떻게 할 거냐?”
“어 …… 신나는 노래라도 불러드릴까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노래? 너 노래 잘해?”
“크흠. 어디 가서 노래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불러 봐.”
엄대협은 왠지 분위기가 이게 아닌 것 같아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불러야 할 거다. 내 귀를 만족시키려면.”
엄대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혹시, 진짜로 혹시 만족 못 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데드릭 밸크리스가 사납게 웃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지.”
엄대협은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노래가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닫고 다른 조건을 내밀었다.
“제가 서포트 하겠습니다.”
“서포트?”
“어르신께 바로 정력을 드리라고 제가 옆에 바짝 붙어서 계속 서포트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미소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제야 좀 빠릿빠릿하구나. 이렇게 일을 잘 하면서 조금 전에는 왜 그랬어? 하마터면 귀한 인재를 날려먹을 뻔했잖느냐.”
엄대협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예, 암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엄대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난 너만 믿고 있으마.”
예전 같으면 반태수에게 좀 강하게 어필을 해서 빨리 받아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굵직굵직한 일을 여러 건 해결해서 그런지,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알아서 그런지, 왠지 반태수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하, 이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 그냥 한 번 들이받아?”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 그랬다가 밉보여서 정력을 안 준다고 하면 어쩌겠나.
더 무서운 건, 주변 사람들한테는 다 주고 자신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살라자 샤마쉬가 정력 자랑을 하는 상상을 해버렸다.
원래는 점혈 걱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느새 그건 전부 사라지고 정력 걱정만 했다.
그러는 사이, 비행선이 트레일러를 매달고 그곳을 떠났다.
저 물건들은 데드릭 벨크리스 소유의 빌딩에 있는 커다란 창고 안에 보관할 것이다.
말이 창고지 보안이나 구조를 보면 금고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반태수가 다시 나타났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색하며 반태수를 맞이했다.
“왔어?”
반태수는 그 한 마디에 담긴 미묘한 느낌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점혈 문제를 잘 해결했느냐는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것 같았다.
“뭡니까?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있어요?”
"응?"
데드릭 벨크리스는 흠칫 놀랐다. 마치 머릿속을 꿰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할까요? 일도 다 끝났는데.”
“어…… 커피! 좋지. 커피 한 잔 하자. 그래.”
“이건 뭐지? 커피 마시고 싶었던 거 아니었네요?”
“아니긴! 내가 커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자자, 얼른 커피 마시자, 얼른.”
반태수가 고개를 돌려 엄대협을 쳐다봤다.
엄대협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엄대협에게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을 부라렸다. 얼른 아까 약속한 대로 하라는 압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미친놈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정력 얘기를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나한테 할 말 있어?”
“아니, 커피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데드릭 벨크리스가 몇 번이나 눈을 부라렸지만, 엄대협은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 버렸다.
반태수는 빠르게 커피를 준비했다. 사실 자기가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커피 얘기를 꺼낸 것이기도 했다.
각자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하나씩 받고 차분히 커피를 음미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에게 물었다.
“점혈은 어떻게 됐어? 해결 좀 했어?”
반태수가 커피를 한 모금 후룩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전 물어볼 거 다 물어봤어요. 영감님도 혹시 물어볼 거 있으면 약발 남아 있을 때 하세요.”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반태수는 허공에 떠 있는 두 중간상인을 데드릭 벨크리스 앞에 내려놓았다.
몸을 꽁꽁 묶었던 밧줄이나 관절에 꼼꼼하게 박았던 꼬챙이는 전부 제거했다.
점혈이 통하게 만들었으니 그저 몸을 마비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두 중간상인은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언제 제대로 된 고통을 겪어 봤겠는가.
평소에도 모든 고통을 제거하면서 살아왔을 텐데 말이다.
안 그래도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는데, 웬만한 고통은 애들 장난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혈을 겪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저 정도로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반태수는 이들에게 점혈이 통하게 만들려고 점혈 자체를 개조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고통이 더욱 깊고 세심하게 들어갔다.
이 두 중간상인이 견딘 점혈의 시간은 고작 30초였다.
30초 만에 항복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었다.
반태수가 굳이 30초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상 하면 정신이 망가질 것 같아서였다.
차후에도 이들에게는 점혈을 쓸 때 세심한 조절이 필요하리라.
시간도 아주 조금씩 늘려가야 할 테고.
물론 더 이상 점혈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고통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모를까.
“영감님이 데려가시죠.”
“그래도 돼?”
“전 들을 거 다 들었다니까요? 나중에 정보나 서로 맞춰보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중간상인을 양손에 각각 하나씩 덥석 들었다.
“자, 가자.”
저 멀리서 데드릭 벨크리스의 비행선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걸 본 엄대협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비행선 세 대를 쓰고도 저렇게 좋은 비행선이 또 오다니.
어느새 비행선이 착륙했고, 세 사람은 곧장 비행선에 탔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비행선에 오르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이놈들이랑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겠구나.”
그의 미소에는 기대감과 잔혹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반태수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처럼 단숨에 타노로스의 중심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얻지 못했다.
중간상인은 중간상인일 뿐이었다.
그래도 차근차근 따라 올라가다보면 언젠가는 타노로스를 박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좀 길고 험난할거 같아서 그렇지.’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제대로 싸우겠다고 날뛰기 전에 미뤄뒀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조차 안 하고 이 길고 험난한 싸움을 시작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반태수는 결연한 표정으로 비행선에 올라탔다.
이내 비행선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