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마법사다-298화 (294/351)

298화.  < 이면세계는 좀 다르다 >

==============================

“아니…… 저 분은 왜 따라오시는 거야?”

엄대협이 어깨를 움츠리며 반태수에게 바짝 붙어서 물었다.

반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뭘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누가 저지른 일인데.

엄대협이 정력이라는 말만 안 했어도 아마 데드릭 벨크리스는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저녁에 술 한 잔 마시는 데 따라오겠나.

이후에 유흥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물론 끊임없이 이후의 일정을 추가하려고 애쓰고 있긴 하다.

“정말로 밍밍하게 술만 마시고 끝낸다고? 진짜 그렇게 재미없게 놀 거냐? 정말 진짜야?”

반태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 가는 술집 바텐더가 여기 있는 엄대협 애인이라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애인이랑 유흥은 별개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그리고 안 되면 그놈만 빼고 우리끼리 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 말에 엄대협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저…… 어르신, 부디 절 버리고 가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지금 애인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인지라……."

“왜? 죄라도 졌어? 바람피우다 걸렸나? 아니면 밤일이 시원찮아?”

엄대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비수로 심장을 찔린 기분이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 반응을 보고 낄낄 웃었다.

“보아하니 정곡을 찔렸군. 뭐가 답이지? 죄? 바람? 밤일? 아하, 밤일이군? 아아 그래서 우리 마법사님을 쫓아다니는 건가?”

엄대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놀리듯 저런단 말인가.

하지만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상대는 5대 가문의 어르신이다. 대꾸 한 마디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

엄대협은 걸음을 빨리했다.

어느새 반태수를 훌쩍 지나쳐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런 엄대협을 보고 데드릭 벨크리스가 또 낄낄 웃었고.

반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감님, 안 그래도 불쌍한 놈을 왜 자꾸 놀리십니까?”

“놀리긴 누가 놀려? 그냥 좀 친해지자고 하는 말이지.”

“그렇게 해서 친해지겠습니까? 안 그래도 영감님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데.”

“이러다보면 다 친해지게 돼 있어. 이렇게 나랑 친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반태수는 더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해 그냥 포기했다.

저 영감님은 그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굴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 저 영감의 심기를 건드리겠나.

아무튼 그러다보니 어느새 술집 근처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묘하네.”

데드릭 벨크리스는 거리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번화가와 변두리의 경계가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저 술집인가?”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짓으로 가리킨 술집을 보며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대협은 벌써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는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술집에 들어갔다.

“호오. 분위기 마음에 드는데?”

술집의 어득어둑한 분위기와 인테리어가 데드릭 벨크리스의 취향을 살짝 건드린 모양이었다.

엄대협은 바텐더 앞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나름 괜찮아 보였다.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가 다가가니 바텐더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바텐더가 반태수를 보며 살짝 눈웃음을 쳤다.

“이 답 없는 사람,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솔직히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바텐더의 말에 엄대협이 발끈했다.

“포기라니! 내가 꼭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걸 안 믿은 거야?”

바텐더가 차가운 눈으로 엄대협을 노려봤다.

엄대협이 움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저분이 안 도와줬으면, 그래도 멀쩡히 돌아올 수 있었어?”

“아니, 돌아오는 건 할 수 있었다니까? 족쇄를 차긴 했겠지만.”

그리고 그 족쇄 때문에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말이다.

반태수는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앉았고.

“어제 마신 그 술, 주시죠. 더 괜찮은 술 있으면 추천해줘도 좋고요. 아, 술값. 오늘은 그거 미리 드리죠. 뭐, 급한 일이 없으니 잊을 것 같지는 않지만.”

반태수는 아공간에서 황금카드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 본 바텐더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정도로 비싼 술은 아닌데요?”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우리가 몇 병을 먹을 줄 알고요. 나중에 모자라면 말해요. 더 드릴 테니.”

바텐더가 놀란 눈으로 입을 헤 벌린 채 반태수를 바라봤다. 글락 그룹 회장이라더니 씀씀이가 아주 끝내주지 않나.

물론 그게 아니었어도 이 정도 씀씀이는 반태수에게 별로 대단할 것이 없었다.

글락 그룹을 통해서 번 돈은 아직 반태수가 손도 대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쓸 수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고.

그건 나중에 아네스를 만나서 천천히 확인해도 된다. 그렇게까지 큰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아무튼 바텐더는 돈을 챙긴 후, 술과 간단한 안주를 내왔다.

술을 마신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호오. 이 술은 진짜 괜찮은데?”

놀랍게도 데드릭 벨크리스도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수십 년 동안 유흥을 즐기며 별의 별 술을 다 마셔봤을 텐데도 처음 마시는 술이라면 정말 드문 술이리라.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가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의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살짝 초조하게 바라보던 엄대협도 술 몇 잔을 마셨다.

“으음? 이거 정말 괜찮은데?”

엄대협도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대번에 시선이 바텐더에게로 향했다.

“그거 되게 비싼 술이야. 넌 와서 공짜 술만 먹는데, 내가 그걸 내놓을 거 같아?”

“나도 돈 내면 되잖아.”

“내가 받기 싫은데?”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또 돈 받기 싫다는 말이 왠지 듣기가 괜찮았다.

“좋냐?”

옆에 앉은 반태수가 엄대협을 보며 묻자, 엄대협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프지 않네. 좋아.”

“슬슬 소개 좀 해주지?”

반태수의 말에 엄대협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바텐더와 반태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 이쪽은 로잘린. 보다시피 술집을 운영하시지.”

“그게 끝?”

반태수가 추궁하듯 다시 묻자, 엄대협이 로잘린의 눈치를 살폈다.

로잘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어제 손님으로 왔다고 했잖아.”

“아, 그러니까 여기 로잘린은 정보상이기도 해. 그쪽 방면으로 실력이 제법 뛰어나니까 가끔 이용해도 괜찮을 거야."

그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나섰다.

“크랙톤 말고 다른 도시의 정보도 취급하나?”

“취급은 하는데, 도시마다 편차가 심해요. 저랑 연결된 정보 조직이나 정보원들이 많이 있는 도시는 양질의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죠.”

그렇다고 소스가 부족한 도시의 정보를 대충 다루는 건 아니었다.

나름 다른 곳의 정보를 이용해서 몇 차례 가공하는 식으로 정보의 질을 올리고 있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정말로 실력이 괜찮은 정보상이었다.

반태수가 신기한 눈으로 엄대협을 쳐다봤다.

“용케 이런 데를 찾았네.”

“야, 나도 나름 브로커로 험하게 구른 사람이야. 정보에 제일 민감한 족속이 브로커인 거 몰라? 거기에 목숨 줄이 달렸어.”

엄대협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로잘린 양이 브로커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했거든. 정작 브로커들은 이용하기 어려웠지만.”

이용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 비싸서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로잘린이 브로커와의 정보 거래를 꺼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너 만나서 그래도 좀 위상이 올라갔잖아? 그래서 우리 로잘린 양을 자주 이용할 수 있었지.”

반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주 이용한 것치고…… 나한테 가져온 의뢰가 몇 개 안 되는 거 같은데, 내가 착각한 건가?”

“에이, 착각이지. 그리고 정보를 꼭 의뢰 찾는 데만 쓰나? 듀마이어 공방 일도 있고, 저택의 직원들에 관련된 일도 있고, 의외로 많다니까?”

“저택 직원? 그런 또 뭔데?”

“곤란을 겪고 있던 직원도 있고, 또 매수 된 직원도 있었고. 뭐, 그런 자잘한 건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복잡하고 귀찮은 일은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반태수는 직원 얘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아, 조만간 이사 갈 거야.”

“뭐? 이사? 왜? 지금 사는 저택도 괜찮지 않나?”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려고. 슬슬 한계 같더라고.”

엄대협은 대번에 이해했다.

“아…… 맞네. 집사님은 좀 힘드셨겠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글쎄. 알아봐야지.”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로잘린을 쳐다봤다.

“이런 정보도 팝니까?”

로잘린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원하시는 조건만 말씀해 주세요. 저희에게는 발품을 팔 많은 직원들이 항시 대기 중입니다.”

반태수는 로잘린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자주 이용하게 될 듯했다.

“그럼 집 좀 알아봐 주세요. 대략적인 조건은 엄대협을 통해 전달하죠.”

로잘린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저런 모습도 재미있었다.

그 뒤로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계속 술을 마셨다.

세 가지 정도의 술을 마셨는데, 전부 마음에 들었다.

다들 굉장히 비싼 가격을 자랑했지만, 가격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술을 마셨을까.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바 위에 황금카드를 몇 장 놓았다.

정말로 자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2차 가야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가 눈빛과 표정, 몸짓을 통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냥 가겠다고 하면 후폭풍이 좀 있을 것 같다.

애초에 반태수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게 아니더라도 좀 더 놀고 싶긴 했다.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영감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거죠?”

“크하하하! 괜히 입 아프게 당연한 얘기를 하는 거냐. 넌 어쩔 거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엄대협을 보며 물었다.

엄대협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라 데드릭 벨크리스와 반태수, 그리고 로잘린을 번갈아 바라봤다.

로잘린의 눈매와 입가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는데, 엄대협은 미처 그걸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걸 본 건 반태수였다.

반태수는 열심히 엄대협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뭘 고민하느냐고. 무조건 남으라고.

하지만 엄대협은 그 신호를 잘못 받아들였다. 따라오지 않으면 정력도 없다고.

“어…… 오늘은 어르신도 계시니……."

엄대협의 말에 반태수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늦기 전에 얼른 말했다.

“그래. 우리 영감님도 있으니 넌 여기 남아. 영감님이랑 할 얘기도 좀 있고.”

“어, 어? 그, 그래도 될까?”

반태수가 엄대협에게 바짝 붙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야이, 미친놈아. 분위기 좀 읽어. 평소답지 않게 왜 이리 눈치가 없어?”

“정력제 받기 전에는 쟤 감당 못해. 네가 내 심정을 알아?”

“그래도 남아. 쫓겨나기 싫으면.”

반태수는 그렇게 강제로 엄대협을 떼어놓고 뒤로 물러났다.

엄대협의 애절한 표정과 눈빛이 반태수에게 쏟아졌지만, 반태수는 싹 무시하고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말했다.

“영감님, 가시죠.”

데드릭 벨크리스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지 연신 킬킬 웃었다.

“그래, 가자. 넌 나중에 보자. 재미있는 얘기 기대하마.”

데드릭 벨크리스는 엄대협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술집에서 나갔다.

반태수도 손을 한 차례 흔들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엄대협의 표정이 더욱 애처로워졌다.

그리고 그런 엄대협의 어깨에 로잘린이 손이 턱 올라갔다.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엄대협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자, 저놈은 죽든 살든 알아서 하게 두고 우린 또 한 번 밤을 달려야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으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도 데드릭 벨크리스와 노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일단 굉장히 재미있었으니까.

“가시죠. 설마 크랙톤 쪽 유흥도 다 조사가 끝난 겁니까?”

“끝난 지 오래지. 나만 따라오면 천국의 밤을 보낼 수 있게 해주지.”

“그거 참 기대되네요.”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밤의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데드릭 벨크리스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일단 접촉은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나 나나 접촉이 쉬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렵겠죠. 준비도 많이 해야 될 테고. 뭐, 안 될 거 같으면 다른 사람을 내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 누구? 아까 그 엄대협?”

“적격이죠. 그런데 보안은 확실한 겁니까? 이번 일은 보안이 생명이라는 거 아시죠?”

“걱정 마라. 처음 잡아왔을 때부터 보안에 엄청 공을 들였으니까. 아직 그놈들 잡힌 건 아무도 몰라. 타노로스에도 알려지지 않았을 거야.”

문제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의 보안이 철저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정보가 새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 계획은 실패가 예정될 테고.

“입단속 진짜 단단히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그놈들 한 번 잡아보겠다고 별 짓을 다 했어. 그런데 진짜 눈치 빠르고 정보도 빠른 놈들이야.”

“이번에는 잡아야죠. 그놈 하나 잡으면 줄줄이 캐낼 수 있을 겁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기대감이 어렸다.

“벌써 기분이 좋아. 너까지 나서는데 당연히 잡겠지.”

아마 이번 일이 타노로스를 박멸의 첫 걸음이 되리라.

적어도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자, 내일부터는 일정이 굉장히 바빠질 가능성이 높으니 후회 없이 놀아야지. 가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크게 웃으며 앞장섰다.

그리고 반태수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오늘 밤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