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 엘리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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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한 잔의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투박한 머그컵에 담긴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열기와 함께 올라온 향이 엘리스의 코끝을 자극했다.
엘리스는 한순간 아찔한 감각이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런 엘리스를 지켜보는 반태수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마시기도 전부터 뜸을 들이고 긴장하며 기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뒤에야 반응을 보였는데, 엘리스는 커피를 본 순간부터 반응을 보였다.
‘이게 가장 복잡한 마력회로 보유자의 위엄인가.’
아마 저 복잡한 마력회로가 무언가 특별한 작용을 해서 커피향을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엘리스는 잠시 커피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제인을 바라봤다.
제인은 이미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어찌나 황홀한 표정으로 마시는지 절로 침이 넘어갔다.
엘리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입에 갖다 댄 다음 살짝 커피를 들이마셨다.
후룩.
혀끝에서부터 시작해 세포가 하나하나 올올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혀를 정복하고 온몸으로 퍼져 모든 세포가 활짝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엘리스의 눈이 살짝 풀렸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하마터면 컵을 놓칠 뻔했다. 아니, 거의 놓쳤다. 반태수가 얼른 마력을 써서 컵의 균형을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분명히 놓쳤으리라.
그녀는 신음도 흘리지 못했다.
한 모금도 아닌 고작 반 모금에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 모습에 반태수와 제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동안 커피를 마신 모든 사람을 통틀어 엘리스의 반응이 최고였다.
저래서 커피를 다 마실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엘리스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커피를 마셨다.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제인과 반태수는 커피를 다 마신 후, 엘리스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내 엘리스가 커피 한 잔을 전부 마셨다.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후, 지그시 눈을 감고 여운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엘리스는 천천히 눈을 뜨고 반태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커피도 회사 복지 중 하나인가요?”
반태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엘리스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 회사에 입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반태수가 묘한 표정으로 엘리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제인이 기쁜 표정으로 손뼉을 짝 쳤다.
"고모, 우리 회사 들어오시려고요? 정말 잘 결정하셨어요! 아마 절대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엘리스가 빈 머그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걸 먹었는데 어쩌겠어.”
제인이 빙긋 웃었다.
“확실히 그렇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 커피, 한국에 가면 파는 곳이 있어요.”
엘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
당장 한국에 날아가기라도 할 것 같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커피를 주제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커피의 맛과 향에 대한 얘기를 30분도 넘게 떠들던 제인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차차, 고모. 지금 마력회로 상태 어때요?”
“마력회로? 어떻긴 오늘 능력을 썼는데. 당연히 딱딱하게 굳었지.”
"아이, 참. 확인도 안 해보시고 말씀하지 말고요. 차분히 확인해 보세요.”
"얘도, 참. 확인하나마나지. 내가 예지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엘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인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마력회로를 한 차례 점검했다.
"응? 좀 이상한데?”
엘리스는 고개를 가웃거리더니 다시 한 번 마력회로를 점검했다.
그런 식으로 네 차례나 반복해서 확인한 엘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력회로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제인이 씨익 웃었다.
"마력회로가 많이 부드러워졌죠?”
엘리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제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커피요.”
“커피?”
"우리 보스가 주는 커피를 마시면 마력회로가 말랑말랑해져요. 제 쿨타임 아시죠?”
"알지. 보름이잖아.”
"커피 다섯 잔이면 능력을 또 쓸 수 있어요.”
"진짜?”
엘리스는 정말로 크게 놀랐다.
커피 다섯 잔으로 쿨타임 15일을 날려 버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그럼 나도……."
"고모는 몇 잔 마셔야 마력회로가 활성화될지 모르겠네요. 오늘 한 번 도전해보실래요?”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반태수를 바라봤다.
이 도전은 반태수가 전적으로 협조해줘야 할 수 있다. 커피를 제공 받아야 하니까.
"고모는 쿨타임이 기니까, 어쩌면 커피 마시다 토할 수도 있겠네요.”
엘리스가 그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커피를 토할 때까지 마시는 것도 멋진 일이 될 거야.”
***
원래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예지 능력을 가진 기공술사 엘리스를 영입했다.
이제 그쪽 가문의 기공술사 세 명을 전부 영입한 것이다.
과거의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제인, 인지를 초월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패트릭,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 능력자 엘리스까지.
참고로 엘리스는 진짜 커피를 토할 때까지 마셔서 능력을 리셋했다.
엘리스의 마력회로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들어간 커피는 총 16잔이었다.
진짜 마시고 토했는데도 엘리스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토할 때도 그리 괴로워하지 않았다.
엘리스는 앞으로 사흘에서 나흘 정도에 걸쳐 커피를 마시면서 능력을 쓰기로 했다.
능력을 쓰는 텀이 줄어드니 자신을 위해 능력을 쓰는 일도 줄어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반태수가 지급한 마도구 덕분에 안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조금 버렸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자신을 위해 능력을 쓰고 나머지는 온전히 회사를 위해, 그리고 반태수를 위해 능력을 쓰기로 했다.
세 사람의 시너지는 어마어마했다.
과거와 미래를 읽고 그것을 통찰해 정보를 뽑아낸다.
게다가 통찰을 담당하는 패트릭이 정보를 다루는 능력은 혹시 마력회로에 관련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제인이나 엘리스가 없었어도 양질의 정보를 쭉쭉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세 사람이 모여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뽑아내겠는가.
아무튼 세 사람이 들어온 덕분에 포션의 조직 체계가 많이 달라졌다.
처음 회사를 열었을 때는 그저 포션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일을 한다.
사람을 더 뽑아 정보팀을 만들었고, 그걸 패트릭이 맡아 운영했다.
능력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구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래야 훨씬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정보팀을 통해 깨끗한 인재를 구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꽂아 넣는다.
새로 만든 부서에서 드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밖에 몇 가지 새로운 사업을 준비했다.
또한 로비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포션에 스타르나 가문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
반태수는 앞에 앉은 중년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갈린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였는데, 그가 바로 스타르나 가문의 가주였다.
점혈로 반태수에게 귀속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아르디스 일당이 가문으로 돌아가 가주를 비롯한 가문 사람들을 설득한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갈린단은 한동안 말없이 반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뒤에는 가문에서 호위로 따라온 기공술사들이 석상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모두 네 명이었는데, 다들 다섯 개의 마력회로를 열었다.
그 정도면 스타르나 가문 내에서도 제법 실력이 높은 축에 속한다.
"계속 그러고 있을 겁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갈린단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전 아직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아르디스 어르신이 왜 그러셨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르디스는 스타르나 가문에서 유일하게 일곱 개의 회로를 연 사람이었기에 가진 영향력이 상당했다.
그 영향력으로 스타르나 가문이 반태수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디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르디스와 함께 나섰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주장을 해서 가문의 분위기가 굉장히 뒤숭숭해졌다.
그 뒤로도 그들은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정말로 애썼다.
가주인 갈린단이 보기에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활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 가문의 분위기가 한 쪽으로 흘러갔다.
결국 갈린단이 여기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태수가 갈린단을 보며 빙긋 웃었다.
“왜 가주를 나한테 보냈다고 생각합니까?”
갈린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날 보냈다는 겁니까? 난 나 스스로 판단해서 여기에 온 겁니다.”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스타르나 가문 내에서 나와 손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이제 제법 뜨겁죠? 그런데 그런 분위기, 과연 누가 만들라고 했을까요?”
갈린단이 흠칫 놀랐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당신이 아르디스 님을 움직였다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쪽이 여기 있다는 게 증거죠.”
갈린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 온 게 뭐 어쨌단 말인가.
반태수가 말을 이었다.
"우리 포션이 많이 거슬렸다던데, 맞습니까?”
“거슬렸다기보다는 경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조만간 포션을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라서 말이죠.”
“그럼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날 건드렸습니까?”
갈린단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가 건드리긴 뭘 건드렸단 말입니까?”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제대로 대화가 될 거라고는 안 믿었어.”
말투와 분위기가 달라지자 갈린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반태수를 노려봤다.
“내가 여기 온 건 우리 가문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을 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자, 그럼 아르디스가 왜 그랬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반태수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
스타르나 가문과 손을 잡기로 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스타르나 가문이 포션에 합류하기로 했다.
스타르나 가문이 시장에 내놓으려는 포션은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만드는 방식이나 레시피를 확인해봤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타르나 가문의 포션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공술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특수하게 제작한 약물에 치료 능력을 가진 기공술사가 힘을 퍼부어서 치료 능력 자체를 약물에 깃들게 한 것이 스타르나 가문의 포션이었다.
약물에 들어가는 재료도 보통이 아니었다.
능력을 잡아두는 약물인데 평범한 재료로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원가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포션을 판매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적었다.
스타르나 가문이 포션 판매로 얻으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영향력이었다.
그러니 반태수가 세운 포션이라는 회사가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하지만 이제 그런 과거는 다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타르나 가문이 포션의 파트너가 되었으니까.
반태수는 과감하게 스타르나 가문의 포션 제작을 폐기해 버렸다.
성능도 떨어지고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포션을 굳이 계속 만들 이유가 없었다.
반태수는 스타르나 가문을 이용해 포션을 보호하기로 했다.
스타르나 가문은 알렉스가 파악한 세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은 보통이 아니다.
스타르나 가문이 포션과 손을 잡았다는 정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 포션을 먹잇감으로 보는 시선이 많이 사라졌다.
반대로 질시의 시선도 생겼지만, 그건 스타르나 가문이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
반태수는 이쯤 했으면 됐다고 여겼다.
이제 포션은 굳이 자신이 없더라도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다.
백진희의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서 지금 추진하는 다른 사업들도 전부 잘 될 것이다.
이대로 손을 떼도 시간이 지날수록 포션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영향력은 확대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렉스 쪽은 스타르나 가문과 하리뮬러 가문을 포함한 세 가문이 계속 견제하고 있다.
거기에 엘리스, 제인, 패트릭이 소속된 가문도 나섰다.
두 번이나 똥을 싸지르는 바람에 입지가 많이 좁아진 알렉스가 그쪽 회사에서 버티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리라.
이제 지구의 일은 고대인의 후예에 대한 조사, 그리고 마력회로의 완성을 위해 더 다양한 기공술사들을 만나보는 것 정도가 남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다.
이제 슬슬 이면세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