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 제인의 마지막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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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에트리안과 텔레파시를 통해 계획을 맞춘 후, 자신의 몸에 잠시 새겼던 마력회로를 지웠다.
오직 텔레파시만을 위해 새긴 마력회로였다. 에트리안과 텔레파시를 쓰려면 그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마력회로가 필요했으니까.
텔레파시를 통해 전화번호도 알려줬으니 앞으로는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을 것이다.
물론 통화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오늘은 제인이 마지막 일을 하러 회사로 가는 날이다.
기본적으로는 제인이 혼자 가야 하지만, 반태수가 따라가기로 했다.
물론 제인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왜곡을 쓰고 따라가면 되니까.
최근 에트리안과 테사라의 마력회로를 복사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몇 가지 성과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텔레파시였다.
마법으로 텔레파시를 구현하려면 굉장히 복잡하고 제한이 많다.
하지만 마력회로를 쓰면 그 복잡한 과정을 대부분 생략할 수 있었다.
방금 에트리안에게 텔레파시를 쓴 것이 바로 그걸 이용해서였다.
좀 더 연구하면 에트리안 가문의 마력회로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마력회로를 개발해서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반태수가 구상하는 마력회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복잡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굉장히 심오한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에 설치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하루하루 구상한 마력회로가 발전하는 모습이 정말 즐거웠다.
마법을 익힐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이번에 얻은 건 텔레파시만이 아니었다.
왜곡에 적용할 만한 마력회로도 얻었다.
이 역시 에트리안의 마력회로를 연구하다가 얻은 것이다.
물론 지금 반태수가 쓰는 왜곡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기에 여기에 마력회로를 굳이 추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걸 응용하면 드론이나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때, 그것들에게 왜곡을 내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굉장히 빡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오늘 제인을 따라가다가, 혹시라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텔레파시를 이용해서 그녀에게 경고를 해줄 수 있게 되었다.
뭐, 솔직히 텔레파시가 없어도 그냥 힘으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있지만.
그래도 텔레파시가 있으면 좀 더 세련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인은 오늘 마력회로를 꽉 채우기 위해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다.
어제 능력을 쓴 다음 커피를 두 잔 마셨기에 추가로 세 잔을 마시고 다시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녀올게요.”
제인은 활기차게 인사하고 객실을 나섰다.
반태수는 잠시 시간을 두고 따라 나가면서 왜곡을 걸었다.
제인 주변을 지키는 드론들이 왜곡이 걸린 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호텔을 나선 제인에게 경호팀이 빠르게 접근했다.
경호팀장인 앤드류도 물론 함께였다.
호텔에 있다고 짐작은 했었다. 찾지는 못했지만.
제인을 만나게 되면 제법 화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게 되니 평소 하던 대로 하게 되었다.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일상 같았다.
"제인, 회사로 가시는 겁니까?”
앤드류의 물음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차량이 미끄러지듯 제인 앞에 섰다.
제인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 뒷좌석에 탔다. 그리고 조수석에 앤드류가 탔고.
앤드류는 회사로 가는 내내 제인의 눈치를 살폈다.
"제인,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는 겁니까?”
제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회사, 평범하지 않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이렇게 막무가내로 그만두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제인이 차가운 눈으로 앤드류를 쳐다봤다.
"이 얘기는 이미 알렉스하고 다 했어요. 그러니 굳이 더 하고 싶지 않네요.”
앤드류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이 돌아서도 크게 돌아섰다.
제인은 그런 앤드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그 얘기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거 아닌가요?”
제인은 앤드류가 마피아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마피아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게 뭔지 잘 모르겠군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겁니까?”
"사과부터 해야죠.”
"사과? 아, 제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부분은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인이 제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도망쳤잖습니까. 저희 경호팀도 할 만큼 했다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인의 입매가 비틀렸다.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됐어요. 저도 더 할 말이 없네요.”
마음 같아선 네가 마피아를 움직였잖아!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회사로 가서 마지막 일을 해주고 조용히 돌아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회사와 인연을 잘 끊어야 반태수와 일을 할 때 문제가 안 생기지 않겠는가.
‘뭐, 회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긴 하지만.’
그래도 두렵지는 않았다. 반태수가 지켜줄 테니까.
아니, 지금 몸에 두른 마도구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자신이 있었다.
도망도 잘 칠 수 있고.
제인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앤드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뭔가 제인의 분위기가 마음에 계속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얘기 해봐야 이젠 대꾸도 안해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제인을 태운 차가 회사에 도착했다.
***
제인은 자신이 일을 할 때 쓰는 방으로 향했다.
벽, 천장, 바닥까지 전부 새하얀 칠을 해 놓은 넓은 방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 역시나 새하얀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 태블릿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심지어 태블릿도 하얀 색이었다.
꺼진 태블릿 화면만 새까맸다. 그게 이 방에서 유일하게 흰색이 아닌 부분이었다.
문도 하얀 색이고 창문도 없는 방이었다.
"하여간 여기만 오면 없던 정신병이 생길 것 같다니까.”
대체 왜 이런 방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제인의 일을 봐주는 직원이 함께 한다. 한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제인은 방에서 이렇게 기다릴 때는 항상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방을 만들었다는 게 신기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그랬지만, 이젠 치가 떨렸다.
잠시 후, 알렉스가 들어왔다.
"제인, 오랜만이로군. 잘 지냈나?”
그 소리를 듣고 제인이 눈을 떴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잘 지냈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나날을 통틀어 손꼽힐 정도였어요.”
"그래? 그거 참 잘 됐군. 내가 오늘 이렇게 직접 온 건, 오늘 일이 중요해서 그래. 아무나 맡을 수 없는 일이거든.”
“하아. 전 이렇게 또 무서운 비밀 하나를 알게 되겠네요. 이런 거 정말 부담스럽다니까요.”
“평생 이 회사에 다니면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는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하려고 드나.”
“그래도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았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우린 널 감시할 수밖에 없어. 그건 이해해줄 수 있겠지?”
제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를 안 하면 어쩌겠어요. 그런다고 감시 안 할 건 아니잖아요. 뭐, 서로의 입장이 있으니 알아서 하세요. 사실 저도 제가 여기 다니면서 알게 된 비밀을 굳이 어디서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잊었어요. 기억하기도 싫을 정도로 부담스러워서.”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군.”
“진짜지만, 뭐 못 믿는 것도 이해해요. 그러니 쓸데없는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일부터 하죠.”
알렉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게 낫겠어. 자, 오늘 할 일은 이거야.”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쪽지 한 장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블릿을 켜서 영상 하나를 플레이했다.
영상을 촬영한 곳은 누군가의 서재였다.
보아하니 스파이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듯했다. 화질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쪽지에는 저 서재가 있는 저택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캘리포니아 어딘가였다.
"위치는 확실히 파악했나?”
알렉스의 물음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인지했어요.”
위치를 인지하는 것도 제인의 기공술에 포함된 능력이었다.
그러니 우주공간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곳을 촬영한 것 아니겠는가.
이제 정확한 시간을 지정하면 된다.
"정확히 나흘 전, 밤 10시 17분을 조사해.”
제인이 눈을 감고 마력회로를 작동했다.
머릿속으로 나흘 전, 밤 10시 17분의 상황이 펼쳐졌다.
굉장히 잘 생긴 중년 남자가 서재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손에 어른 주먹만 한 구슬을 하나 들고 그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뭔지 살펴보는 게 아니라, 혹시 어디에 금이라도 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티끌이라도 묻지 않았는지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다른 손에 든 부드러운 천으로 구슬을 몇 번 닦았다.
그리고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장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한 권을 뽑았다. 그리고 옆으로 몇 걸음 걸어가 다른 책을 또 뽑았다.
그런 식으로 일곱 권의 책을 뽑은 다음, 다시 원래대로 꽂았다. 꽂을 때는 뽑을 때의 역순이었다.
그렇게 하자 책장이 좌우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활짝 열린 건 아니고 1미터 정도 열렸다.
그리고 열린 책장 사이에 거무튀튀한 금고 문이 나타났다.
금고 한가운데 키패드가 있었는데, 그는 총 열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금고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겼다.
그의 얼굴과 목에 핏줄이 툭툭 돋아났다. 손잡이를 쥔 손과 팔뚝에도 선명하게 핏줄이 돋았고,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용을 쓰고 나서야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금고가 그리 두꺼운 건 아닌데 일부러 문을 열기 힘들게 만들어 둔 듯했다.
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그 구슬만을 위해 만든 금고인 모양이었다.
중년 남자는 금고에 구슬을 넣고 문을 닫았다.
닫을 때는 열 때와 달리 너무나 간단히 닫혔다.
중년 남자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나자, 책장이 다시 원래대로 닫혔다.
중년 남자는 서재에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었다.
은은한 달빛이 서재로 쏟아졌다.
달빛을 맞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끝났나?”
알렉스의 물음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알렉스의 눈에 깃든 탐욕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아마 오늘 확보한 영상을 통해 그 구슬을 얻으려는 모양이다.
제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에 영상을 전송했다.
"끝났어요.”
태블릿을 알렉스 쪽으로 밀자, 알렉스가 바로 영상을 플레이했다.
영상 확인이 끝나면 제인의 일도 끝난다.
제인은 영상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길지도 않으니 금방 끝날 것이다.
영상이 중간쯤 돌아갔을 때, 알렉스가 영상을 정지하며 난데없이 물었다.
"이 남자가 누군지 아나?”
“아뇨.”
“카타르 하리뮬러.”
"예?”
"그게 그 남자 이름이야. 좀 특이하지?”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이상한 이름은 아니었다. 제인이 보기엔 그랬다.
"얼른 영상이나 마저 보시죠.”
"카타르 하리뮬러는 하리뮬러 가문의 가주야. 그리고 하리뮬러 가문은 아주 은밀하게 미국 곳곳에 영향력을 뻗고 있지.”
"저한테 왜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죠?”
알렉스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가문에는 기공술사가 정말 많아. 게다가 다양한 능력을 가졌지. 그걸 이용해서 영향력을 엄청나게 키웠어. 아주 오랫동안.”
"전 그런 얘기 관심 없다니까요? 영상 확인 안 하실 거면 여기서 끝내죠. 전 가보겠습니다.”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다가 이어진 알렉스의 말에 다시 앉았다.
"저 가문에는 기공술사를 양산하는 비법이 있어.”
제인은 놀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기공술사를 양산한다고요?”
“그래. 그게 아니면 말이 되지 않아. 한 가문에 저렇게 많은 기공술사가 있다는 것이.”
제인은 입을 다물고 알렉스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저런 가문이 하리뮬러만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세 곳이나 되지."
"기공술사를 양산하는 가문이 셋이나 된다고요?”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더 있어. 내가 아직 못 알아냈을 뿐이지.”
알렉스는 멈춘 영상에서 중년 남자가 손에 든 구슬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구슬이 기공술사를 양산하는 물건이라고 보네.”
알렉스의 눈이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제안하지. 회사에 남아. 그리고 나를 도와서 기공술사를 양산할 수 있는 이 보물들을 찾아보자고.”
아마 반태수를 만나기 이전의 제인이었다면 바로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제인은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저놈들의 뒤를 캐기 위해 능력을 낭비하라고? 그럴 수 있나. 자신은 고대인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기공술사를 양산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웠지만, 반태수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태수는 상대의 마력회로를 훤히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제인이 보기에는 백진희도 기공술사가 되었다. 아마 반태수가 무언가를 했으리라.
그러니 이쪽 일에 흥미가 크게 일어날 리 없었다.
제인은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의 눈빛에 초조함이 일렁였다. 안 그런 척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제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일이 있어서 제안은 거절할게요.”
순간 알렉스의 눈빛에 다양한 감정이 뒤섞였다가 사라졌다.
실망, 분노, 살의, 짜증, 허망, 등등등.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들끓었다.
제인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길 빨리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직 일도 안 끝났고, 대화도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거지?"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인을 노려봤다.
"저 문은 내 허락 없이는 열리지 않아. 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저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고.”
"대답은 이미 했는데요?”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넌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없나? 네가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전 여기서 나가겠어요.”
제인이 얼른 문으로 달려갔다.
그걸 본 알렉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그 문은 내 허락이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아."
제인이 힘껏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렸다. 너무나도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