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고대의 후예 4 >
========================
반태수는 에트리안도 굳이 죽이지 않았다.
테사라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안전장치를 심은 다음 내버려뒀다.
에트리안을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두고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점혈에 대한 공포는 테사라보다 에트리안이 훨씬 심했다.
그래서인지 심문하기가 훨씬 쉬웠다. 테사라에게 중간 중간 했던 10초짜리 점혈을 한 번도 쓸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에트리안에게 3분의 맛을 보여줬더니, 반태수의 손가락만 봐도 경기를 일으켰다.
사실 처음 1분짜리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더 상위의 고통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걸 알려줘야 했으니까.
나쁜 마음을 먹으면 3분보다 훨씬 긴 고통이 찾아올 거라고 했더니 납작 엎드려서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물론 믿지는 않는다.
반태수는 걸 수 있을 만한 감시와 안전장치를 다 건 다음에야 돌아갔다.
텅빈 호텔 객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한껏 널브러져 있던 에트리안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에트리안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중얼거렸다.
"테사라는 이보다 더 심한 걸 겪었다고? 그것도 여러 번? 대체 어떻게 하면 이걸 참을 수 있는 거야?”
어쩌면 자신이 테사라에게 내린 평가가 한참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고문을 견디는 훈련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아마 테사라도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으리라.
그걸 견뎌내고 반항을 했다는 거 아닌가.
사실 테사라도 반항 같은 건 꿈도 못 꿨지만, 에트리안은 그렇게 오해했다.
그래서 테사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텔레파시를 쓰기 전에 정말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상위의 고통이 찾아올 테니까.
테사라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텔레파시를 당장 끊으려 했지만, 에트리안이 즉시 말한 반태수라는 이름을 듣고는 모든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에트리안은 차분히 설명했다. 방금 그분의 방문을 받았고, 테사라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절절히 서로에게 공감하며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미 가문을 배신하고 말고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사실 에트리안은 자살도 생각했다. 하지만 테사라의 말을 듣고는 깔끔히 그 계획을 접었다.
자살을 진심으로 마음먹으면 거대한 고통이 찾아온다고 했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현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거미줄에 잡혔으면 여기서 적응해 어떻게든 살아나가야지.
무거운 절망이 에트리안을 깊게 짓눌렀다.
***
에트리안과 테사라는 예전 테사라가 알바레즈와 에이든을 만났던 빌딩에서 가문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빌딩의 중간층에 위치한 훈련실에서 기다렸는데, 둘 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연락이 없네요.”
테사라의 말에 에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연락 같은 거 안 할 거다. 바로 이리로 올 거야.”
"팀 거인사냥꾼이 온다고 했죠?”
“그래, 내가 하도 상대가 막강하다고 주장했더니 결국 그렇게 결정된 모양이야.”
테사라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괘, 괜찮겠죠?”
에트리안은 담담했다.
"괜찮아. 그분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 거니까.”
"하아. 다행이네요.”
에트리안은 테사라의 과한 태도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한 꼴을 겪었으니까.
그리고 덕분에 자신은 험한 꼴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테사라가 미리 배신에 대한 경고를 해주었기에 마음을 확실히 다졌다.
무려 5분이라고 했다.
3분도 죽을 것 같았는데 5분이라니. 그걸 겪으면 옆에 있는 테사라처럼 되리라.
"좀 괜찮아?”
에트리안의 물음에 테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나아지겠죠. 제가 중간에 헛짓만 안 하면 계속 괜찮을 거고요.”
에트리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난 요즘 텔레파시를 쓸 때마다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중이야. 평소에는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데 텔레파시 때 유독 신경이 쓰여.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전 텔레파시를 한 명하고만 쓸 수 있으니 그나마 괜찮네요. 에트리안은 저랑 같은 편이잖아요.”
"그렇지. 우리 둘은 운명공동체지.”
두 사람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때,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훈련실 내부에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가 여러 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하주차장을 찍고 있었다.
이 시간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올 차는, 그것도 지하 3층까지 올 차는 가문의 차량밖에 없다.
총 세 대의 세단이 들어왔는데,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숫자는 12명. 제법 많다.
그들은 능숙하게 벽을 조작해 훈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에트리안과 테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문의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12명의 사람들 중에 가문에서 상당히 높은 어르신 한 분이 섞여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바로 가문의 어르신인 아르디스였다.
에트리안과 테사라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아르디스는 두 사람을 슥 둘러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구나.”
테사라가 대답했다.
“약간 부상을 입었었는데, 능력으로 치료가 가능했습니다.”
큰 부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래, 고생들 많았다. 이번 일을 아주 확실히 처리하려고 가문에서 제법 신경을 썼다. 제닉스와 파이안 쪽에도 사람들을 보냈다. 그 쪽도 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다.”
제닉스와 파이안이 손을 잡고 끼어들었으니 아무리 가문의 힘과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쉽게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과 손을 잡고 일정 부분 나눠주는 것이 낫다.
“그나저나 그 백진희라는 여자를 잡으면 포션 제조를 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한 정보 맞느냐?”
“확실치 않습니다. 그저 가능성이 높을 뿐입니다.”
아르디스는 에트리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저 보고 있기만 할 뿐인데, 마치 무거운 바위를 등에 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은땀이 났지만, 에트리안은 끝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솔직히 점혈에 비하면 이건 어린애 장난만도 못하다.
아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겁게 짓누르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안 보던 사이에 제법 성장했구나.”
"감사합니다.”
“아무튼 일단은 그 백진희라는 여자를 잡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에트리안은 그 말에 얼른 입을 열었다.
"임무에 실패한 후, 제가 좀 더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래?”
"예. 백진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람? 반태수를 말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아마도 테사라를 압도한 실력자가 반태수일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이미 포션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곳의 실질적 오너인 반태수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했다.
한국의 네 번째 기공술사라는 것도 안다.
"반태수가 어떤 기공술사인지는 모르지만, 포션의 제작에 그가 큰 힘을 발휘했다는 정황을 찾아냈습니다."
"포션 제작에 반태수가 힘을 썼다고? 이면세계의 장비만 가져온 게 아니라?”
"반태수는 기공술사입니다. 이면세계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다른 능력자가 이면세계에서 장비를 가져왔다고 여겼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했다.
"제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이면세계에서 가져온 건 일부 부품과 몇 가지 마도구고, 실제로 그걸 이용해 포션 제작 장비를 조립한 건 반태수입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예. 확실합니다.”
에트리안이 이렇게까지 단호히 말한다면 그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에트리안은 확실치 않은 일은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으니까.
아르디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반태수를 잡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되겠구나.”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아르디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어차피 그놈을 잡으려고 거인사냥꾼을 데려온 거니까.”
아르디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트리안과 테사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반태수를 잡으러 갈 때, 너희들도 함께 가겠느냐? 원한다면 동행시켜주마.”
그러니까 원래는 안 데려가려고 했는데, 오늘 보고가 괜찮아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에트리안은 얼른 대답했다.
“저는 가봐야 방해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테사라도 거인사냥꾼의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아직 역량이 모자랍니다.”
아르디스가 의외라는 듯 다시 한 번 테사라와 에트리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은 확고했다.
"자기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지…… 겸손을 떠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정만 찾아선 발전할 수 없다. 특히 기공술은 도전이 중요해.”
아르디스는 가문에서 유일하게 일곱 개의 마력회로를 전부 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조언은 틀림없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트리안과 테사라는 저들의 싸움에 낄 수 없었다.
상대가 반태수인데 감히 어떻게 싸우러 간단 말인가.
두 사람은 확신했다.
저들은 이번 싸움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르디스 뒤에 있는 열한 명을 힐끗 쳐다봤다.
저 중에서 여섯 명이 팀 거인사냥꾼이고 나머지 다섯 명은 가문에서 수위에 드는 전사들이었다.
아마 팀 거인사냥꾼이 반태수를 맡고, 나머지 다섯 명은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왔으리라.
어쩌면 저들이 백진희를 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기에 끼고 싶은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저들이 점혈에 당해 노예처럼 살게 될지, 아니면 다 죽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저기에 끼는 순간, 결과는 정해져 있다.
절대 죽지 못할 것이다.
"저희는 제닉스와 파이안과의 일을 돕고 싶습니다.”
아르디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라. 뭐, 원하는 걸 하고 살아야지. 그 두 회사와 조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니까."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아르디스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럼 반태수를 잡는 계획은 네가 세워보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해보겠느냐?”
에트리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사실 계획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었다.
반태수의 행동양식을 조사해서 기습하기 좋은 장소에 언제쯤 지나갈 건지 예측하면 된다.
하지만 에트리안에게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냥 반태수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아마 흔쾌히 함께 계획을 세워 주리라. 팀 거인사냥꾼이 반태수를 기습하는 건, 반태수가 원하던 상황이니까.
"그럼 계획을 세우고 나면 나에게 연락해라. 텔레파시 말고 전화로.”
"아, 네. 알겠습니다.”
최근 연락을 전부 텔레파시로 해서 하는 말이었다.
텔레파시를 쓰는 건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연락을 전부 텔레파시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트리안은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강박 때문에 모든 연락을 텔레파시로 했다.
아르디스가 에트리안과 텔레파시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해준 것이다.
아르디스 일행은 곧장 돌아갔다.
훈련장에는 에트리안과 테사라만 남았다.
두 사람은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네.”
“저도 그래요.”
"일단 그분과 연락을 해서 얘기를 좀 맞춰봐야 할 거 같은데……."
생각해보니 전화번호가 없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텔레파시도 못 쓰고. 어떻게 연락하지?”
에트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테사라를 바라봤다. 혹시 연락처를 아느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테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그때 에트리안이 화들짝 놀랐다.
"헉!"
갑작스러운 행동에 테사라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됐나요?”
에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테사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텔레파시가 연결됐어.”
"누구랑요? 헉! 설마 그분이랑?”
에트리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텔레파시에 집중해야 한다. 한 마디라도 놓쳐선 안 되니까.
텔레파시로 반태수와 대화를 모두 마친 에트리안은 다시 눈을 뜨면서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사라가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궁금했나보다.
"뭐라고 하세요?”
"이번 습격 계획에 대해 얘기했어.”
테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얘기 하려고 일부러 텔레파시를 연결한 거예요? 아니, 그보다 텔레파시를 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말한 테사라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요? 우리가 쓰는 텔레파시, 가문의 마력회로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연결이 안 되지 않나요?”
"안 되지.”
에트리안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반태수가 텔레파시를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자신과 연결했다는 건 더 놀라웠다.
게다가 자신이 동의를 하는 과정이 빠져 있었다.
그냥 다이렉트로 텔레파시가 머릿속에 꽂혔다.
가문의 마력회로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아마 가문의 최강자인 아르디스도 그런 건 못할 것이다.
에트리안은 반태수와 엮이면 대부분 하게 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