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 고대의 후예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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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사라는 한동안 주저앉아 덜덜 떨다가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니 감정도 정리가 되었고,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도 잘 풀렸다.
일단 임무는 실패했다. 그건 이미 에트리안에게 보고했다.
다음 임무가 내려오기 전까지 여기서 그냥 가만히 대기하면 되니, 아까 반태수가 말했던 대로 잘 먹고 잘 쉬면 된다.
테사라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조금 전 반태수와 있었던 일을 에트리안에게 보고해야 할까?
반태수가 며칠 후 에트리안을 노린다고 얘기를 해줘야 할까?
그리고 자신이 본가의 위치를 말해줬다고, 아니, 아는 모든 걸 불었다는 사실을 보고해야 할까?
원래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보고했을 것이다.
설사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그렇게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지독한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아직까지 저울은 보고하지 않고 그냥 버티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지나고 나니 딴 생각이 슬그머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몸 곳곳을 찌르긴 했지만, 설마 진짜 그런 게 가능할까?
‘내 생각을 읽어서 배신하려고 하면 자동으로 작동한다고? 그게 말이 돼?’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진짜면 어떡하지?’
점혈로 인해 받은 고통이 너무 커서 그 일말의 가능성이 너무나 불안했다.
하지만 결국 가문에 대한 충성심과 믿음이 저울추의 무게를 늘렸다.
테사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마력회로를 돌렸다.
그녀가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에트리안뿐이었다.
에트리안이 그의 능력으로 그녀와 텔레파시 코드를 연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이 텔레파시 능력은 엄밀히 따지면 에트리안의 능력이었다.
물론 테사라에게 관련된 능력이 없었다면 아예 텔레파시가 불가능했겠지만.
신호를 보낸 지 3분쯤 지났을 때, 텔레파시가 연결되었다.
아마 에트리안은 또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이 그 지독한 꼴을 당하고 있는 동안 이놈은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던 거 아닌가.
테사라의 감정이 텔레파시를 타고 에트리안에게 일부 전달되었다.
하지만 에트리안은 모른 척했다.
그녀의 감정이 텔레파시를 타고 자신에게 온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이건 에트리안이 가진 텔레파시의 고유 능력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 자신과 텔레파시를 연결할 때 꺼림칙한 감정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
-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보고는 아까 했잖아. 몸도 안 좋을 텐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에트리안은 일단 좋은 말로 테사라를 은근슬쩍 달랬다.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다. 테사라가 반항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굉장히 골치가 아플 테니까.
- 일이 있으니까 연락을 했지. 설마 내가 잠 좀 깨웠다고 그러는 거야?
- 그럴 리가. 그래, 무슨 일인데?
- 후우. 그러니까.
테사라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점혈이 발동했다.
목소리가 닫혔고, 몸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테사라는 바로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아아아악!’
속으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신 안 그럴 거예요! 잘못했어요!’
그런 테사라의 머릿속에 에트리안의 텔레파시가 닿았다.
하지만 그건 금방 끊어져 버렸다.
점혈에 당한 순간 마력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테사라는 5분 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해 참회했다.
그리고 반태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수백 번 반복했다.
드디어 점혈의 시간이 끝난 순간, 테사라는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반태수에게 용서해줘서 감사하다고 빌고 또 빌었다.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반태수가 가문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올 것이고, 가문을 배신하라고 하면 배신할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의지력은 이 정도였던 것이다.
그동안 자부심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렇게 누워서 온갖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다.
***
에트리안은 갑자기 테사라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텔레파시 도중에 그걸 끊다니.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서로의 능력으로 텔레파시를 쓰는 거지만, 어쨌든 메인은 에트리안이었다.
그렇기에 에트리안의 허가가 없으면 테사라가 먼저 연락을 끊을 수 없었다.
한데 지금 테사라는 그렇게 했다.
에트리안이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테사라가 죽었을 경우.
또 하나는 테사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그 종속 관계를 끊어냈을 경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에트리안이 아는 테사라는 훌륭한 전사지만, 텔레파시의 종속을 끊어낼 정도로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럼 죽었다고? 말이 안 되는데?’
에트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테사라에게 텔레파시를 연결했다.
보낸 신호가 튕겨 나왔다.
죽은 자에게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건 상대가 연결을 거부할 때의 반응이었다.
이건 의지력과는 상관없다. 연결하기 전까지는 종속이고 뭐고 없으니까.
상대가 죽었다면 연결이 튕기는 게 아니라 허무하게 흩어진다.
즉, 테사라가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고 이쪽의 신호를 거절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왜?’
너무나 뜬금없고 갑작스럽지 않은가.
에트리안은 계속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갑자기 신호가 연결되었다.
- 자는 데 깨우지 마.
테사라는 그 말 한 마디를 끝으로 연결을 끊으려 했다.
에트리안은 다급히 그걸 막았다.
- 잠깐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테사라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연결을 끊으려 했다.
에트리안은 또 그걸 막을 수는 없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연결이 끊어졌다.
에트리안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너무나 궁금했다.
아니, 불안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알바레즈와 에이든을 다시 만나야겠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에트리안은 잠이 깬 김에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다.
그러다 날이 밝아올 무렵,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너무해요!”
제인이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반태수와 백진희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만 빼고 둘이서 뭐 했어요?”
그 말에 백진희가 당황했다.
뭐 저런 걸 묻는단 말인가. 민망하게 말이다. 저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나.
하지만 반태수는 생각이 달랐는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뻔한 질문을 왜 합니까?”
이렇게 역으로 치고 나올 줄은 몰랐는지 제인도 당황했다. 당연히 대답도 잘 하지 못했다.
잠시 버벅거리던 제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만 빼고 술이라도 마시러 갔나…… 해서 그렇죠. 따돌림은 나쁜 거잖아요."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관심이 있던 분야는 술이 아니라 다른 거 같은데?”
“아니……."
제인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하자, 반태수는 얼른 커피부터 준비했다.
이럴 때 분위기를 푸는 데는 커피가 최고다.
"자, 일단 커피부터 한 잔씩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자, 분위기가 대번에 편안해졌다.
그때, 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제인은 입에 머금은 커피를 마신 다음 충분히 맛과 향을 음미하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어, 패트릭?”
패트릭에게서 온 전화였다.
제인은 잠시 전화기를 들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끊었다.
그리고 반태수를 보며 말했다.
"어제 말한 대로 다 끝났다는데요?”
제인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패트릭에게서 온 주소가 있었다.
“여기로 오면 된대요.”
반태수는 남은 커피를 입에 다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다.
***
알바레즈와 에이든은 초조한 표정으로 연구실 안을 서성였다.
두 사람은 어젯밤 한 숨도 못 자고 여기서 대기했다.
백진희를 납치하러 간 자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벌써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한데 아무 흔적도 없다고 한다.
싸운 흔적은 고사하고 핏방울 하나 안 보인단다.
그것만 보면 거기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당시 백진희를 덮치기 직전 작전을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분명히 그때 백진희는 혼자였다고 했다.
위치도 틀림없이 거기다.
당연히 싸웠을 것이고 흔적이 무지막지하게 남았어야 한다.
백진희를 치기 위해 움직인 자들은 열다섯 명의 무장한 능력자와 기공술사인 테사라였다.
열다섯 명이 각자 총을 한 발씩만 쐈어도 총탄이 튄 흔적이 잔뜩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금속 성유를 꽈서 만든 거대한 그물까지 가져갔다.
그걸 던졌으면 당연히 흔적이 크게 남았어야 한다.
그리고 기공술사인 테사라는 또 어떠한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금이 쩍쩍 갔을 것이다.
테스트 과정에서 테사라가 얼마나 대단한지 분명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무 흔적도 없다니.
심지어 백진희는 멀쩡히 출근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박살 난 거야. 포션 쪽에서 뒷정리까지 다 한 거지.”
"그렇게 말끔히? 그게 가능해? 고작 하룻밤 만에?”
"그거야 모르지. 우리가 거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젠장. 에트리안은 뭐래?”
"연락을 안 받아.”
"뭐? 그건 아니지. 성공했든 실패했든 연락은 해줘야 할 거 아냐. 테사라는?”
“그쪽은 아예 연락처도 모른다. 전부 에트리안을 통해서 소통했잖아.”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그렇게 에트리안에 대해 성토하고 있을 때, 갑자기 두 사람 위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어어!”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천장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둥둥 떠 있었으니까.
그 열다섯 명은 이번 작전에 투입한 능력자들이었다.
천장에 떠 있던 열다섯 명이 그대로 떨어졌다.
후두두두둑!
"크어억!”
알바레즈와 에이든은 자신들의 위로 쏟아진 기절한 사내들에게 깔려 버둥거렸다.
전투복까지 입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겠는가. 그런 사람 열다섯이 우르르 쏟아졌으니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이, 이게 뭐야!”
알바레즈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 그곳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일어나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내려다봤다.
"이 사람들…… 우리가 보낸 자들인데?”
"맞아. 어디로 갔나 했더니……."
두 사람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 사람들이 왜 이 연구실 천장에 갑자기 나타나 쏟아졌단 말인가.
누군가가 그렇게 한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천장에 이들을 감춰두고 필요할 때 모습이 드러나게 조치를 한 것이다.
그게 누굴까? 뻔하지 않나. 백진희와 관계된 자, 포션의 진짜 주인, 반태수가 분명하다.
"에트리안한테 아직도 연락 안 돼?”
알바레즈의 물음에 에이든이 전화를 걸며 대답했다.
"다시 해볼게.”
신호가 몇 차례 가고 드디어 에트리안이 전화를 받았다.
“에트리안! 이제야 연락이 되는군요!”
- 미안합니다.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늦잠을 잤습니다. 아, 그리고 작전을 실패했습니다. 테사라가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하다더군요.
"그럼 이제 어쩝니까?”
-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요. 저도 이렇게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문의 지원을 받기로 했으니 조만간 다시 판을 짜야죠.
"에트리안의 가문이 직접 나서는 겁니까?”
- 가문이 직접 나선다기보다는 좀 더 양질의 인재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에이든은 얼른 대꾸하지 못했다.
왠지 좀 불안했다.
테사라도 어쩌지 못한 강자라지 않나. 그걸 또 다른 기공술사가 나선다고 해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 왜 그러십니까? 우리 가문이 못미더우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테사라가 어떤 식으로 패배했는지 확실히 전달했으니까요. 아마 적절한 인재를 보내줄 겁니다. 여러 명이 올 수도 있고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최대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싸우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잘 될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예. 말씀을 듣고 나니 든든합니다.”
- 그럼 이쪽의 준비가 마무리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에트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알바레즈는 에이든의 전화기에 귀를 바짝 대고 소리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떨떠름했다.
"이거…… 괜찮겠지?”
"괜찮아야지.”
이미 여기까지 온 거 어쩌겠나. 믿고 기다려야지. 그리고 최대한 도와야지.
“그나저나 이 사람들 좀 어떻게 해봐. 보아하니 많이 다친 거 같은데?”
“포션을 써야지, 뭐. 아깝지만 어쩔 수 있나. 그냥 다 죽이기엔 좀 아까운 인재들이잖아.”
비록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왔지만, 그래도 이런 능력자들을 다시 찾으려면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있는 능력자들을 잘 다독이고 치료해가며 쓰는 게 낫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직원들에게 연락을 해서 포션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열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포션을 먹였고,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데 하나같이 눈이 흐리멍덩했다. 말도 어눌했고, 뭔가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에이든과 알바레즈도 그제야 이상을 눈치챘다.
함께 있던 직원들도 다들 당황했다.
그들은 포션의 기적 같은 효능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저들에게 쓴 포션은 무려 중급 포션이었다.
내상이건 외상이건 싹 치료할 수 있었다. 물론 치료 효과가 상급 포션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아까 그들의 상태를 봤을 때, 중급 포션이면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거라 믿었다.
한데 저렇게 된 것이다.
알바레즈와 에이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슬슬 후회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터무니없는 자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 모든 광경을 왜곡에 감겨 허공에 뜬 채 지켜보고 있던 반태수는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에트리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