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 패트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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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은 국장과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국장이 원해서 한 거였다.
국장은 끝까지 패트릭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당연했다. 국장이 생각하기에 특수이능관리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가 바로 패트릭이었으니까.
국장은 지금 패트릭의 가문이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게 아닐까, 의심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문이 일을 벌이기 위해 손잡은 곳이 바로 포션이고 말이다.
얼마 전 패트릭의 친척인 제인도 회사를 나가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쪽은 여기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괜한 일을 벌여서 제인의 신병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피아까지 동원했다는데, 만일 그 정보가 제인의 귀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 악화될 건 뻔한 일이다.
국장이 앞에 앉은 패트릭을 슬쩍 바라봤다.
패트릭이 나서면 그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같은 가문 사람이다. 그러니 결국은 패트릭이 정보를 뽑아 넘겨주지 않겠는가.
아마 그렇게 되면 제인과 회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국장은 패트릭만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인과 패트릭이 나가면, 그 가문에서 남은 기공술사는 한 명뿐이다. 그 한 명은 정부기관에서 일하지 않지만, 아마 조만간 포션에서 데려가지 않겠는가.
"패트릭, 포션이 뭘 얼마나 해주겠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건 돈밖에 없지 않나? 자네가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말해봐. 내가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테니까.”
패트릭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자신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미 반태수에게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점이었다.
"난감하군요. 국장님께서 원하시는 건 없습니까? 조건을 한 번 맞춰보는 게 어떻습니까?”
국장의 눈이 한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가 가라앉았다.
"난 자네가 계속 우리 일을 맡아줬으면 하는데, 그건 선택지에 없지 않나.”
패트릭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무한루프처럼 국장과 자신의 말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때, 패트릭의 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문자를 확인한 패트릭의 눈이 커다래졌다.
패트릭이 고개를 번쩍 들고 국장을 바라봤다.
국장은 갑자기 달라진 패트릭의 분위기에 뭔가 일이 생겼구나 하는 심정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반태수 씨가 이리로 온답니다.”
국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위치까지 알려준 건가? 이거 실망이군.”
"알려주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여긴 공개된 장소인데.”
"그래도 반태수라는 자가 원래부터 여길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진짜 반태수에게 특수이능관리국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한 적이 없으니까.
회사의 위치도 당연히 말해준 적 없다.
방금도 반태수의 문자에는 특수이능관리국으로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뭐지? 내 위치 정도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위치추적기?’
위치추적기 생각을 하던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특수이능관리국에 들어오려면 여러 차례 검색대를 지나야 한다. 위치추적기 같은 건 아예 차를 타고 주차장에 들어가는 순간 걸리게 되어 있었다.
패트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특수이능관리국으로 찾아오겠다는 얘긴가?
그때, 국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국장은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봤다.
누가 여기에 오려면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그 절차 중에는 자신에게 누가 왔다고 보고를 하고 만날지 말지 정하는 과정이 있었다.
한데 저렇게 다짜고짜 문을 연다고?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반태수였다.
패트릭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대체 자신이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설마 진짜 위치추적기라도 붙인 건가? 검색에 걸리지 않는 위치추적기가 따로 있는 건가?
솔직히 반태수가 그런 게 있다고 말하면 그냥 수긍할 것 같다. 그만큼 믿기지 않는 능력을 연달아 보여주고 있으니까.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내가 사람 찾아내는 건 아마 세계 제일일 겁니다.”
반태수가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었다.
패트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 잡음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여기에 오려면 피할 수 없는 장벽이 여러 개 있는데, 그건 어떻게 뚫은 겁니까?”
반태수가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아무도 안 막던데요?”
심지어 이 방 밖은 국장의 비서들이 업무를 보는 비서실이 이어져 있다.
즉, 비서들 앞을 지나와야 하는데, 비서들조차 반태수가 여기 온 걸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패트릭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솔직히 그동안 반태수가 보여준 다른 일들이 훨씬 더 놀라웠으니까.
하지만 국장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특수이능관리국의 보안 체계에 구멍이 뚫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똑바로 말해주시오. 어떻게 여기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었는지.”
국장은 살짝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반태수는 국장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태도를 취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소파의 남은 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국장이 불쾌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밝히면, 나중에 또 같은 일을 해야 할 때 불편해질 텐데, 굳이 그 얘기를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반태수의 말에 국장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건 나중에 CCTV를 돌려보거나 해서 확인하면 된다. 지금 따져봐야 말해줄 리 없는 게 맞다.
그리고 흥분을 가라앉히니 섬뜩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여기에 올 수 있다는 뜻 아닌가.
"후우우. 용건이 뭐요?”
"패트릭 때문에 왔습니다.”
그 말에 국장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당신이 패트릭을 들쑤셔서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아시오? 이렇게 우릴 건드리고도 당신이 편안하게 포션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럼 안 팔면 됩니다. 내일부터 팔지 말까요?”
"뭐라고?”
"특수이능국에서 판매를 금지했는데 함부로 팔면 안 되죠. 뭐, 내일쯤 최상급 포션 경매를 할 예정이었는데, 아쉽긴 하네요. 원하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것 같던데.”
국장이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이렇게 쉽게 포션 판매를 포기한다고?
그는 반태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언제 판매를 금지한다고 했소!”
"내가 잘못 들었나? 패트릭,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확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습니다.”
국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려 패트릭을 바라봤다.
"패트릭,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그게 어딜 봐서 그런 내용인가?”
"제 능력 잘 아시잖습니까. 분명히 그런 의도로 말했습니다.”
국장은 할 말이 없었다. 맞다. 그런 의도로 말하긴 했다. 잠깐 앞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패트릭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능력을 쓸 줄 몰랐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전 물어보기에 대답한 것뿐입니다. 비교적 중심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국장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국장은 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그냥 패트릭에게서 시선을 떼고 반태수를 바라봤다.
"내가 실언을 했소. 그러니 포션 판매를 중지하지 말아 주시오. 미안하오. 내 이렇게 사과하겠소.”
만일 정말로 포션을 판매하지 않고 그 모든 이유를 특수이능관리국에 갖다 붙인다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다.
사실 특수이능관리국에서도 꾸준히 포션을 구매하고 있다. 한데 갑자기 포션 판매를 중지하면 이쪽도 타격이 있다.
그냥 겁을 주려고 한 말일 뿐이다. 한데 말을 하고 나서 알았다.
‘반태수 저놈은 포션 판매 자체에 아무 미련도 없어.’
블러핑일 가능성도 있지만, 국장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에는 자신 있었다. 그러니 특수이능관리국을 별다른 잡음 없이 이끌었던 것이고.
그런 국장이 보기에 반태수가 방금 한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국장이 정중히 사과하자, 반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죠. 모든 일정은 원래대로 진행될 겁니다.”
국장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한데 정말로 내일 최상급 포션의 경매를 진행하는 거요?”
"맞습니다. 열 개를 한 묶음으로 해서 진행할 모양이더군요.”
국장의 눈이 번득였다.
무려 열 개를 한꺼번에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런 정보를 하루 일찍 알았는데 손 놓고 있으면 국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국장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경매로 한다니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서 유력 경쟁자가 경매에 참여하지 못하게 공작을 펼쳐야 한다.
그런 계획을 세우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렇게 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국장은 상념을 떨쳐내고 반태수에게 집중했다. 지금은 패트릭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아무튼 패트릭을 그냥 내줄 수는 없소. 난 최선을 다해서 패트릭을 우리 특수이능관리국에 붙잡아 둘 거요.”
국장의 말에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요?”
국장이 어금니를 꽉 물고 반태수를 노려봤다.
반태수는 그런 국장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붙잡아둘 겁니까? 강제로? 그건 불법일 텐데? 아니면 제닉스에 있는 알바레즈처럼 그만둔 거 아니라고 우기면서 납치라도 할 겁니까? 그건 더 불법일 텐데?”
국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패트릭이 나섰다.
"가끔 고문 역할을 하겠습니다. 자주는 못하지만 필요할 때 연락 주시면 조언이나 도움을 드리죠.”
패트릭은 그렇게 말하고 반태수를 바라봤다. 이건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반태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반태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뭐. 하지만 정말 가끔만 해야 합니다. 주가 어디인지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패트릭은 감사한 표정으로 반태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국장을 바라봤다.
국장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솔직히 여기까지 지켜낸 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하다. 아예 특수이능관리국과 패트릭이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장기 임무는 맡길 수 없다는 점과, 아무 일이나 패트릭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
반면 패트릭의 표정은 밝았다.
사실 국장과의 사이가 제법 좋은 편이었기에 이렇게 그냥 나가려고 하니 마음이 좀 안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했으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패트릭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이 당황하며 물었다.
"뭐야, 설마 지금 당장 관두는 거야?”
"굳이 시간 끌 이유 없잖습니까.”
패트릭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반태수를 바라봤다.
"전 바로 포션으로 가보겠습니다.”
"같이 가죠. 차도 안 가져왔는데.”
반태수도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방에서 나가자, 국장은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방금 있었던 대화를 다시 곱씹었다.
"뭔가…… 홀린 거 같은 기분이야.”
자신이 굳이 그렇게 대응해야 했을까? 더 좋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 분명히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왠지 너무 쉽게 모든 걸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이미 다 끝났는데.
국장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앞으로 패트릭 없이 일을 어떻게 하나……."
국장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그동안 패트릭에게 너무 많이 기대긴 했다. 일을 잘 하고 능력이 출중하니 어쩔 수 없었다.
"가만, 그러면 결국 포션으로 패트릭과 제인이 갔네? 그럼 그 가문에는 이제 한 명 남았는데…… 과연 어쩌려나 모르겠군."
그 한 명은 특수이능관리국이나 CIA를 비롯한 모든 정부 기관에서 탐을 냈지만, 끝끝내 거절을 했다.
국장은 잠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대로 일을 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
제닉스와 12연합과의 싸움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포션 제조 장비를 빼앗고 지키는 걸 반복했는데, 차츰 싸움의 범위가 넓어졌다.
처음 몇 번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자꾸 정보가 들어와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비를 어디 보관했는지 뻔히 아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몇 번 뺏고 빼앗기고 하다 보니 슬슬 감정이 크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걸리기도 했고.
자존심과 감정이 걸리면 뭐든 일이 커지기 마련이다.
싸움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정말 격렬한 전투도 여러 번 일어났다.
처음에는 양측이 아주 팽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닉스가 밀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닉스 혼자서 12개나 되는 조직을 상대하는 건 굉장히 버거운 일이었다.
그게 반전된 건, 제닉스 테크놀로지가 파이안 제약을 끌어들이면서부터였다.
파이안 제약은 제닉스 테크놀로지와 포탈을 공유하는 관계였다.
그들은 제약회사답게 포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포션 제조 장비를 공유하기로 하고 제닉스 테크놀로지와 손을 잡았다.
제닉스 입장에서도 장비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파이안 제약과 힘을 합치면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 까 기대했다.
물론 이 상황이 다 마무리 되면 백진희를 데려오겠다는 계획은 아직 버리지 않았다.
아무튼 그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제닉스 테크놀로지와 파이안 제약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12연합은 패배 후 조각조각 흩어져 각 조직의 존망을 위협받아야 했다.
아마 앞으로는 쭉 내리막길이 이어지리라.
아무튼 그 이후, 제닉스 테크놀로지와 파이안 제약의 최고 연구원들이 모여서 포션 제작 장비를 이용해 포션 제작을 시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두 기업의 시선이 슬그머니 다시 백진희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