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고대인 >
====================
"예? 여기서 지낸다고요? 아직 그쪽 회사 일도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백진희의 표정은 어딘가 당황스러웠다.
제인은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그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스의 허락도 받았어요. 제가 요즘 제일 관심 있는 분야가 바로 우리 보스거든요. 사소한 거 하나 놓치지 않고 다 관찰할 거예요."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보스인데.”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백진희에게 귓속말을 했다.
"제 예상인데, 우리 보스, 아무래도 외계인이거나 전설의 고대인이 분명해요. 본인도 못 깨닫고 있지만 아마 틀림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 증거를 잡아야죠.”
백진희는 제인의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외계인? 전설의 고대인?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외계인은 너무 나간 거 아닌가요?”
"에이, 무리 보스가 하는 일을 보면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저 단순한 기공술사가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진희는 묘하게 제인의 말에 설득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게 아니다. 반태수가 외계인이건 고대인이건, 그딴 건 중요치 않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제인이 여기서 머물게 되었다는 점이다.
백진희는 바로 선언했다.
"나도 오늘부터 여기서 머물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기존 숙소는 위험해서요.”
제인이 그 말에 손뼉을 짝 쳤다.
“정말요? 잘 됐네요. 앞으로 우리 여기서 잘 지내봐요. 솔직히 우리 보스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잖아요? 혼자서 여기 있으면 아마 심심할 거예요. 그러니 같이 재미있게 지내요.”
과연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까?
백진희는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요. 같이 잘 지내요. 그나저나 저도 허락을 받아야겠네요.”
오늘 여기 온 건 그저 잠만 자고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기 전에 할 일이 좀 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했다.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태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반태수는 이 객실에 있는 여러 방 중에서 가장 큰 방을 사용 중이었다.
그 방의 침대가 가장 컸고, 백진희도 항상 여기서 밤을 보낼 때는 그 방을 썼다.
방 안에 화장실 겸 샤워실이 또 있는 구조였기에 함께 밤을 보내기 가장 좋기도 했다.
백진희는 노크를 하고 반태수의 대답이 들려오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제인이 졸졸 쫓아갔다.
반태수는 침대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냥 쉬는 것 같지만 사실 머릿속으로 각종 연구와 분석을 병행하는 중이었다.
그 중 상당 부분이 마력회로에 할당되어 있었고.
백진희는 반태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태수 씨, 저……."
반태수는 백진희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대답부터 했다.
"진희 씨도 들어오세요. 다 같이 살죠, 뭐.”
백진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밖에서 우리가 하는 얘기 다 들으셨어요?”
"못 듣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들이 크시던데.”
백진희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전 가서 짐 좀 대충 챙겨올게요.”
반태수가 침대를 나서며 말했다.
"같이 가요. 아직 밥도 안 먹었죠? 같이 밥 먹고 가서 짐 챙겨오죠."
백진희가 눈을 반짝였다.
"저야 너무 좋은데……."
그때 제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같이 가요! 저도 밥 아직 안 먹었어요. 그리고 짐 나르는 거 돕고 싶어요!”
반태수가 흥분한 제인을 보며 말했다.
"지금 밖에 나가면 경호팀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요?”
순간, 제인이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경호팀을 만나는 거야 안 무섭다. 그냥 도망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도망치면 반태수, 백진희와는 함께 할 수 없다. 자신만 다른 곳으로 갔다가 나중에 합류해야 할 테니까.
반태수가 못을 박듯 말을 이었다.
"밥은 룸서비스로 해결하세요. 우린 얼른 다녀올 테니까.”
제인이 머리를 쥐어짜내서 생각한 답을 내밀었다.
"저, 저도 짐이 하나도 없어요!”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적당히 사올게요. 따로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보내시고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백진희와 함께 객실을 나섰다.
제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닿지 않았다.
***
반태수와 백진희는 호텔을 나서서 백진희의 아파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밥은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적당한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백진희는 걸어가면서 연신 반태수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폈다.
"제인, 예쁘죠?”
반태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기공술사니까 안 예쁘기도 힘들죠.”
어쨌든 마력회로도 마력을 몸에 품는 일이다. 마력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
더구나 마력회로는 육체에 미치는 마력의 영향이 더 크다.
마력회로를 돌리다보면 꾸준히 마력이 늘어나는데, 그게 어디서 오겠는가.
주변 마력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체가 마력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모든 육체에 균일하게 작용한다.
제인도 그렇고 패트릭도 그렇고 비교적 어린 시절에 기공술사가 되었다.
오랫동안 마력의 영향을 받은 만큼, 외모도 남달랐다.
백진희는 조심스럽게 반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어요?”
"왜요? 내가 기분 상할 정도로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백진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같이 지내자고 해서 난감하진 않으셨나 해서요.”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예열한 겁니다. 갑자기 그런 건 제인이고.”
백진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잠깐 겪었지만, 제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우리가 한 대화 다 들으셨다고 했죠?”
"그랬죠.”
"괜찮으세요?”
반태수가 또 피식 웃었다.
"날 관찰한다고 한 거요? 뭐, 안 괜찮을 것도 없죠.”
"전설의 고대인은 또 뭐예요?”
"나중에 보여줄게요. 제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도 할 겸.”
백진희의 눈에 살짝 놀람이 어렸다.
그럼 전설의 고대인이라는 게 진짜 존재한다는 뜻인가?
"그게 진짜 있는 거라고요?”
"일단 밥부터 먹죠.”
어느새 두 사람은 먹기로 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걸음을 서둘러 백진희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백진희는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어차피 또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사면 된다.
그리고 호텔에서 지내니 따로 필요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짐은 백진희의 차에 실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쇼핑몰로 가서 제인이 사다 달라고 한 것들을 구입했다.
대부분 옷이나 속옷 같은 것들이었다.
백진희와 반태수도 이왕 쇼핑몰에 온 김에 옷이나 엑세서리 같은 것들을 구입했다.
쇼핑은 아주 짧았고, 두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운전은 백진희가 했다.
"우리 정말 서둘렀네요. 시간이 이것밖에 안 됐어요.”
백진희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소에는 밥 먹고 산책만 해도 이보다는 더 오래 걸렸는데.”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백진희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이대로 호텔로 돌아가면 반태수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제인만 없다면.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다.
반태수와 백진희는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반태수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쳐다봤다.
남자 한 명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인의 경호팀 중 한 명이었다.
아무래도 제인이 이 호텔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감시 중인 모양이다.
그래도 지하주차장까지 감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인은 그동안 이동할 때마다 경호팀의 차를 이용했기에 차가 없다.
반태수는 피식 웃고는 마법을 펼쳤다.
이쪽을 주시하던 사내가 갑자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멍해졌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멍했던 사내가 정신을 차렸다.
"아우,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머리가 깨질 것 같네.”
머리만 아픈 게 아니라 최근의 기억도 사라졌다. 물론 사내는 그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
호텔로 올라갔더니 의외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패트릭이 찾아온 것이다.
제인이 계속 패트릭을 이리저리 말로 건드렸지만, 패트릭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반태수를 기다렸다.
반태수는 패트릭을 보며 살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뇨. 시간 나면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퇴근했고 잔업도 없습니다.”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온 겁니까?”
"네.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습니다.”
제인이 옆에서 첨언했다.
"진짜 재미없는 녀석이에요. 변변한 취미도 없다니까요?”
"취미가 없긴 왜 없어? 나한테 털린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건 취미가 아니라 범죄지.”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가 생긴 백진희가 슬쩍 끼어들었다.
"혹시 해킹이라도 한 건가요?”
패트릭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통찰력을 이용하기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해킹이죠.”
패트릭은 해킹을 통해 기업들의 내부 기밀을 열람하고, 그걸 토대로 통찰력을 발휘해 새로운 정보를 창출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에 관한 모든 건 결코 보고하지 않는다. 그건 근무가 아니라 취미활동이니까.
지금까지 해킹을 실패한 적도, 들킨 적도 없었다.
패트릭은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절 찾으신 이유,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반태수는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까 받은 파일을 태블릿에 옮겨두었다. 좀 더 큰 화면으로 보면 패트릭이 능력을 쓰기 좋을 수도 있으니까.
화질은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화면이 커진다고 해서 깨지거나 할 염려도 없었다.
반태수는 영상을 플레이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백진희와 패트릭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이게 뭔가요?”
백진희가 반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까 했던 얘기가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게 전설의 고대인?”
패트릭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영상의 출처를 짐작하고서 제인을 바라봤다.
"네가 찍은 거로군.”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거 진짜.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패트릭은 영상을 보고 특유의 인지 영역을 넘어서는 통찰력으로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거 굉장히 오래전의 영상인 것 같은데. 한…… 만 년 전쯤?”
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와우! 너 이 정도였어?”
패트릭이 대단하다는 건 안다. 그가 하는 말이 언제나 옳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르다.
이 영상을 본 것만으로 이것이 만 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다니.
패트릭은 반태수를 바라봤다.
"진위 확인을 위해 절 찾으신 건 아니실 테고…… 무엇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반태수는 멈춘 화면 속에서 벼락을 막 불러내고 있는 사내를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이 사람, 기공술사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패트릭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그 안에 담긴 호기심이 번쩍일 때마다 증폭되는 듯했다.
패트릭은 태블릿을 들고 신중하게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그의 마력회로가 과열될 정도로 맹렬히 작동했다. 그러면서 변형까지 일어났다.
능력의 위력이 급격히 증폭했다.
아무래도 쉽게 알아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패트릭은 그렇게 열 번쯤 다시 본 다음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반태수를 바라봤다.
패트릭의 눈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반태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이제 기공술사에 대한 비밀을 조금 엿본 듯했다.
기공술은 고대인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무려 1만 년의 간극이 있는데도 기공술이 전해졌다는 건…….'
마치 반태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패트릭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저 고대인의 후손들이 현대에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 전부가 저런 외모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 후손 역시 외모가 굉장히 뛰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두의 시선이 반태수에게 모였다.
"역시 전설의 고대인이었어.”
제인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백진희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트릭은 여전히 반태수에 대해서는 능력이 발휘되지 않아 좀 답답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쩌면 반태수 씨는 고대인의 후손일지도 모릅니다.”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대인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려면 그들만의 조직으로 강력하게 묶여 있어야 합니다. 결코 후손을 방치하지 않을 겁니다. 안 그러면 피가 지나치게 희석될 테니까요.”
다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가능성이 충분한 가정이었으니까.
"난 고아 출신입니다. 내가 후손이라면 그들이 과연 내가 고아로 자라게 내버려뒀을까요?”
제인이 얼른 끼어들었다.
"혹시 고대인으로 이루어진 가문 내에서 암투가 있었다거나……."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거기까지 가는 건 진짜 소설이고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고대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제인은 여전히 반태수가 전설의 고대인이라고 믿었다. 아마 한동안은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반태수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쳤다.
짝!
마력을 살짝 담았기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흥분이 가라앉았다.
"다들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좀 쉬죠. 피곤할 텐데.”
커피라는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태수가 커피를 준비하러 간 사이, 세 사람은 소리를 한껏 죽인 채 고대인과 반태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제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머지 두 사람도 조금씩 제인에게 동조해갔다.
반태수는 커피를 내리면서 그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