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 연구소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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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은 심각한 표정이었고, 사이먼은 통증이 있는지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제대로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통증이 심한가요? 그냥 회복실로 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여기서 봉합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가게 될 거예요.”
"괜찮습니다. 혹시 힘을 보태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 제가 여기 있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포션을 복용했으니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거 희석 포션이에요. 효과가 그리 좋지 않다고요.”
들어오는 포션의 대부분은 실험에 쓰일 약물의 재료로 쓰인다.
그리고 포션을 희석하는 것도 기술이다. 포션에 그저 물 좀 탄다고 희석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포션의 기능이 망가진다.
포션을 희석하는 연구도 이곳 연구 단지에서 이뤄진다.
그렇게 희석에 성공한 포션을 이번 수술에 써먹었다.
체내에 심었던 단백질이 새카맣게 타 버린 상태였다.
그걸 제거하고 봉합하는 과정에서 희석 포션을 써서 출혈도 막고, 세포의 괴사도 막았다.
만일 제대로 된 포션이었다면 미셸도 이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희석 포션이기 때문에 효과가 너무 약했다.
가벼운 외상에는 탁월한 효과를 보이지만, 상처가 조금만 깊어져도 효과가 급격히 떨어졌다.
미셸과 사이먼이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보안요원들이 급히 다가왔다.
미셸은 이곳 연구소의 책임자 중 한 명이었기에 그녀에게 상황 보고를 해야 한다.
"서버가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예? 그게 말이 되나요?”
보안요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 어쩌란 말인가.
"지하 3층에 있는 서버를 말하는 건가요? 그게 사라졌다고요?”
“예. 몽땅 사라졌습니다. 서버와 연결되었던 커넥터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빼돌렸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서버를 분해하지 않고는 엘리베이터에 싣지도 못한다.
실제로 서버를 설치할 때, 부품만 지하 3층으로 옮기고 거기서 직접 조립했다.
그러니 그걸 빼내려면 역순으로 해야 한다.
먼저 서버를 분해하고 옮기고.
문제는 이미 서버를 분해하기 시작한 순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버가 제 역할을 못할 테니까.
한데 그런 과정 없이 서버를 빼돌렸다.
물론 지금 비상이 걸린 건 서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CCTV는 확인해 보셨나요?”
"예. 한데 CCTV에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찍혔다고요?”
"예. 비상이 걸린 이후에도 CCTV 화면에는 서버가 원래대로 전부 있었습니다.”
"해킹에 당했군요. 흔적은요?”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상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서버를 빼돌렸다.
‘아니, 빼돌리지 못했을 수도 있어.’
어쩌면 서버를 그냥 없애 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서버를 제거한 흔적을 찾아보세요. 폭발은 아닌 것 같고, 특수한 약품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겠네요.”
어쩌면 이면세계에서 가져온 특수한 마도구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미셸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어쨌든 아무도 못 나가게 건물을 봉쇄했으니 도망치진 못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잡을 방법을 생각해보죠.”
"예.”
보안요원은 거기까지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내도 뾰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셸은 그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금방 끝나지는 않겠네요.”
"실험도 다 중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중지시켰어요. 그쪽에 투입했던 보안팀이 전부 범인 색출에 나설 거예요.”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좀 지나니 포션 효과가 나타나는지 몸 상태가 점점 좋아졌다.
"그나저나 사이먼,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나요?”
사이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미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체내에 심어 두었던 단백질 저장장치가 전부 새까맣게 타버렸어요. 상태를 보니 강한 전류를 이용한 것 같은데 그렇게 하려면 전극을 정확히 그 지점까지 꽂아야 해요.”
사이먼은 짚이는 일이 있었다. 자신이 기억을 잃었을 때, 그리고 여기로 오는 도중 사고가 난 줄 알고 차에서 내린 후, 정신을 잃었을 때.
"아무래도…… 누군가가 저를 스토킹 하는 것 같군요.”
"사이먼을 스토킹 한다고요?”
사이먼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미셸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든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사이먼이 그 스토커를 여기로 안내한 모양이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잡아야죠.”
놓치면 여러 모로 타격이 크다.
건물에 있던 모든 보안요원은 물론이고 연구원들까지 동원되어 샅샅이 뒤졌다.
범인이 어딘가에 있는 건 분명한데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못 찾는 건 당연했다. 반태수는 이미 건물을 벗어난 뒤였으니까.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왜곡으로 모습을 감춘 반태수를 찾아내지는 못했겠지만.
***
반태수는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
사방을 두꺼운 강철로 봉쇄했지만, 얼마든지 뚫을 수 있었다.
그냥 벽이나 창문 쪽을 뚫고 가면 금방 발견될 테니 되도록 늦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을 뚫었다.
그게 옥상이었다.
이 건물에서 옥상으로 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뚫린 구멍으로 나가야 한다.
강철로 봉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옥상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옥상에 출입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구멍을 뚫어놓긴 했지만, 거의 이용할 일이 없었다.
반태수는 그 구멍을 뚫고 옥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올라간 후에는 어설프게나마 다시 구멍을 봉합했고.
아마 웬만해서는 들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을 자세히 살펴볼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
옥상에는 난간도 없었다.
구조를 보니 건물을 봉쇄한 강철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곳 옥상에 차곡차곡 보관했다가 일이 있으면 바로 건물 외벽을 강철로 감싸 버리는 방식이었다.
‘돈으로 발랐네.’
이 구조를 만들고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해 분명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훌쩍 날아올랐다.
여긴 볼 것 다 보고 얻을 것 다 얻었으니 이제 연구 단지 내에 있는 다른 건물을 방문할 차례였다.
사이먼을 따라와서 얻는 것이 정말 많은 것 같아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확실히 기공술사에 관한 실험에서 반태수는 많은 것을 얻었다.
능력자를 기공술사로 만들 방법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으니까.
전투력만 따지면 확실히 기공술사가 능력자보다 강하다.
기공술사가 마력을 훨씬 효율적으로 쓰고, 마력으로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내는 속도도 더 빠르다.
하지만 마력회로에 정해져 있는 능력 외에는 쓰기가 어렵다.
마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은 능력자가 더 우위에 있다.
그리고 반태수는 이번에 실험을 지켜보면서 기공술사와 능력자가 양립할 가능성을 확인했다.
물론 그러려면 마력이 많아야 한다.
지구의 능력자들은 마력이 너무 적어서 차라리 기공술사가 되는 편이 낫다.
그게 더 마력을 모으기 편하고 훨씬 빠르게 강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면세계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지구에도 그게 가능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백진희다.
반태수는 백진희를 기공술사로 만드는 것도 제법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마력회로를 새겨주고, 그걸 활성화하는 것까지 해줄 수 있다.
이 경우 안전장치를 추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태수는 그런 재미난 생각을 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과연 무슨 연구를 하고 있으며, 어떤 비밀을 감춰뒀을까?
반태수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감이 더욱 짙어졌다.
***
연구 단지를 전부 돌아봤다.
규모가 상당했지만 막상 작정하고 돌아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이곳 연구 단지에서는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진행 중이었는데, 모든 것의 공통점이 바로 마력과 기공술이었다.
마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하고 있었다.
또한 기공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었다.
기공술 관련해서는 마력회로 자체를 연구해, 기공술을 개선하고자 했다.
반태수가 보기에는 저래서 과연 제대로 된 연구 결과가 나오긴 할까, 싶을 정도로 마구잡이였다.
제대로 된 이론적 기반이 없기에 연구 자체가 장님 문고리 만지듯 할 수밖에 없는 듯했다.
기공술 연구는 그렇지만 다른 연구는 그래도 제법 그럴듯했다.
물론 성과를 얻는 건 만만치 않겠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방향으로 연구 중이었다.
‘이쪽은 서버를 또 따로 쓰나보네.’
중심부 말고 나머지 연구 단지에서의 연구는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었다.
마치 저쪽과 이쪽이 아예 다른 세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었다.
반태수는 굳이 이곳의 서버는 털지 않았다. 생각보다 얻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이런 건 가져와봐야 아공간 낭비다.
반태수는 딱 거기까지만 했다.
할 건 다 했다. 중심부 쪽에 마킹도 몇 개 박아놨으니 나중에 추가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추가 정보가 가장 중요했다.
이 연구 단지가 거래하는 이면세계의 조직을 알아내야 하니까.
마킹을 통해 확인해보니 아직도 중심부, 봉쇄된 건물 안에서는 범인 색출이 한창이었다.
서버는 부순 걸로 판단한 모양이고.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저들 입장에서는 나름 합리적이리라.
‘아공간 유물은 아직 못 봤나?’
그렇다면 생각보다 이면세계와 아주 깊이 있는 거래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면세계에서 아공간 유물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쪽을 반태수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반태수는 하늘로 훌쩍 올라가 빠르게 연구 단지를 벗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서 새로 얻은 것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
반태수는 하늘을 날아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건너뛰었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을 먹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백진희가 퇴근할 시간이다.
반태수는 그냥 침대에 앉아 마력회로에 대해서 좀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동안 얻은 마력회로의 수는 제법 많았다.
그것만으로도 마력회로를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력회로는 체내에 일종의 마법진을 미리 구축해 놓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마력회로가 활성화되었을 때, 어떤 효능을 보이는지는 직접 테스트를 통해 알아갈 수밖에 없다.
당장은 말이다.
나중에 데이터가 쌓여 이론적 규칙을 세울 수 있다면, 두뇌 하나를 할당하는 것만으로 무수한 마력회로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설계하다보면 그 중에서 정말 쓸 만한 것들도 나올 테고.
반태수는 좀 더 집중해서 마력회로를 살피고 그것을 직접 자신의 몸에 적용해 보았다.
고도의 마력 컨트롤 능력과 코어를 가진 반태수에게 마력회로를 몸에 새겼다가 지우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태수의 뇌리에 마력회로에 대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
반태수가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 지났다.
그동안 반태수의 일과는 지극히 단순했다.
제닉스 테크놀로지와 정체불명의 연구소는 곳곳에 박아둔 마킹을 통해 상황만 살폈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 한, 두 곳을 굳이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뭔가 일을 벌이기도 애매했고.
그래서 그 두 곳은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사이먼은 그날 이후 굉장히 조용해졌다. 더 이상 백진희에게 찝쩍대지도 않고 성실히 테스트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사이먼에게 호위가 몇 명 붙었다.
사이먼이 정신을 잃거나 기억을 잃은 것이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여기고 대비한 것이다.
호위들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이먼의 주변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반태수가 사이먼에게 붙여 놓은 마킹을 통해 영역화를 펼쳐 호위하는 자들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아무튼 그러니 굳이 사이먼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더 뽑아먹을 것도 없고.
나중에 필요할 때가 오면, 호위들부터 잡아서 점혈로 족쳐 정보를 뽑아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접근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
그런 상황이니 시간이 붕 떴다.
오전에는 마력회로에 대한 분석과 테스트로 시간을 보냈는데, 언제까지 종일 호텔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포탈 찾기였다.
뉴욕 어딘가에 있을 포탈을 찾아다니기로 한 것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백진희가 퇴근하기 전까지 뉴욕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포탈을 스캔했다.
그러면서 돈을 벌기 위한 아이템을 고민했다.
포탈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포탈이 있는 장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금 말이다.
"누가 회사 하나 안 던져주려나. 딱 글락 그룹 정도면 좋은데.”
반태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자리를 이동해 다시 한 번 스캔했다.
우우웅!
기묘한 느낌이 반태수의 감각을 건드렸다.
포탈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