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제닉스 테크놀로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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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희는 정확한 시간에 퇴근했다.
평소에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한 시간 정도는 그날의 업무를 정리한다거나 내일 할 일을 준비했는데, 오늘은 다 내팽개치고 그냥 퇴근해 버렸다.
사실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좀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한 일이었다.
한데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백진희가 일찍 퇴근해 버리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앉아 있던 사이먼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까 백진희가 친구를 만난다고 할 때,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미행하기로.
그녀가 과연 어떤 친구를 만나는지, 아니, 진짜 친구를 만나기는 하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만일 진짜 친구를 만나는 거고, 친구가 백진희와 비슷할 정도로 미인이라면, 우연을 가장해서 만날 계획이기도 했다.
짝을 맞추긴 뭘 맞춘단 말인가. 둘 다 데리고 놀면 되지.
사이먼은 음흉하게 웃으며 재빨리 백진희의 뒤를 쫓아갔다.
서두르거나 조급해선 안 된다. 정말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미행을 해야 한다.
백진희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는 사이먼이 누구보다 잘 안다.
능력자랍시고 이면세계를 들락거리는 놈들을 사이먼도 제법 많이 알고 있다.
요즘은 이면세계로 갔다가 돌아올 방법이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 놈들이 많다.
그들을 사이먼이 두루두루 관리했다.
가끔 술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같이 클럽도 가서 여자도 좀 붙여주고.
어쨌든 그들은 나름 능력자였다.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 백 명이 달려들어도 백진희 한 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처음에는 기공술사인 줄 알았다.
한데 순수한 마력으로 힘을 내는 능력자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백진희의 힘도 힘이지만 감각은 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그러니 어설프게 미행하다간 들켜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뭐, 진짜 힘으로 하면 내가 이기긴 하겠지만.’
사이먼은 기공술사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공술사였다.
그러니 백진희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고 해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기공술사는 기공술을 쓴다.
지금처럼 말이다.
사이먼은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능력을 쓰는 중이었다.
이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벌써 백진희에게 들켰으리라.
아무튼 멀찍이 뒤떨어져서 백진희를 쫓아가다보니 그녀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호텔이 보인다. 아마 친구가 저기에 머무는 모양이었다.
백진희는 호텔 입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사이먼의 시선이 자동으로 호텔 입구로 향했다.
‘어? 남자?’
지금 호텔 입구에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굉장히 잘 생긴 동양 남자.
‘그러니까 한국에서 왔다는 친구가저 남자였어? 더럽게 잘 생겼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인종을 떠나서 외모가 정말 독보적이다.
아무래도 그냥 단순한 친구가 아닌 것 같다. 백진희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거, 기분 더럽네.’
그래도 백진희가 있는데 나설 수는 없다.
계속 따라다니다가 적절한 기회를 확보해야한다.
사이먼은 능력을 이용해 지금보다 더 기척을 죽였다.
***
“오래 기다렸어요? 연락하면 나오지 그랬어요.”
“방금 나왔습니다. 시간 딱 맞춰서요.”
백진희가 묘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제가 언제 올 줄 알고요.”
반태수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당연히 언제 올지 다 알고 있다. 백진희에게 마킹을 붙여뒀으니까.
그리고 백진희를 쫓아온 걸로 보이는 저 기공술사의 몸에도 마킹이 붙어 있다.
저 기공술사뿐 아니라 아까 제닉스 테크놀로지에서 봤던 다른 기공술사들에게도 마킹을 붙여뒀다.
"자, 그럼 밥부터 먹고 시작할까요?”
"그러죠.”
오늘 백진희가 반태수의 관광을 도와주기로 했다. 사실 대단한 곳을 가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뉴욕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태수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제닉스 테크놀로지에서 셰딤과 연결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마 능력자로 이루어진 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일은 낮에만 해도 충분하다.
그러니 저녁 이후에는 백진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마력도 섞고 그럴 계획이었다.
백진희와 마력을 섞는 건 이면세계에서 마력을 섞는 것보다 효율이 훨씬 뛰어났다.
아무래도 비슷한 성질의 마력을 섞어서 시너지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백진희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작 어제 하루 마력을 섞었을 뿐인데, 그녀가 가진 마력량이 늘어났다.
물론 백진희는 자신의 마력이 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늘어난 양이 극히 적었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마력의 질도 좋아졌고, 마력 컨트롤 능력도 미약하지만 상승했다.
아마 조만간 백진희도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밥을 먹고 곳곳을 돌아다녔다.
뉴욕의 밤거리는 제법 괜찮았다. 특히 백진희의 안내로 가는 곳은 대부분 반태수의 마음에도 들었다.
가볍게 술까지 한 잔 한 다음, 두 사람은 다시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사이먼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사이먼은 두 사람이 호텔로 같이 들어가는 광경을 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나한테는 그렇게 철벽을 치고서 저렇게 쉽게 호텔로 따라간다고?”
사이먼은 혹시나 해서 호텔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물러났다.
분노와 짜증이 확 밀려왔다.
원래 백진희와 헤어지고 나면, 반태수를 쫓아가 인적 없는 곳에서 뭐라도 시도할 계획이었다.
한데 저렇게 둘이 같이 호텔로 들어가 버리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계획대로 일이 안 풀리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사이먼은 호텔에서 나와 잠시 서서 호텔 입구를 노려봤다.
오늘은 텄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이 안 되면 내일, 내일이 안 되면 모레에 또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호텔 입구에서 낯익은 사람이 나왔다.
사이먼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까 그놈인데?’
반태수가 나온 것이다.
사이먼은 얼른 능력을 써서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슬그머니 숨었다.
‘뭐지? 왜 혼자 나온 거지?’
사이먼은 의아했지만 굳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유가 뭐든 무슨 상관인가. 저렇게 호텔에서 혼자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지.
사라진 줄 알았던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사이먼은 반태수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까지 조심하지는 않았다. 아까야 백진희가 있으니 조심했던 거고, 저런 일반인이 자신이 뒤쫓는다는 걸 어찌 알겠는가.
사이먼은 기분이 좋아서 하마터면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뻔했다.
아직 인적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방심하면 안 된다.
사이먼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좀 더 조심해서 반태수를 쫓아갔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보아하니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왔던 길을 다시 가기도 하는 걸로 봐서는 진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느낌이 강했다.
사실 반태수는 인적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오늘 백진희와 함께 하는 내내 자신을 쫓아오던 사이먼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지 않나.
인적 없는 곳에 가면 사이먼이 먼저 마각을 드러낼 테고, 그럼 가볍게 제압해서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죽일지 말지는 그때 가서 고민해보고.
영역화를 넓게 펼쳐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이동했는데,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니 정말로 인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에 들어섰다.
낡은 건물들이 쭉 늘어선 곳이었는데, 대부분 빈 건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창고들만 있고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장소가 나타났다.
그때 사이먼이 나섰다.
"어이, 거기!”
반태수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사이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음산한 데는 왜 온 거야? 너 뭐 구린 짓 하려고 그러는 거지?”
반태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구린 짓은 그쪽이 하려는 거 아닌가?”
사이먼이 씨익 웃었다.
"뭐야, 눈치챘어? 생각보다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인데?”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보는 눈이 좋긴 하지. 그나저나 무슨 구린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날 쫓아온 거지?"
사이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내가 너 쫓아가고 있다는 거, 설마 알고 있었어?”
"그렇게 티를 팍팍 내면서 쫓아오는데 어떻게 몰라?”
"티가 났다고? 그럴 리가.”
사이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까 방심했던 일이 떠올라 기분이 더 나빠졌다.
어쩌면 그때 들켰을지도 모른다.
‘저거 감이 좋은 놈인가?’
하지만 기공술을 써서 감춘 기척을 그저 감이 좋다고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하긴, 기척을 죽인다고 투명인간이 되는 건 아니니까.’
문득, 아까 회사에 잠입했던 투명인간이 떠올랐다.
탐욕이 들끓었다. 만일 그 투명인간을 잡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기공술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갈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놈은 반드시 또 온다. 그때는 무조건 잡아야 돼.’
사이먼은 그렇게 딴생각을 하면서 반태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죽이지는 않을게. 너무 걱정 마. 그저 팔다리 좀 부러지고 얼굴에 흠집 좀 내고 끝내줄게.”
사이먼이 선심이라도 쓰듯 그렇게 말했다.
겁먹으라고 한 말인데, 당연히 반태수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난 죽일 건데. 아니면 아무 생각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줄까? 원하는 걸로 선택해. 내가 그 정도 편의는 봐줄 수 있으니까.”
사이먼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하. 너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설마 총이라도 갖고 온 거야?”
사이먼은 피식 웃었다. 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얼마든지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총을 꺼내기도 전에 끝내버릴 수도 있었다.
사이먼의 마력회로 일부가 활성화되었다.
그렇게 활성화된 마력회로에서 쏟아진 마력이 사이먼의 다리로 향했다.
사이먼이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반태수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태수 앞에 나타난 사이먼이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마력회로 일부가 활성화되었고, 사이먼의 주먹에 새파란 마력이 맺혔다.
꽈르릉!
사이먼의 주먹에서 새파란 섬광이 번득였다.
반태수가 있던 곳을 푸른 불꽃이 휩쓸고 지나갔다.
사이먼의 눈이 커다래졌다. 불꽃이 휩쓸기 전에 갑자기 반태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크헥!”
숨을 잘 못 쉬겠다.
사이먼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반태수가 그걸 보고 손바닥으로 등을 한 대 때렸다.
쩌억!
“크허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였다. 사이먼은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젠장. 어떻게 움직였는지 하나도 못 봤어. 이놈도 기공술사였나?’
사이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력으로 마력회로를 돌렸다.
전체 마력회로가 활성화되면서 사이먼의 기척이 확 사라졌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 정도였다.
그게 심해지자, 존재감도 흩어져갔다.
사이먼은 그렇게 되고 나서야 움직였다.
일단 바닥을 구르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고,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데 그렇게 자신한 순간, 온몸에서 격통이 일어났다.
그리고 의식이 훅 하고 날아가 버렸다.
"와, 마지막 건 좀 놀랐는데?”
반태수는 쓰러진 사이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존재감을 지울 때는 좀 놀랐다.
마킹을 해두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위치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기공술이라는 건 연구할 가치가 있었다.
어느 정도 마법과도 닿아 있는 듯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놈을 어떻게 처리하지?”
그냥 죽여 버릴까 하다가 그냥 정신을 좀 건드리기로 했다.
사이먼이 죽으면 주변을 조사하게 될 텐데, 그 여파가 아마 반태수에게까지 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미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귀찮을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게 낫다.
반태수는 마력을 뽑아 사이먼의 두뇌를 섬세하게 조작했다.
일단 기억부터 날렸다.
정밀하게 기억을 조작할 수는 없지만, 대충 최근의 기억을 지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두뇌에 약간의 손상이 갈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 신경 써줄 의리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서로 죽고 죽이려는 관계인데.
반태수는 딱 거기까지만 했다.
사이먼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많은 기공술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다. 뽑아먹을 것을 다 뽑아먹기 전에는 최대한 몸이 상하지 않게 해줘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치료를 해줄 생각은 없지만.
반태수는 왜곡으로 모습을 감춘 다음, 짜릿한 전기 충격을 줘서 사이먼의 정신을 일깨웠다.
“끄으으!"
신음과 함께 사이먼이 깨어났다.
사이먼은 머리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사이먼은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사고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장소였다.
자신은 결코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대체 자신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집에 가야겠어.”
온몸이 욱신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기공술사다. 누군가를 때리면 때렸지 맞을 일은 없다.
사이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 거지같은 장소를 빠져나가야겠다.
반태수는 열심히 걸어가는 사이먼을 잠시 지켜보다가 훌쩍 날아 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