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 미국으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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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와 백진희는 호텔 근처 커피숍에 마주앉았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죠? 그동안 진짜 보고 싶었는데.”
백진희의 말에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그동안 많이 바빴습니다. 안 그래도 최근 진희 씨 생각이 났었는데, 마침 연락이 와서 반가웠습니다.”
"정말요? 우리, 뭔가 통했네요.”
솔직히 그건 아니었지만, 뭔가 인연이 있는 건 맞다. 이렇게 마침 미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백진희도 미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많이 달라지셨네요.”
"예? 달라져요? 제가요? 전 그대로인데?
"일단…… 외모가 달라졌잖습니까.”
백진희가 빙긋 웃었다.
"제가 예전보다 좀 더 예뻐지긴 했죠?”
예전에도 백진희는 상당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한데 지금은 그때보터 더 예뻐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마력일 것이다.
지금 그녀의 몸에 깃든 마력의 양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녀가 이면세계에 갔을 때 보유했던 양에 육박했다.
지구에서 이 정도 마력량을 가진 능력자가 과연 또 있을까?
단순 마력량만 따지면 얼마 전에 만났던 기공술사인 유정섭보다 더 많았다.
백진희의 재능이 굉장하긴 했다. 하지만 이면세계를 들락거리면서 얻은 부작용을 넘어서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봤는데, 고작 그사이에 그걸 넘은 모양이다.
그녀의 재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그런데 반태수씨도…… 예전보다 훨씬 멋있어졌네요.”
백진희는 잠시 반태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나저나 미국에는 웬일이세요? 혹시 그 카페, 미국 진출하는 건가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거기 커피, 진짜 맛있었는데.”
"미국 진출 아닙니다. 그냥 겸사겸사 왔어요. 관광도 할 겸, 또 알아볼 것도 좀 있고.”
"아…… 아쉽네요. 아니지, 혹시 미국진출 해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반태수는 살짝 말을 돌렸다.
"진희 씨는 언제 미국에 오셨습니까?”
“좀 됐어요. 한…… 세 달쯤?”
“생각보다 오래됐네요.”
“네. 기존에 다니던 회사에 좀 변화가 있었어요.”
잠시 망설이던 백진희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밀려났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둬 버렸죠.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더라고요."
반태수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 마력을 각성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면세계의 마력을 이용한 경험 덕분에 빠르게 마력을 쌓았고 말이다.
아마 이면세계에서 쓰던 양만큼 마력을 모으고 나면, 그 뒤로는 또 마력 쌓기가 만만치 않아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반태수의 물음에 백진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닉스 테크놀로지라고 방산업체예요.”
"무기 같은 거 만드는 회사인가요?”
"다양한 일을 해요. 무기도 만들고 전투나 전쟁, 혹은 다양한 작전에 필요한 연구도 하고요.”
"진희 씨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한 일도 하겠죠?”
반태수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백진희가 눈을 반짝였다.
"저 같은 인재가 어떤 건데요?”
꼭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뛰어난 인재죠.”
백진희가 푸핫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제법 요염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오늘도 같이 라면 먹으러 가자고 하면, 지난번처럼 정말 라면만 먹고 가실 건가요?”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가.
"라면 말고 커피로 하죠.”
"커피요?”
반태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공간에 커피가 잔뜩 있으니 한 잔 대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러려면 자신의 방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커피를 꺼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장담컨대, 오늘 진희 씨는 인생 커피를 만날 겁니다.”
“그거 정말 기대되네요.”
백진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잠깐 내려앉았다.
반태수는 백진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백진희를 담담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마 이면세계였다면 바로 방으로 데리고 갔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지구에 있으니 자제력이라는 것이 높아진 듯했다.
백진희는 침묵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일하는 곳의 특성 상,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되거든요."
반태수는 백진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제공된 정보를 확인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반태수 씨가…… 기공술사라는 걸요.”
반태수는 솔직히 좀 신기했다.
폐공장에서 자신이 기공술사라고 오해하도록 행동하긴 했다.
아마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반태수를 기공술사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정보를 은폐하겠다고 했다.
정보를 다루는 실력이 대단치 않을 테니 결국 관련된 사항들이 밖으로 새 나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누군가가 그 얘기를 하지 않는 한, 반태수가 기공술사라는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는 건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한데 대체 어떻게 그 정보를 알아냈을까? 게다가 여긴 미국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백진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정보의 결과만 보는 거라서 정보 취득 과정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충 짐작해 보면……."
백진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을 이었다.
"한국에 있는 기공술사는 알려지기로 세 명이 있어요. 그리고 각각 가문이나 세력을 이끌고 있죠. 그 중에서 진천 유가가 얼마 전부터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였어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습니까?”
"기공술사는 중요하거든요. 전 세계의 알려진 기공술사 주위에는 우리 회사의 눈이 박혀 있다고 보시면 돼요.”
"대단하네요.”
백진희가 빙긋 웃고는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거기서 시작해 정보를 열심히 모았을 거예요. 저야 결과만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마 반태수 씨의 행적과 진천 유가의 기공술사인 유정협과의 접점이 있었다는 걸 파악했을 테고, 거기서 더 깊이 파고들다보니 반태수 씨가 기공술사라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을 거예요.”
진짜 자세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저쪽으로 넘어갔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오충규에 대한 정보도 다 파악했을 것이다.
그들이 뭘 하려고 했는지도 유추했을 테고.
아무튼 괜찮다. 이 정도는 전부 예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의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마법사라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기공술사로 알려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어차피 조만간 기공술사도 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열심히 마력회로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니까.
연구하다보니 생각보다 마력회로라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발동 속도가 빨랐다.
일정 수준 이상의 복잡한 마법이라면, 마법진을 그리는 것보다 마력 회로의 일부를 활성화 하는 것이 몇 배는 빠르니까.
지금도 반태수의 두뇌 두 개가 마력 회로를 연구하기 위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설마 기공술사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때 왜 그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 않았는지도 이제 이해했고요.”
"감춘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태수의 말에 백진희가 당치 않다는 듯 열심히 손사래를 쳤다.
"아우, 당연히 감추셔야죠. 제가 누군 줄 알고 그런 걸 말해요. 함부로 말하면 큰일 나죠.”
당당하게 기공술사의 이름을 걸고 세력을 이끌고자 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반태수가 그럴 것 같지는 않으니, 이럴 때는 감출 수 있을 만큼 감추는 게 낫다.
적어도 백진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제 좀 피곤해지시겠어요.”
“기공술사에게 관심들이 보통 많습니까?”
“당연하죠. 당장 저희 회사만 해도 기공술사를 모시지 못해서 안달이거든요. 벌써 세 명이나 있는데 더 욕심을 내더라고요.”
"회사에 기공술사가 세 명이나 있습니까?”
"네. 우리 회사가 연구하는 분야 중 하나가 초인 양성이거든요.”
"기공술을 가르쳐서 강력한 병사를 육성하는 겁니까?”
"아뇨. 기공술을 가르칠 수는 없죠. 기공술사들에게 기공술을 배우려면 굉장히 엄격한 조건이 따라붙거든요.”
"기공술도 안 가르쳐주는데 쓸모가 있긴 합니까?”
"그럼요. 대신 같이 기공술을 연구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기술적으로 써먹을 만한 것들을 나름대로 알아서 뽑아내는 거죠. 생각보다 성과가 제법 괜찮다고 들었어요.”
"재미있네요.”
반태수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혹시 백진희의 회사가 글락 그룹과 거래를 한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희 씨네 회사, 세운 지 얼마나 된 회사인지 혹시 아십니까?”
"역사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한…… 30년?”
“30년이면 오래 된 거 아닙니까?”
"에이, 100년 넘은 기업도 있는데요, 뭐.”
"나중에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네요.”
백진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해드리면 좋겠지만, 저희 회사가 좀 폐쇄적이라서요. 외부 손님 들이는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워요. 웬만하면 미팅도 외부에서 하거든요.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진희 씨가 왜 죄송합니까. 회사 방침이 그런 건데.”
"그래도요.”
반태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밥 먹은 다음, 커피 한 잔 대접해 드리죠.”
백진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안 그래도 카페 위자드에 가고 싶었다. 그곳의 커피가 지난 몇 달 동안 수시로 떠올랐다.
한데 반태수가 커피를 대접한다고 하니 기대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커피숍을 나가 백진희가 안내하는 맛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반태수의 호텔방으로 향했다.
***
"커피를 그렇게 가지고 다니시는 거예요?”
백진희가 놀란 눈으로 반태수가 손에 들고 있는 병을 바라봤다.
1리터쯤 되는 유리병이었는데, 그 안에 미리 만들어 놓은 커피가 찰랑거렸다.
“다른 커피는 이제 못 마시겠더라고요.”
백진희는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100%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카페 위자드의 커피가 정말 맛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커피를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아까도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고, 지난 몇 달 동안도 꾸준히 커피를 마셔왔으니까.
다만 입맛이 좀 까다로워지긴 했다. 아무 커피나 막 마시지는 않고 좀 골라먹었다.
다행히 입맛에 약간이나마 맞는 커피 몇 개를 찾았다.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가서 커피잔에 커피를 담아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빨리 데웠네요? 그런데 이렇게 마셔도 맛이 살아 있나요? 병에 담은 지 제법 오래됐을 텐데.”
"충분히 괜찮습니다. 어서 마셔 봐요.”
반태수는 빙긋 웃으며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향은 정말 기가 막혔다.
백진희는 커피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반태수가 기대된다는 듯 웃으며 지켜봤다.
예전의 백진희라면 그저 맛있게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진희는 예전과 다르다. 아마 반응이 제법 격렬할 것이다.
게다가 마력에 대한 재능이 남다르니 더더욱 좋은 반응을 보여주리라.
백진희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반태수의 표정을 살펴봤다. 안 볼 수가 없었다. 저렇게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으니.
저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분명한 기대감이었다.
'반응을 제대로 안 해주면 실망할 거 같은데. 내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으려나?’
백진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 모금 후룩 마셨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꿀꺽.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음!"
온몸이 커피향으로 꽉 차는 것 같다. 혀에 남은 커피의 맛이 온몸으로 쫙 퍼져 나가는 듯하다. 마치 자신이 커피로 변해 흐물흐물 녹아 내리는 기분이다.
백진희는 경악한 눈으로 반태수와 자신이 손에 든 커피를 번갈아 바라봤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본능적인 움직임이 말을 막았다.
어느새 커피잔이 입술에 닿은 채였다.
백진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를 음미했다.
그렇게 한 잔의 커피가 바닥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은 덤이었고.
커피를 다 마신 백진희가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굉장히 복잡했다.
"이 커피를 매일 마실 수 있게 해준다면…… 전 뭐든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죽는 거 빼고."
"그거 굉장히 설레는 말이네요.”
반태수는 씨익 웃으며 손에 든 작은 상자를 흔들었다. 그 안에는 쿠키가 담겨 있었다.
“방금 그 커피 맛이 훨씬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거, 혹시 아십니까?"
백진희의 눈이 또 한 차례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쿠키를 왜 모르겠는가. 카페 위자드의 명물 중 하나인데.
커피와 함께 먹으면 천상의 맛을 전해주는 쿠키 아닌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만일 오늘 마신 저 커피와 쿠키를 함께 먹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반태수 씨, 정말…… 무서운 분이네요.”
그날 밤은 굉장히 길었다.
***
백진희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기분 좋게 온몸에 쏟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했다.
반태수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걸 보니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게 대체 얼마만인가.
모든 피로가 싹 날아가 버렸다. 간밤에 정말 푹 잔 것이다.
백진희는 어젯밤 커피와 쿠키를 먹고 마신 후, 반태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마 이렇게까지 푹 잔 것은 그 영향이 컸으리라.
사실은 침대에 반태수가 건 마법들 때문이지만, 백진희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다.
반태수가 언제 한국에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여기서 머문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자주 만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반태수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반태수는 빠르게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호텔을 나섰다.
오늘 제닉스 테크놀로지에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백진희가 잘 안내할 것이다.
왜곡을 써서 모습을 감춘 반태수가 훌쩍 날아올랐다.
백진희가 어제와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로 걷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반태수는 그런 백진희를 조용히 따라갔다.
하늘을 날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