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 미국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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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폐공장을 나옴과 동시에 왜곡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없을 때 저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 위함이었다.
"으아아아!”
폐공장 안에는 여전히 비명이 가득했다.
유정섭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다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솔직히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저걸 자신이 겪는다고 생각하면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자신들 역시 몸이 약해지는 수법에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유정섭이 겪는 일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있으니 유정섭이 갑자기 몸을 뒤틀면서 급히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허어어억!
발도 썩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부위가 마치 촛농처럼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으으윽!"
그걸 보고 있으니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유정섭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다가 웃통을 훌렁 벗었다.
배꼽을 중심으로 배도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다들 시선을 돌렸다. 더는 쳐다보기 싫었다.
이제 그들의 시선은 오충규에게 향했다.
오충규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축 늘어진 채,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형님,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종필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이대로 살아야지.”
"회사는요?”
오충규가 피식 웃었다.
"회사? 그래, 넌 어때? 회사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은데?”
"문 닫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원들도 다 그 모양인데.”
“잘 아네. 회사 문 닫아. 빼돌릴 거 다 빼돌리고 폐업신고 해버려.”
“직원들 퇴직금은 어쩝니까?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야, 우리가 언제 정식 직원 들인 적 있어? 어차피 사기나 치던 놈들인데 그냥 둬도 알아서 잘 살 거야. 그늠들 걱정은 우리부터 챙긴 다음에 해.”
이종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시선이 공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옛 조직원들에게 닿았다.
다들 슬그머니 이종필에게로 모여들었다.
"형님, 우리, 또 버리실 겁니까?”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버리긴 뭘 버려? 너희들이 안 따라왔잖아.”
“저희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지 말입니다.”
"어후, 야야, 그만해. 나 지금 이렇게 실랑이할 기운도 없다. 여기서 그냥 누워 자고 싶을 지경이야.”
그 모습을 보고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결국 자신들도 저렇게 된다는 뜻 아닌가. 고작 며칠 만에 저렇게 된다고 생각하니 더럽게 무서웠다.
"아무튼 다들 허튼짓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 아까 얘기 들었지? 착실히 살면서 기회를 잘 살려.”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솔직히 이종필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을 이유도 없었다.
잘 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지방 작은 도시지만 몇 개 업소의 뒤를 봐주면서 입에 풀칠은 하고 있었으니까.
한데 이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후우. 그나저나 형님. 저 사람은 이제 어떻게 합니까? 보아하니 저대로 뒤질 거 같은데.”
유정섭의 몸에 썩은 부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썩어갈 때 느끼는 고통은 과연 어떨까?
그걸 유정섭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아픈가보다.
비명을 하도 질러서 목이 다 쉬었는지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악을 쓰는데도 그저 쇳소리만 났다.
그걸 보고 있으니 진짜 무서웠다.
"저 꼴이 되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오충규의 말에 다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그럼 저러다 죽으면 저희가 뒤처리를 하겠습니다. 공구리 쳐서 바다에 내다 버리죠.”
"그런 건 알아서 해. 문제는 시체만 처리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럼 또 뭘 해야 합니까?”
오충규는 말을 하기 힘들어서 이종필을 바라봤다.
이종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진천 유가에서 온 기공술사야.”
"진천 유가요? 그게 뭡니까?”
"전통적으로 기공술을 수련하는 가문이야. 유정협은 그 가문의 유일한 기공술사고.”
"그럼 문제가 됩니까?”
"진천 유가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지. 아마 가문에 알리고 여기로 오진 않았겠지만, 유정협의 제자들 때문에 이 일에 엮였으니까 내막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진천 유가인지 뭔지랑 싸우는 겁니까?”
“거기랑 싸우면 우리가 박살 나지.”
이종필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기공술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기공술을 수련한 사람은 강해. 주먹 좀 쓰는 애들 대여섯 명 정도는 혼자서 순식간에 쓰러뜨릴 거다.”
"그럼 좀 치는 정도가 아닌데요? 우리 이렇게 빌빌거리는데,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형님?”
"싸우긴 누가 싸워. 진천 유가랑 싸우면 안 되지. 우린 철저히 감추는 쪽으로 간다.”
"제 생각에도 그게 편하긴 하겠습니다, 형님. 그럼 우린 입만 다물고 있음 되겠습니까?”
"뒤처리까지는 해야지. 저 놈이 타고 온 차 알지? 그것도 처리해야 돼. 일단 여기서는 나가야지. 그리고 어디 멀리 갖다 버려. 다시 찾기 어렵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증거 좀 남기면서 아예 상관없는 쪽으로 움직이란 말씀 아닙니까. 맞습니까, 형님?”
“그래. 대신 강원도 쪽으로 움직여.”
"강원도 말입니까, 형님?”
"그래. 거기에 인제검술원이 있으니까.”
"그런 곳도 있습니까?”
"있지. 아주 유명해. 거기에도 기공술사가 있으니까. 아마 저기서 구르는 놈보다 훨씬 고수일 거다.”
"아하, 진천 유가인지 뭔지가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연막을 치는 거로군요.”
"비슷하다.”
사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형님. 아주 쌈빡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그들의 대화를 유정섭이 못 들었을 리 없다.
비록 마력회로가 싹 지워졌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마력을 갖고 놀던 몸이다.
육체의 기능이 일반인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였다.
"끄으으. 이놈들, 감히 날 두고 작당모의를 해? 날 어떻게 하겠다고? 바다에 버려? 내가 그렇게 어이없게 당할 것 같으냐?”
유정섭은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여기서 도망부터 쳐야한다.
복수를 하든 응징을 하든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의 몸에서 썩은 살점이 여전히 툭툭 떨어졌다. 그때마다 지독한 고통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 썩을 놈, 내가 반드시 죽인다.”
유정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뒤쪽에서 반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거 할 수는 있고?”
유정섭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반태수가 서 있었다.
공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일 여기서 자신들이 허튼소리를 지껄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시발, 무슨 사람이 저렇게 귀신같아? 들어오는 것도 못 봤는데.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아까 분명히 공장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했다.
한데 언제 안으로 들어와 저기까지 갔단 말인가.
반태수가 유정섭에게 말했다.
“혹시 점혈이라고 알아?”
유정섭이 인상을 썼다. 점혈, 당연히 안다. 기공술을 배우려면 한의학이나 혈도에 관한 공부도 필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협소설에서처럼 극단적인 효과를 주는 점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
기공술사들 중에 굉장한 고수들은 어쩌면 점혈에 대한 비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유정섭이 아는 기공술사 중에서 그런 자는 없다.
반태수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보여줄게. 잘 느껴봐.”
반태수의 손가락이 어느새 유정섭의 명치 언저리를 쿡 찔렀다.
유정섭의 눈동자가 위로 휙 돌아갔다.
“끄으으으윽!”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다.
점혈에 의한 고통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점혈을 당한 순간부터 부패 속도가 더 빨라졌다.
피부와 혈관이 썩는 고통이 점혈의 고통에 곁들여져 더 큰 고통으로 발전했다.
반태수는 유정섭을 방치한 상태로 오충규 일당을 쳐다봤다.
다들 덜덜 떨고 있었다.
유정섭의 몸이 빠르게 썩는 모습도 무서웠지만, 그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고통의 시각화가 더 무서웠다.
절대 저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아프기까지 하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저희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정보를 은폐하겠습니다.”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지.”
오충규 일당이 대답하기도 전에 반태수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또 한 차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봤다.
반태수가 여전히 공장에 있는지, 아니면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자자, 일단 그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고, 저놈 죽으면 바로 작업 시작하자.”
"예, 형님.”
유정섭은 반태수가 점혈을 풀어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
반태수는 나름 이번 일을 깥끔하게 처리했다고 판단했다.
오충규가 알아서 입단속을 할 테고, 아까 들었던 진천 유가의 움직임도 알아서 살피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할 것이다.
그리고 몇몇에게 마킹도 붙였고.
오충규의 조직원들이 알아서 움직여 유정섭의 시체를 처리했다.
강원도 쪽으로 유정섭의 차를 가져가서 또 깔끔하게 폐차를 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마킹을 통해 쭉 살폈는데, 제법 일처리가 괜찮았다.
아마 깊숙하게 살피지 않으면 유정섭 혼자 강원도에 와서 뭔가 일을 저지르다가 사라진 걸로 보일 것이다.
진천 유가라는 곳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별 일 없으리라.
그러니 이제 미국으로 가면 된다.
첫 출국이니만큼 포탈을 이용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그리고 미국에 가면 그곳에 혹시 포탈이 없는지 확인도 한 번 해보기로 했고.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미국에서 머물 호텔을 예약하다보니 슬그머니 기대감이 올라왔다.
생각해보니 지구에서 해외여행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억을 잃은 17세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반태수가 해외여행 같은 걸 해봤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비행기도 이번에 처음 탄다. 물론 지구에서는.
이면세계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탔고, 비행선까지 몰고 다닌다.
하지만 이면세계와 비교하면 안 된다. 그쪽과 이쪽은 이미 도저히 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지구에서는 고작 카페 두 개가 전부다.
하지만 이면세계에는 글락 그룹을 가진 재벌이다.
인맥도 장난 아니고.
지구의 인맥이라고는 카페와 관련된 사람들뿐이다.
‘아, 백진희도 있지.’
하지만 과연 백진희를 인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비교는 무의미하다.
지구에서는 지구에서의 길이 있고, 이면세계에서는 이면세계에서의 길이 있는 법이다.
아무튼 그렇게 미국에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면서 오충규를 통해 그쪽 돌아가는 상황도 살피는 나날이 며칠 이어졌다.
***
반태수는 호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지구에서의 비행기 여행은 이면세계에서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일단 비행기 자체가 이면세계의 것이 더 뛰어났다.
마법 때문이었다.
이면세계의 비행기에는 각종 마법을 이용한 마도구 부품이 잔뜩 들어갔다.
그 마도구 부품들이 비행기의 수준을 몇 단계나 높였다.
아무튼 비행기도 문제인데, 각종 검사도 문제였다.
출입국 심사를 비롯한 다양한 절차들을 거치다보니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해졌다.
한국에서 떠날 때도 만만치 않았는데, 미국에 도착해서도 피곤한 과정을 계속 겪어야 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잘까.”
반태수가 머무는 곳은 뉴욕의 호텔이었다.
창밖으로 도시의 전경이 쫙 펼쳐진 방이었는데, 솔직히 글락 호텔을 경험해 본 이상, 이 정도 전망이야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자연 경관이 더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아무튼 일단 미국에 오는 데 성공했다.
"그나저나 찾는 것도 일이겠네.”
포탈도 찾아야 하고, 글락 그룹과 거래를 했던 자들도 찾아야 한다.
‘포탈이야 포탈 감지기를 쓰면 되고…… 거래자들은 글락 그룹에서 넘긴 물질을 찾으면 되겠지.’
그 물질에 대한 정보야 충분히 있다. 특성을 생각해서 영역화로 감지하면 그걸 적용한 장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역으로 차근차근 추적하다보면 글락 그룹과 거래한 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침대에서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생각과 계획을 점검하며 뒹굴뒹굴 구르던 반태수는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날도 환한데 그냥 잘 수는 없지.”
반태수는 백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포탈을 찾고 거래자를 찾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건 천천히 하고 일단 백진희부터 만나는 게 낫다.
백진희는 전화를 거의 바로 받았다. 그리고 빠르게 약속을 잡았다.
당장 이 호텔로 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물론 호텔방에서 보겠다는 건 아니고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근처라서 금방 온다는 말에 반태수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 서서 호텔 입구를 보고 있는데, 백진희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진희는 반태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반태수는 그런 백진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달라졌네?’
여러모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