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 마무리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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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별장 옥상에 마련된 흔들의자에 앉아 멍하니 도시의 전경을 바라봤다.
글락 그룹을 받았다.
아까는 그냥 받았나보다 했는데, 막상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조금씩 실감이 되면서 정신이 멍해졌다.
반태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 고작 회사 하나에……."
반태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작 회사 하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했다.
게다가 모든 지분을 반태수가 쥐고 있다.
하고 싶은 걸 모두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글락 그룹은 셰딤의 총본부였다. 즉, 셰딤과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뜻이다.
셰딤이 어떤 조직인가.
신물질이나 생체 조직 연구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이다.
그 모든 연구 자료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물론 5대 가문과 공유하긴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반태수가 그것들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반태수는 그 누구보다 그 자료를 잘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여기 있었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반태수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살라자 샤마쉬였다.
그는 마치 반태수가 왜 이러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반태수 옆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맥주 두 캔을 올려놓았다.
"가볍게 한 잔 하게.”
그러면서 맥주를 따서 몇 모금 꿀꺽꿀꺽 마셨다.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맥주를 땄다. 그리고 절반쯤을 단숨에 마셨다.
정말 시원했다.
“하, 시원하네요.”
마치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갑자기 큰 기업을 맡게 되어서 불안한가?”
"불안하긴요. 도와주는 사람이 몇인데. 그리고 회사에 나름대로 믿을 만한 사람도 한 명 있고요.”
"아, 그 아네스라는 여자 말인가?”
살라자 샤마쉬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네. 비서로 들이려고요. 제가 없는 동안 회사의 전반적인 일처리를 다 맡길 생각입니다.”
“그 여자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어차피 일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확인도 제가 다 할 건데 감당할 일이 있겠습니까?”
명확하게 가이드라인만 제시해 주면 된다.
거기에 따라 일을 하게하고, 잘하면 가이드라인을 조금씩 넓혀주면 된다.
능력이나 재능이 있다면 가이드라인을 점점 더 넓혀가면서 결국 글락 그룹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고, 모자란다면 모자라는 데까지 하면 된다.
"명쾌하군. 그럼 왜 이러고 있나?”
“그냥 갑자기 너무 큰 걸 얻어서 좀 멍했습니다. 이제 정리 다 끝났어요. 괜찮아졌습니다.”
좋은 걸 받아서 돈도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끝내기로 했다.
"다행이네.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살라자 샤마쉬의 질문에 반태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놀러가야죠.”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쿠오릭 벨크리스가 와서 일을 마무리한 날,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 살라자 샤마쉬는 말 그대로 광란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느지막한 아침까지 놀았고, 셋 다 대단히 만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날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논 다음부터 바쁘게 보냈다.
일단 글락 그룹의 인력 공백을 메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대적으로 경력직을 뽑았고, 5대 가문의 힘으로 그들의 뒤를 샅샅이 조사했다.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셰딤의 조직원이라도 끼어들어오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반태수가 5대 가문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철저히 셰딤의 잔당을 색출했는지, 혹시 남은 잔당이 있었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글락 그룹이 대단하긴 했다.
그렇게 많은 직원이 사라졌는데도 회사 자체는 잘 굴러갔다.
남은 직원들이 좀 힘겨워하긴 했지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또한 새로 뽑은 인력들 역시 요소에 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락 그룹의 색에 물들었다.
마치 애초에 글락 그룹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처럼 잘 어우러져서 맡은 일을 해냈다.
글락 그룹이 완벽하게 예전처럼 정상화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보름이었다.
그리고 반태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놓은 다음부터는 그룹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워낙 큰 그룹이었기에 사업 현황을 보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분야가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회장만 알고 있던 자잘한 사업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 자잘한 사업들이 진짜 핵심이었다.
전 회장인 라그나 달튼이 셰딤의 일로 벌인 사업들이었으니까.
거기서 셰딤만 싹 솎아내고 불법적인 연구나 일을 덜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지금 반태수는 사업 현황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원래는 회장실에서 해야겠지만, 지금은 퇴근 시간이 지났다. 호텔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태블릿으로 열심히 각종 서류를 확인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반태수 옆에는 아네스가 같은 자세로 누워 역시 같은 내용의 태블릿을 확인 중이었고.
"이제 얼추 정리가 다 끝나 가네요.”
아네스의 말에 반태수가 그녀를 쳐다봤다.
"벌써?”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우리 회사가 크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기껏해야 호텔, 화학, 건설, 전자, 백화점 정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훨씬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가 각 지사에 골고루 나뉘어 있었다.
아네스는 갑자기 심호흡을 했다.
"후아아아.”
그녀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가끔 걱정될 때마다 이렇게 해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하는데?”
아네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니까요.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니까요? 나한테 사업가적 소질이나 비서의 재능이 있었다니. 역시 인생은 재미있어요.”
반태수는 저러는 아네스가 왠지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앞으로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잘 부탁해.”
아네스가 슬그머니 반태수를 안으며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자주 오셔야 되는 거 알죠? 안 그러면 회사 내 마음대로 굴릴 거예요.”
“하하하.”
반태수는 즐겁게 웃으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잠시 마력을 섞는 시간을 가질 차례가 되었다.
반태수는 마력을 섞는 동안 아네스에게 일어나는 변화와 자신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봤다.
아네스와 함께 일을 해보니 그녀의 두뇌회전이 상당히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 과연 반태수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건 아네스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였다.
반태수를 만나면서 자신이 왠지 더 똑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마력이 섞이는 걸 관찰하니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반태수의 마력이 그녀의 마력과 섞이면서 두뇌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건 케트라 브리저와는 달랐다.
케트라 브리저와 마력을 섞었을 때는 마력의 질이 향상되었다.
한데 아네스와 마력을 섞으니 섞인 마력이 육체를 자극했다.
아네스의 경우 몸보다 머리 쪽의 자극이 더 강한 듯했다.
반면 반태수는 머리보다는 몸 쪽의 자극이 강했다.
굉장히 미묘하긴 하지만 근육과 뼈의 질이 좋아졌다.
아마 한두 번 마력을 섞는 걸로는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아네스와 틈나는 대로 마력을 섞었기에 이 정도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아무튼 반태수는 열과 성을 다해서 마력을 섞었다.
아주 잘 섞인 모양이다. 아네스의 반응이 좋은 걸 보니.
마력이 다시 분리되어 각자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아네스는 마력을 다시 받아들인 후,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반태수는 힘이 펄펄 넘쳤다.
"이런 부작용이 있었네.”
아무래도 섞인 마력이 육체를 자극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옆에서 잠든 아네스를 잠시 내려다봤다.
처음 만났을 때도 미모가 상당하긴 했다. 한데 요즘은 더 예뻐졌다.
아무래도 마력을 섞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 같다.
반태수는 이내 아네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힘이 넘친다고 저렇게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정말 얼마 안 남았다. 글락 그룹을 전부 파악해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날이.
그리고 이곳 에라리스를 떠날 날이.
태블릿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여기 혹시 포탈 없나?’
예전 변두리 개발 계획을 이용해 이면세계에서 지구로 넘어가는 포탈을 찾아 모두 장악했다.
하지만 그때 찾은 포탈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건 오직 포탈 주변을 개발하거나 건물을 이용해 포탈을 확보하려는 시도 때문에 걸린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포탈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시도를 하지 않은 포탈이 몇 개나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에라리스는 그 포탈 장악 계획에 포함된 도시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도시 어딘가에 포탈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반태수가 생각하기에 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만일 그걸 찾아낸다면, 그래서 그 포탈을 자신이 장악할 수 있다면.
‘그럼 도시와 도시를 마음껏 오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태수는 가능하다.
반태수는 포탈을 넘을 때, 강한 염원을 통해 원하는 지역의 원하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지구에 있는 자신의 포탈을 이용할 때, 이곳 에라리스를 염원하면 여기로 올 수 있다.
또한 이곳에 있는 포탈을 찾아 이용할 때 자신의 포탈이 있는 작업실로 갈 수 있고.
그건 크랙톤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크랙톤과 에라리스를 연결하는 포탈이 생기는 셈이다.
에라리스는 굉장히 거대한 도시다. 그러니 포탈을 찾는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석대로 찾으려면 아마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릴 것이다.
하지만 반태수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일단 아공간에 넣어두었던 고리를 꺼냈다.
쿠오릭 벨크리스에게 받은 능력 억제기였다.
그리고 반태수는 이 유물로부터 포탈의 느낌을 받았다.
더 정확히는 이 고리가 작동할 때 퍼지는 마력 파동이 포탈의 것과 흡사했다.
어쩌면 이걸 받았을 때부터 포탈 추적에 써먹을 생각을 무의식중에 했을지도 모르겠다.
반태수는 이 고리의 파동과 영역화를 결합하고자 했다.
쉽지 않겠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나는 마법사니까.’
***
“너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데드릭 벨크리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도시 여기저기 구경 좀 다녔습니다. 앞으로 내가 다스리는 거나 다름없는 도시 아닙니까.”
"이제 시정부 제대로 된 놈들로 세우고 하면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예전처럼 글락 그룹이 시정부고 귀족들이고 다 주무르던 시절은 이제 끝이라는 거지.”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바뀌면 뭐하나.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데.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대로 되려면 시민의 의식 자체가 확 뒤집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큰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이 도시, 에라리스는 여전히 글락 그룹의 도시였다.
"여기 원래 다스리던 귀족 가문도 바뀔 거라니까? 귀족 바뀌면 분위기도 당연히 바뀌지.”
원래 있던 귀족 가문은 셰딤과 손을 잡고 그들과 비슷한 짓을 수없이 저질렀다.
당연히 그 가문은 몰락했고, 그 자리에 새 귀족 가문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반태수가 예상하기에 그들이 와도 큰 소용은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흘러갈 공산이 컸다.
다만 셰딤이 빠졌으니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일은 없으리라.
새로 들어온 귀족 가문이 여기서 자리를 잡으려면 과연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그때 접근해서 도움을 주고 그들을 글락 그룹의 영향력으로 덮어씌우면 끝이다.
그리고 그걸 반태수가 직접 할 필요도 없다. 글락 그룹에 그런 부분을 담당하는 자들이 따로 있었다. 그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이다.
"아무튼 고작 도시 구경하느라 요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라고?”
"그런 셈이죠.”
물론 도시를 돌아다닌 이유는 포탈을 찾기 위함이었다.
고리의 파동과 영역화를 결합하는 데 성공했고, 한 번에 굉장히 넓은 범위를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리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근차근 분석하고 연구해볼 것이다.
어쩌면 포탈을 분석하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야, 우리도 너 얼굴 좀 보자. 낮에는 도시를 돌아다니고, 밤에는 아네스랑 놀고.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이제 대충 일 끝났습니다. 조만간 돌아갈 거예요.”
"돌아간다고?”
"예. 크랙톤으로 가야죠.”
그리고 지구에도 가보고 말이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말이구나? 그럼 아네스는?”
“아네스는 회사를 돌봐야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 복 받은 새끼. 너 근거지 여기로 옮길 생각은 없는 거냐?"
"없는데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그 마음, 잊지 마라.”
반태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너 돌아가는 길에 아리크에는 안 들러도 돼?”
"들러야죠.”
케트라 브리저도 만나야 한다.
그러고 보니 개척도시 아리크에서 가까운 도시, 퀴무르에도 포탈이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근데 왜 눈빛이 그래?"
“제 눈빛이 어디가 어때서 그렇습니까?”
"음흉한데?”
"그럴 리가요. 하하하.”
역시 데드릭 벨크리스. 감 하나는 아주 끝내준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건데?”
"내일 오전에 출발합니다.”
드디어 길고 긴 외부 생활이 끝났다.
이제 크랙톤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리고 지구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