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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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고르 가문 사람들을 납치해 와서 협조를 얻어내는 과정은 굉장히 부드럽고 순탄하게 흘러갔다.
점혈을 통해 충분한 고통을 줬으며, 뽑아낼 만한 정보도 다 뽑아냈다.
또한 적극적인 협력까지 약속받았다.
그들이 협력해야 할 것은 라그나 달튼을 끌어내리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온 다섯 노인이 셰딤과 손잡은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하여간 너도 평범하진 않아.”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마법사가 평범할 리 없잖습니까.”
"내가 마법사를 너밖에 모르는 줄 알아? 나 데드릭 벨크리스야. 내가 아는 마법사가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고."
"그러시겠죠. 뭐 그런 걸 자랑하고 그러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5대 가문 사람이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저런 자랑을 한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다른 마법사는 아무도 너 같지 않단 말이다. 세상에 점혈을 몸에 심는 걸 따로 연구할 줄이야.”
"뭐 그런 칭찬을 하십니까. 마법사가 연구하는 거야 당연한 건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이번에 사로잡아서 점혈을 통해 회유한 아홉 명은 모두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점혈을 몸에 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점혈을 몸에 심어두고 그것을 원거리에서 자유자재로 발동시키고 중지시킬 수 있었다.
마킹을 이용한 방식인데, 점혈과 그걸 원거리에서 조종하는 컨트롤러까지 전부 위상을 뒤집어서 처리했기에 웬만한 마법사나 감지기로는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다음에 전화를 걸면서 테스트를 한 번 해줬기에 말을 안 들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데드릭 벨크리스와 멀어졌기 때문에 목숨에 대한 집착이 다시 생겼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스파이가 된 것이다.
특히 직원은 글락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정보를 전해줄 수 있었다.
또한 나중에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될 동료들까지 보내주기로 했다.
반태수가 엄선해서 보내라고 했으니 악질적인 놈들로 골라서 보내줄 것이다.
"그럼 이제 터트리면 되나? 이거 가지고 그 영감탱이들을 처리하는 건 좀 어렵겠지?”
"영감님이 어렵다고 생각했으면 어려운 거죠. 5대 가문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려워. 밑에 놈들이 아무리 그놈들 지시를 받아서 저질렀다고 해봐야 명령을 내린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엮기가 곤란해. 그놈들, 인맥도 두텁거든.”
"그럼 일단 라그나 달튼부터 날려 버리죠.”
"그래야지. 증거랑 증언 다 확보했으니까 일단 박살 내고 나중에 수습하면 돼.”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는 글락 그룹 본사. 그곳에 라그나 달튼이 있다는 소식을 방금 받았다.
역시 본사 직원을 포섭하니 일이 한결 쉬워진다.
글락 호텔에서 잤기에 내려가서 길만 건너면 글락 그룹 본사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 데드릭 벨크리스가 말했다.
"야야, 어제 그거 좀 해봐. 존재감 없애는 거. 오늘은 좀 편하게 가자.”
"영감님도 드디어 내가 마법사라는 걸 인지했군요.”
"마법사라는 건 원래 알았거든? 그렇게 편리한 게 있는 줄 몰랐던 것뿐이지.”
"알았습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반태수는 바로 마법을 써서 데드릭 벨크리스와 자신의 존재감을 죽였다.
이내 신호등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횡단보로를 건너 글락 그룹 본사 빌딩으로 향했다.
존재감이 없기에 사람들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냥 다가와서 그들을 전부 피해가야 했다.
"이거 은근히 불편한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살짝 투덜거렸지만, 반태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길을 건너 글락 그룹 본사 빌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야, 같이 가자. 같이 가.”
데드릭 벨크리스가 황급히 반태수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스캐너 옆 방벽을 넘어 로비로 들어간 다음,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 빌딩에는 회장만 쓸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회장의 생체신호를 이용한 보안체계를 가진 엘리베이터였다.
반태수는 마법을 이용해 회장의 생체신호를 고스란히 재현했다.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스캐너가 반태수가 보내는 생체신호를 읽고 자동으로 회장실이 있는 꼭대기 층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하, 진짜 편리하긴 하네.”
데드릭 벨크리스는 감탄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법사의 유용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존재감 다시 올립니다.”
반태수의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회장과 만나 얘기를 나눠야 하니 존재감을 다시 올려서 상대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좀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럴 것 아닌가.
문이 열리고 넓고 화려한 공간이 나타났다.
몇 개의 데스크가 있고, 거기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남녀여러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긴장했을 뿐이다.
회장이 안에 있는데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움직였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응분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경비팀에 연락을 한다거나 등등.
데드릭 벨크리스는 히죽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슬쩍 들어주었다.
"여어. 나 회장 좀 만나러 왔는데, 안에 있지?”
"회장님은 미리 약속하지 않은 분은 만나시지 않습니다. 돌아가셔서 미리 약속부터 잡고 다시 와 주십시오.”
비서가 정중히 말했지만, 그 말에 인사하고 돌아가면 데드릭 벨크리스가 아니다.
"그런 건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고.”
"예?”
데드릭 벨크리스는 비서들을 지나쳐 회장실로 향했다.
"약속 안 해도 여기 회장은 날 만나야 한다는 뜻이지.”
비서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때 비서실장이 나타났다.
비서실장은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얼른 그 앞으로 가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데드릭 벨크리스가 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날 아는 모양이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받들어 모셔야 할 분이신데.”
비서실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나? 여기 회장 좀 만나러 왔는데?”
비서실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걸 어쩌죠? 회장님, 지금 안 계시는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분명히 출근해서 회장실로 올라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다.
회장실은 온통 마력 차단 물질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다른 곳보다 더욱 치밀하고 두껍게 도포를 해서 더더욱 마력이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문을 열고 확인하는 게 최고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회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정말 없네?”
데드릭 벨크리스가 속았다는 생각에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야, 그놈한테……."
반태수가 얼른 손을 들어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을 막았다.
본사 직원한테 심어놓은 점혈을 발동하라는 건데, 반태수가 보기에 그 직원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라그나 달튼은 분명히 회장실에 왔을 것이다.
그건 아까 비서들 반응만 봐도 확실하다.
그렇다는 건 라그나 달튼이 회장실에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는 얘기를 듣고 자리를 피했다는 뜻이다.
반태수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회장실은 들어오는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벽이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유리창을 통해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비행선이 보였다.
"영감님, 저거 같은데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얼른 달려가 반태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도 멀어지는 비행선 한 대가 보였다.
"굉장히 작은 비행선인데?”
"여기 어디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을 겁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영역화를 빡세게 돌려서 빠르게 회장실을 스캔했다.
밖과 안을 구분하는 벽, 천장, 바닥은 마력 차단 물질로 도배를 했는데, 내부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네요.”
반태수는 정면에 있는 유리창 아랫부분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바닥이 덜컹 열리고 그 아래에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커다란 미닫이문까지 달려 있었다,
딱 저기 날아가고 있는 비행선을 보관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하, 이런 걸 숨겨뒀었어?”
"어쩔 겁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어쩌긴 뭘 어째? 쫓아가야지. 너, 날수 있지?”
"영감님은 못 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나요?”
"아니, 맞아. 그러니까 나 좀 업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거지.”
반태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것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전자식 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그냥 힘으로 열어 버렸다.
"영감님, 뭐 합니까? 얼른 갑시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뛰어내리자, 반태수는 그의 몸을 마력으로 감싸 안고는 빌딩 밖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빠르게 허공을 날아 비행선을 쫓아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뒤에 남은 비서실장과 비서들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
"지독한 놈. 진짜 왜 미친개라고 하는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구나.”
라그나 달튼은 비행선으로 도망치면서 치를 떨었다.
오늘 꼭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출근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자신을 잡으러 회사까지 찾아왔다.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는 말에 바로 엘리베이터 내부 CCTV를 확인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를 보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급할 때 쓰려고 작은 비행선을 준비해 뒀기에 도망은 쉬웠다.
아마 분명히 쫓아올 것이다. 그러니 함정으로 유인해야 한다.
아직 함정을 준비하진 못했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준비하면 되니까.
라그나 달튼은 얼른 전화를 걸었다.
"예. 어르신. 상황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미친개가 절 쫓아오는 중입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거다. 자신이 그쪽에 정보를 흘릴 테니까.
"그럼 예정된 장소로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라그나 달튼은 씨익 웃었다.
지금 그가 가는 곳은 에라리스 외곽에 위치한 공장 부지였다.
제법 넓고 주변에 인적도 없어서 싸우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거기에 5대 가문의 다섯 노인이 데드릭 벨크리스를 죽이기 위해 엄선한 자들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강력한 한 방을 준비했다.
사실 데드릭 벨크리스를 죽이면 굉장히 골치 아프고 복잡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함정까지 파서 죽이는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미친개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심지어 목숨까지.
그래도 이제 다 끝났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던 라그나 달튼은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비행선 뒤쪽을 화면에 띄워봤다.
"허억!”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늘을 날아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심지어 엄청난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힐 것만 같았다.
다가오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에 깃든 미소가 왠지 무서웠다.
"속도를 더 높여야 돼!”
라그나 달튼은 다급히 비행선의 속도를 높였다.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비행선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랬는데도 데드릭 벨크리스와의 간격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으아아아!”
라그나 달튼은 어떻게든 속도를 더 높여보겠다고 애썼지만, 비행선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이내 데드릭 벨크리스가 비행선 끝에 바짝 붙었다.
거의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그나 달튼은 화면을 통해 그 광경을 보다가 정면에 난 창을 통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했다.
"거의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한데 그 순간 비행선이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얼른 화면을 확인해 보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뒤에서 비행선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저 미친놈!”
데드릭 벨크리스가 움켜쥔 부분이 우그러졌다. 그의 팔뚝이 불끈거렸다. 그리고 비행선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안 돼! 계속 가야 돼! 가! 가라고!”
라그나 달튼은 어떻게든 비행선을 앞으로 보내려고 애썼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하필 여기서 발목을 잡힌단 말인가.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라그나 달튼은 비행선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비행선의 조종석에서 자폭코드를 입력했다.
이제 이 비행선은 10초 후 폭발한다.
비행선 아래가 덜컹 열렸다. 라그나 달튼은 미련 없이 열린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떨어지고 몇 초 후.
꽈아아아아앙!
비행선이 폭발했다. 거대한 화염이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라그나 달튼은 아래로 쭉 떨어지면서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확인했다.
화염이 데드릭 벨크리스까지 삼켰다.
하지만 고작 저걸로 데드릭 벨크리스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쿠웅!
라그나 달튼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입은 것과 비슷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는데도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라그나 달튼은 착지하자마자 위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허공에 떠 있었다. 보아하니 폭발 때문에 살짝 낭패를 본 모양이다.
라그나 달튼은 전투복의 힘을 이용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목적지가 정말로 지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