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 밤의 유흥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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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글락 그룹 회장 대단하네요. 설마 지사들을 전부 손절해 버릴 줄이야.”
“우리가 손 못 댄 지사가 둘이었지?”
"그렇죠.”
라그나 달튼은 그 나머지 둘까지 단호하게 잘라냈다.
심지어 모든 죄를 지사장들에게 덮어씌웠다.
모든 증거가 그렇게 조작되었고, 심지어 각종 매체의 기사들도 그런 논조로 무한정 쏟아 부어 여론까지 만들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야.”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이제 어쩔 거냐?”
"글쎄요. 일단 잠시 관망할까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관망? 그놈이 꼭대기에서 전부 지시했을 텐데 그냥 관망만 하자고? 당연히 죽여야지.”
"그거야 당연하고요. 그놈 하나 죽인다고 끝날 일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거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글락 그룹 회장이 셰딤의 총수인지 아닌지 아직 확신을 못하겠어요.”
“응? 같은 놈 아니었어?”
“그랬으면 좋겠지만, 만일 아니라면 글락 그룹 회장을 죽이는 순간 진짜 총수는 지하로 숨어버릴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독버섯처럼 다시 돋아나겠죠.”
"확실히……."
데드릭 벨크리스는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계속 이렇게 멍 때리면서 기다려야 하는 거냐?”
"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그거 해야죠. 기술협약.”
"아! 그게 있었구나. 그나저나 과연 그걸 할까? 지금 상황이 이런데?”
“상황이 이러니까 더더욱 해야죠. 지금 글락 그룹 본사는 지사들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잖습니까. 본사가 주도하는 5대 가문과의 사업 정도면 상황에 물 좀 탈 수 있을 겁니다.”
"하긴, 기술협약을 하는 건 밑에서 구르는 놈들이 아니라 책임자 몇 명 정도면 되니까.”
그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딱 전화가 왔다. 벨크리스 가문 사람들이었다.
"왔다. 그것 때문인가 보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히죽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몇 마디 하고는 끊었다.
"내일 오전에 협약 진행하고 일주일 안에 계약한다는군.”
"그럼 오늘은 그냥 쭉 쉴까요?”
“쉰다고? 으음.”
데드릭 벨크리스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여기 와서 크게 한 일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피곤하면 두말 않고 쉴 텐데, 그렇지 않으니 굳이 쉬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영감님, 설마 할 일 찾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솔직히 별로 안 피곤해서.”
갑자기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에라리스의 밤도 경험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에라리스의 밤이요?”
신나게 유흥의 밤을 즐기자는 얘기다.
데드릭 벨크리스와 놀아본 경험에 의하면 아마 충분히 즐거운 밤이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반태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잘 생각했다.”
두 사람은 굳이 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아직 날이 훤했다. 하지만 번화가에 가서 시간 좀 때우다가 유흥가로 넘어가면 된다.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새벽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흥가의 불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처음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듯 곳곳에 네온이 타올랐다.
그 거리를 반태수와 데드릭 벨크리스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후련함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 정말 재미있었다. 안 그러냐?”
"그동안 놀았던 것 중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너 호텔에 그 여자 있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놀아도 돼?”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이렇게 노는 거죠. 회사 일이 바빠서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이 바빠?”
"글락 그룹 본사 홍보팀이잖습니까. 아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걸요? 아까 연락했는데 어제 잠도 못 잤고, 오늘도 못 잘 거라던데요?"
“하긴, 그놈들 기자 다루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더라.”
“뭐 좀 알아봤습니까?”
"내가 알아보긴 뭘 알아봐. 알아서 정보를 갖다 바치는 거지.”
아마 벨크리스 가문 사람들이 열심히 정보를 모아서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전해준 모양이다.
"뭐라도 좀 먹고 들어갈까? 원래 이런 새벽, 집 가는 길에 먹는 게 진짜거든.”
"그럴까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먹을 만한 곳이 있는지 슥 둘러봤다.
그러다가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어? 저기 마력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요?”
반태수의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음? 낯익은 놈이 하나 있는데? 저것들 아르잔 가문 놈들인 모양이다.”
"아르잔이로군요.”
반태수는 아르잔 가문 사람들이 가지는 마력의 결을 기억했다.
“하, 아주 광란의 밤을 보낸 모양이로구나.”
신 나게 놀았는지 얼굴이 다들 환했다. 게다가 옆에 여자를 한 명씩 끼고 있었다.
"그런데 영감님, 저 중에 한 명은 마력의 결이 달라요. 아르잔 가문이 아닌 놈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 뭐지?”
반태수는 그들이 하는 대화를 슬쩍 엿들었다.
영역화를 계속 펼치고 있었기에 신경만 그쪽으로 돌리면 그들이 나눴던 대화를 쭉 확인할 수도 있었다.
“어? 저놈들 접대 받은 모양인데요? 여기 온 날부터 매일 받았대요.”
"뭐? 접대? 저것들이 미쳤나?”
"보아하니 뷰고르 쪽도 접대를 계속 받아왔나본데요?”
"설마 우리 애들도 저딴 걸 받아온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벌써 걸렸죠. 우리가 밤마다 연락하고 찾아가고 했는데.”
데드릭 벨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바람에 접대를 못 받았는지도 모르지.”
“영감님, 일단 믿어주자고요.”
“세상에서 제일 의심 많은 놈이 무슨. 너나 좀 믿고 살아라.”
“전 잘 믿는데요? 제가 하는 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죠.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면 그냥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믿어줍니까?”
"그래, 너 잘났다. 아무튼 저놈들 좀 수상해. 왜 굳이 접대를 주고받지?”
"기술협약 때문이겠죠.”
"그건 끝난 거 아냐? 어차피 기술 같이 공유하기로 했잖아.”
"아니면 이번이 아니라 그 이후를 대비해서 접대하는 걸 수도 있고요.”
데드릭 벨크리스는 찜찜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꼭 똥 싸고 뒤 안 닦은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런가요?”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감이 제법 뛰어나다는 건 인정했다.
데드릭 벨크리스에게는 뭔가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봤다.
"그런데 쟤들, 아무리 접대라고 하지만 너무 친해 보이는데요?”
"응?"
그들의 모습을 좀 더 관찰하던 데드릭 벨크리스는 확실히 저들의 사이가 너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게 문제가 돼?”
“문제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죠.”
"그건 또 무슨 요상한 말이냐?”
“저놈들 애초에 같은 편 같지 않아요?”
"뭐?”
데드릭 벨크리스의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 꽂혔다.
서로 신나게 떠들면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새벽까지 문을 연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저기 가서 밥 먹을까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썼다.
"좀 더 조용히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가면 판이 깨질 텐데?”
"판 안 깨지게 해야죠.”
“어떻게?”
"우리를 못 알아보거나 우리한테 관심이 없게 만들면 됩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동시에 마법을 펼쳤다.
존재감을 죽이는 마법이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자신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마력을 느꼈다.
마음먹으면 튕겨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태수가 펼친 마법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건 뭐냐?”
"존재감을 죽이는 마법입니다. 아마 웬만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영감님이 옆으로 지나쳐도 잘 인지하지 못할 겁니다.”
"허, 대단한데?”
"암살자들이 흔히 쓰는 은신마법 비슷한 겁니다.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긴. 데드릭 벨크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씨익 웃었다.
“그럼 얼른 가보자.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저들이 안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하지만 지금 펼친 반태수의 마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가 더 궁금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걸음을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아르잔 가문 일행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떠들고 있었는데,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저놈들 소리 차단했는데?”
"영감님, 저 마법사라니까요?”
반태수는 즉시 마법을 썼다.
끈적끈적한 마력이 저들이 친 소리 차단의 경계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내부의 소리가 그 부분을 통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시끄러울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면 반태수도 데드릭 벨크리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으니까.
과장 좀 보태서 마력을 조금만 쓰면 천둥처럼 들을 수도 있었다.
"하하하하. 오늘 정말 즐겁네요. 이 녀석도 마음에 들고.”
뷰고르 가문 사내가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그들은 말이나 행동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다 놀고 나서 이렇게 밥 한 끼 먹는 게 또 즐거움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이렇게 식당을 통째로 빌린 거죠. 흐흐.”
다들 웃고 떠들고 난리가 났다.
그러다가 민감한 얘기도 슬쩍슬쩍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지사가 그렇게 돼서 어쩝니까?”
"뭐 어쩔 수 없죠.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는 수밖에요.”
"하여튼 미친개가 문제입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아주 골치가 지끈거립니다.”
"심지어 위성 공격에서도 살아남은 거 보셨죠? 바퀴벌레도 아니고, 어떻게 죽지를 않는지, 원.”
얘기가 이어질수록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이러다가 터지면 정말 누구 하나는 죽어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반태수는 그냥 내버려뒀다. 저 정도 했으면 누구 하나 죽는 게 맞다고 여겼으니까.
아무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지사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벨크리스 가문에서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아르잔 가문 쪽으로 넘기고 싶었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군요.”
"미친개잖습니까. 하, 그나저나 아쉽게 됐네요. 아르잔 가문이 맡았으면 우리가 활약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르잔 가문이 안 된다면 최소한 뷰고르 가문이 맡거나, 아니면 두 가문이 같이 맡는 걸로 유도해 봤습니다만…… 미친개가 고함 한 번 지르니까 다 없던 일로 되어 버리더군요.”
“하여간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인데.”
그 말에 다들 큭큭대며 웃었다. 그렇게라도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당한 것을 풀고 싶었다.
"그나저나 지사를 싹 빼앗겼으니 실험실들을 다시 갖추기가 만만치 않겠군요.”
"이목이 너무 집중돼서 당분간은 뭘 하기가 어렵습니다. 뭐, 또 열심히 작업하면서 끈기 있게 기다려야죠. 언젠가는 원상복구 될 겁니다. 여긴 에라리스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게 되길 빕니다.”
그러면서 잔을 높이 들었다.
다들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한데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은 옆자리 여자들의 반응이 좀 요상했다.
설마 이런 얘기를 할 줄도 몰랐고, 이들이 그렇게 유명한 사건과 엮인 사람들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자신들이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오빠들, 우리 그런 칙칙한 얘기 말고 밝은 얘기해요. 인생은 즐기기만 하기에도 짧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우리 굉장히 즐거운 일정이 하나 남은 거 다들 아시죠?”
그 말에 다들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연히 알지. 그래서 힘쓰기 전에 든든히 배 좀 채우려고 여기 왔잖아. 자, 다들 일단 좀 먹읍시다.”
한동안 먹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데드릭 벨크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쓰레기 새끼들. 옆에 있는 여자는 결국 죽일 거면서.”
"안 죽일 겁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안 죽인다고? 자기들이 그 실험실의 주인이라는 걸 떠벌였는데 안 죽인단 말이지?”
“죽이긴 왜 죽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 텐데. 전부 실험실로 보낼 겁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러게.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안 죽이겠네. 뭐 어차피 죽일 기회도 없겠지만.”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보며 턱짓을 했다. 이제 존재감을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반태수가 데드릭 벨크리스의 존재감을 풀었다. 당연히 자신의 것은 풀지 않았다. 나중에 혹시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데드릭 벨크리스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어? 여기 통째로 빌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왜?”
"저기 아무리 봐도 불청객 같아서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가 보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어르신……."
설마 데드릭 벨크리스가 있을 줄이야.
모두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설마 자신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을까봐.
하지만 이내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자신들은 유물의 힘으로 소리를 차단했다. 그건 누가 와도 듣지 못한다.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코.
“어르신? 눈에 보이니까 대우 좀 해주려고? 그냥 편하게 해, 편하게. 미친개도 좋고.”
미친개라는 말에 다들 경기를 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우리가 한 얘기를 들었어!’
이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다들,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겠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