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혼란의 스태플레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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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룸윈드는 허공에 떠오르는 무수한 빛 덩어리를 보며 전율했다.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닌데 볼 때마다 이렇게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소름이 돋았다.
빛 덩어리들은 빠르게 날아갔다.
저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수백 명이나 되는 적을 향해.
달려오던 적들도 무수한 빛 덩어리의 향연에 당황해서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빛 덩어리들이 그대로 적을 향해 쏟아졌다.
퍼버버버버버벅!
빛 덩어리에 맞은 사람은 온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해지면서 쿵 쓰러졌다.
빛 덩어리의 수는 정확히 적의 수와 일치했다.
드룸윈드는 모든 적이 쓰러진 걸 확인하고 아래로 수신호를 보냈다.
아래에서 신호를 받은 동료가 사람들을 이끌고 쓰러진 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들을 확보해서 우리 조직으로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벌써 일곱 번째 적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처음 온 적들이 가장 많았다. 수천 명이었으니까. 그 뒤로는 보통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많은 경우 천 명이 조금 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무수한 빛 덩어리가 쏟아지고 거기에 맞은 적들이 살아있는 통나무가 되어 쓰러지는 것.
“아마 이 주변 조직들은 더 이상 여력이 없을 겁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쳐들어왔고, 그 뒤로 본전을 찾으려고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계속 왔지만, 이제는 조직을 운영할 최소한의 인력 확보도 어려워졌을 겁니다.”
드룸윈드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접수하죠. 몇 개라고 했죠?”
"네 개 조직입니다.”
정확히 지금 장악한 지역을 둘러싼 조직의 수와 같았다.
이제 덩치는 넉넉하게 부풀렸다. 남은 건 안정적으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이번에 주변 조직 정리할 때, 속성 종족 투입해보죠. 그리고 앞으로는 이쪽으로 오는 공격, 속성 종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막는 걸로 하고요.”
드룸윈드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면 다른 전투조직원들은……."
"당연히 같이 해야죠.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보세요. 속성 종족들만 투입하거나, 일반 조직원과 섞거나 능력자 조직원과 섞어보거나, 속성별로도 다양한 조합을 만들 수 있잖아요. 비율도 이리저리 조절해 보고.”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거, 맞습니까?”
반태수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경험치를 좀 쌓아두면, 나중에 어떤 상황이든 대응하기가 편할 겁니다.”
“예. 지시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겠습니다.”
"그럼 주변 정리부터 마무리한 다음 다시 얘기하죠.”
"네. 알겠습니다.”
드룸윈드는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옥상에서 내려갔다.
반태수는 저 멀리 쓰러진 적들을 정리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조직원의 수가 생각보다 빨리 늘었다.
회유에 들어가는 시간이 비교적 짧았던 덕이다.
이번에 암중 지배 조직을 통해 얻은 마법진 덕분에 육체와 정신에 관여하는 마법에 관한 연구가 제법 많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회유에 그 힘을 쓰지는 않았다.
그냥 회유가 잘 됐다.
다만 반태수가 직접 나선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마법을 아예 안 쓴 건 아니었다.
정말로 회유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 부분을 파악하는 데 마법을 썼다.
아무튼 그것도 이제 거의 다 끝났다.
앞으로는 굳이 모든 적을 회유해서 쓸 필요가 없었다.
봐서 필요한 인력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만 몇 명 더 회유하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정리는 금방 끝났다.
이제 조직원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데다 대부분의 조직원이 높은 충성심을 갖고 있으니 뭘 하든 우르르 달라붙어 순식간에 끝내 버린다.
지금도 수백 명이나 되는 쓰러진 자들을, 회유할 때 쓰는 커다란 창고로 모조리 옮기는 데 고작 10분 남짓 걸렸다.
뒤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드룸윈드가 돌아온 것이다.
정리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더니 저러는 모양이다. 굳이 저럴 필요 없는데.
굳이 왔는데 필요 없다고 돌아가라고 할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정리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침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공항은 언제쯤부터 다시 가동할 것 같습니까?”
"그건…… 기약이 없습니다. 스태플레톤은 약자 아닙니까.”
스태플레톤의 균열이 터진 다음 날부터 모든 항공기가 스태플레톤을 경유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여기에 오는 비행기의 수가 극도로 적은데, 그조차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여기서 외부로 나가려면 차량이나 도보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비행선을 이용해야 한다.
"그럼 당분간 이 도시를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군요.”
“아무도 못 벗어날 겁니다. 일이 터진 날, 공항에 있던 모든 비행기들이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비행기를 탄 사람은 여길 떠날 수 있었지만 그건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비행기가 승객도 태우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린 것이다.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에 등록된 연구원이 아직 여길 떠나지 못했다는 확신을 얻었다.
‘혹시 비행선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 그것만 잘 감시하면 되겠네.’
혹시 몰라 드룸윈드에게 물었다.
"최근 비행선이 뜬 일이 있습니까?”
"우리 비행선을 이쪽 지역으로 옮길 때 외에는 없습니다. 여긴 비행선 한 번 뜨면 소문이 엄청나게 퍼져 나갑니다. 한데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룸윈드가 설명을 살짝 덧붙였다.
"아마 우리 쪽에 비행선이 두 대나 있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졌을 겁니다.”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군요?”
“가능성이야 있지만,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움직이더라도 많은 조직들이 손잡고 작전 잘 짜서 움직이겠지요.”
조만간 이 지역에 대한 소문도 좀 퍼질 것이다.
"비행선을 보유한 조직이 혹시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르죠. 워낙 음흉한 놈들이 많으니.”
드룸윈드는 얼른 말을 이었다.
“비행선 관련해서는 제가 좀 더 세심히 살피겠습니다. 혹시 뜨는 비행선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죠.”
“부탁합니다.”
이제 됐다. 비행선이 혹시 뜨면 바로 쫓아가서 잡으면 된다.
‘어쩌면…… 내 비행선을 훔치러 올지도 모르겠네.’
보유한 비행선이 없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 아니겠는가.
이곳에는 비행선이 두 대나 있으니까.
반태수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자신이 애써 찾아다닐 수고를 줄여줄 테니까.
***
케인 메르사이어는 셰딤 소속 연구 마법사였다.
6서클의 실력자였지만 실전 경험은 그리 많지 않고 삶의 대부분을 연구로 보냈다.
그가 이곳 스태플레톤에 온 것은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5대 가문에서 지원을 해준다는데, 어떻게 그 기회를 안 잡겠는가.
이건 5대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될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적어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기대했다.
한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5대 가문에서 지원을 해주긴 하는데, 자신이 연결고리가 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케인 메르사이어가 여기서 하는 일은 셰딤과 5대 가문에서 날아오는 테스트 요청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인체실험이 필요할 때 요청하는데, 특성 상, 대부분의 실험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오래되어서 이제 좀 무뎌지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실험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정말 우연히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우연도 보통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구실 밑에 유적이 있었으니까.
케인 메르사이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유적을 독식하기로 했다.
평범한 연구원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케인 메르사이어는 6서클 마법사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유적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유적에 사용자 등록까지 할 수 있었다.
케인 메르사이어에게 있어서 이 유적은 그야말로 보물덩어리였다.
유적이 제시하는 마력에 관련된 문제를 풀어 나가다보면 어느새 마법 실력이 부쩍 늘어나 있었으니까.
이 유적은 최고의 마법교재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케인 메르사이어에게는 그랬다.
한데 난데없이 문제가 생겼다.
도시가 뒤집어진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5대 가문 쪽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스태플레톤에 들어온 속성 종족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케인 메르사이어는 속성 종족을 잡아온다는 말에 크게 기대했다.
속성 종족은 연구할 만한 주제가 수없이 숨겨진 생체 연구자에게 있어서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모든 조직원들이 동원되어서 속성 종족이 있다는 곳으로 몰려갈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그리고 그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동한 조직원이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소식이야 금방 들었다.
케인 메르사이어는 바로 몸을 피했다. 그동안 연구하면서 모은 데이터만 들고서.
유적은 사용자 등록이 이뤄진 이상,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 방치했다.
나중에 언제든 돌아와서 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떠났다가 오늘 돌아왔다.
케인 메르사이어는 유적 한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벽을 바라봤다.
원래는 손바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벽이 밋밋했다.
케인 메르사이어는 원래 손바닥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봤다.
매끈매끈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유적에 들어올 때마다 느꼈던 묘한 마력의 흐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유적이 아니게 된 것처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유적,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무리 유적을 샅샅이 뒤지고 연구실과 건물, 심지어 주변까지 싹 훑었지만, 유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케인 메르사이어는 고민에 잠겼다.
원래의 계획은 다시 이곳에 조직을 재건하는 거였다. 그래서 다시 평소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연구를 하고 유적을 통해 마법 실력을 높이고.
한데 유적이 사라졌다.
그러니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도 함께 사라졌다.
유적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사라졌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유적을 뜯어갔다면 그 흔적이 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미련 없이 여길 뜨기로 했다.
어차피 스태플레톤은 극심한 혼란으로 한동안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이 기회를 틈타 셰딤의 중추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케인 메르사이어는 이쪽으로 비행선 한 대만 보내달라고 연락을 했다.
한데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최근 조직 상황이 어지러워서 따로 비행선이나 전투인력을 빼기가 곤란하단다.
"젠장. 짜증나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어떤 인재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런 오지에서 몇 년 씩이나 조직에 헌신했는데 말이다.
케인 메르사이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행선을 못 보내준다면, 내가 알아서 구해야지 어쩌겠어.”
속성 종족이 있는 구역에 비행선이 두 대나 있다는 얘기는 현재 도시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 하나를 자신이 이용하면 될 듯했다.
아무리 6서클 마법사라고 해도 혼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모아야 한다. 아주 잔뜩.
***
드룸윈드는 조직 운영에 대한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사실 이건 드룸윈드 자신도 잘 몰랐다.
그저 닥쳤기에 한 거였는데, 막상 해보니 눈부신 재능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약간 버벅거리기도 했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급격히 능력이 발전했다.
드룸윈드의 능력은 조직원의 수가 확 늘어나면서 더더욱 빛을 발했다.
적재적소에 적당한 인재를 배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변 상황을 파악해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것까지 능수능란하게 해치웠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니 도시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곳곳에 정보원을 심었다.
드룸윈드의 조직은 예전 1위 조직과 네 개의 중견 조직을 합한 크기였다.
현재, 도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영역을 가진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예전 1위였던 지역만 해도 아직 가장 넓은 알짜 지역이었다.
한데 거기에 중견 조직 네 개가 더 붙었으니 얼마나 큰 규모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큰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주변의 견제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 견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사방에 정보원을 뿌려서 다양한 정보와 소문을 수집하고자 한 것이다.
좀 급조한 느낌이긴 했는데, 그럼에도 제법 괜찮은 양질의 정보가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 성과를 얻었다.
드룸윈드는 득달같이 반태수에게 달려갔다.
반태수는 드룸윈드의 보고를 듣고는 눈을 빛냈다.
"우릴 노리는 놈들이 인원을 모으는 중이라고요?”
"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생각보다 모인 인원이 많습니다. 목표치도 높은 것 같고요.”
"인력은 더 안 필요하죠?”
"네. 이젠 괜찮습니다. 앞으로는 장기적으로 자체수급 해야죠.”
드룸윈드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소문을 흘려서 흔들어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켜보다가 언제 이쪽으로 오는지만 말해주시면 됩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한데 좀 묘한 소문이 있습니다.”
"묘한 소문?”
"그놈들이 진짜 노리는 게 우리 쪽에 있는 비행선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비행선을 노린다는 말에 반태수의 직감이 번득였다.
"그거 흥미롭군요.”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찾고 있던 그놈이 이번 일에 연관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혼란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원래는 한 달을 예상했는데, 고작 보름 남짓한 시간 만에 혼란이 가라앉고 있었다.
드룸윈드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혼란이 끝난다는 건, 반태수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길 떠나신 후에도 제가 주기적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뭔가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바로 연락 주십시오.”
안 그래도 스태플레톤을 좀 진득하게 지켜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반태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죠.”
이제 딱 하나 남았다.
아마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