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셰딤의 연구소 4 >
===========================
반태수는 차분히 주변을 탐색했다.
정확히는 마력 동결 물질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건지 확인했다.
아까 통제를 놔버렸을 때, 이면세계의 마력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력이 증발한 건 아니고, 이 지역에서 빠져나갔다.
이면세계의 마력은 그렇게 쉽게 빠져나갔지만, 반태수가 코어에서 뽑아낸 마력은 좀 달랐다.
자신이 가진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에 마력으로 코팅을 했는데, 그 마력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반태수가 통제권을 꽉 쥐고 있으면 멀쩡했고, 통제를 놔버려도 쉽게 흩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흩어지지만, 확실히 코어의 마력은 이면세계의 마력보다 훨씬 응집력이 강하고 끈끈했다.
이 정도면 마법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력을 쓰는 것이 평소보다 훨씬 불편하긴 했다.
무언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아끄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마력으로 코팅한 상태인데, 왜 내부에 있는 코어를 다루기가 어려워졌을까?
반태수는 그제야 마력 동결 물질이 그저 단순히 마력을 흩어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것도 있을 테고.’
이런 식이면 외부로 마력의 실을 뽑아냈을 때, 그게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 없다.
반태수는 자신을 포위하듯 천천히 다가오는 자들을 슥 둘러봤다.
이 중 절반은 원래 능력자였고, 나머지 절반은 일반인이었다.
능력자들의 마력은 싹 날아가서 없었다. 일반인이나 마찬가지 몸이 된 것이다.
"자자,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시고…… 우리 그냥 서로 편하게 알아서 이리로 오는 건 어때?”
가장 앞에 선 사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반태수는 일단 자신의 몸에 내구력 강화를 걸었다.
이건 패시브로 원래 걸어뒀는데, 여기 들어오면서 흩어졌다.
이면세계의 마력으로 걸어뒀던 탓이다.
하지만 그건 솔직히 방심의 대가였다.
만일 미리 마력 동결 물질이 살포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뭔가 조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코어의 마력으로 내구력 강화를 다시 거니, 굉장히 든든했다.
아주 탄탄하게 마법이 육체에 잘 안착했다.
반태수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아주 꼼꼼하게 육체 곳곳에 마력을 보냈다.
마력의 실을 뽑아 몇 가닥을 겹쳐 꽈배기처럼 비비 꼰 다음 힘줄과 뼈, 신경을 그걸로 꽉꽉 채웠다.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갔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넘쳐흘렀다.
반태수는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도끼를 든 팔의 근육이 상당했다.
"사로잡으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말이야. 어때? 팔도 안 자르고 다리도 안 자를 테니까.”
반태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사내를 보면서 주위 다른 자들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썼다.
저렇게 앞에서 깔짝대면서 정작 공격은 다른 쪽에서 들어올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반태수 뒤쪽에 있던 자가 냅다 총을 쐈다.
타앙!
반태수는 그 순간 옆으로 몸을 던지듯 굴렀다.
“으악! 깜짝이야! 야이씨! 갑자기 총을 쏘면 어떡해! 맞을 뻔했잖아!”
도끼를 든 사내가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민첩하게 움직였다.
반태수는 몸을 굴려서 벌떡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던 자가 손에 든 거대한 해머를 내리찍었다.
반태수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자세를 살짝 낮춰 해머를 피했다. 그리고 팔꿈치로 사내의 가슴을 콱 찍었다.
꽈득!
"커헉!”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가는 사내를 반태수가 계속 쫓아갔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돌파한 것이다.
반태수는 날아가는 사내의 멱살을 꽉 잡고 몸을 회전시키며 그자를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콰직!
뒤에서 쫓아오던 자와 충돌하며 나동그라졌다.
반태수는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한데 그 순간, 계단 위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콰!
누군가 기관총을 가져와 마구 갈긴 것이다.
반태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내구력 강화를 믿고 그냥 밀어 붙였어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혹시 모르니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위에 몇 명이 모여서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가는 것도 좀 그렇고 말이다.
‘이거 영감한테 커피를 걸지 말 걸 그랬나?’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도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다.
마법도 쓰려고 마음먹으면 웬만한 건 쓸 수 있었고.
아무리 마력이 동결되었다고 해도 바짝 붙으면 점혈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야! 조심해야지! 꼭 살리라고 하셨다고! 배후를 캐야 나중에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지!”
도끼를 든 사내가 계단 위쪽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 다음, 주위를 둘러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밖으로 못 빠져나가게 해라. 아까 보니까 은신 실력이 장난 아니야. 마력 쓰기 시작하면 감당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일단 다리부터 노려.”
다리를 부러뜨려 놓으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길 테니 잡힐 수밖에 없으리라.
지하에 있던 자들이 신중하게 반태수를 포위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 마력이 담기지 않은 무기를 든 자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반태수는 거기까지 확인한 다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코어에서 마력을 더 뽑았다.
내구력에 마력을 더 담아 조금 더 강화하고, 뼈와 근육, 신경에 마력을 한 가닥씩 추가했다.
그리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졸지에 몸으로 싸우게 되었다. 한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두려움이야 처음부터 없었고, 긴장감도 솔직히 별로 없었다.
'정면에 다섯.’
도끼를 든 사내 양옆으로 두 명씩 있었는데, 둘은 길쭉한 칼을, 나머지 둘은 구멍이 뻥 뚫린 아이 팔뚝만 한 쇠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반태수는 왠지 거기서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화염방사기네.’
견적이 끝났다. 반태수는 즉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꽈득!
바닥이 움쭉 파이며 뒤로 흙이 팍 하고 튀었다.
반태수는 순식간에 도끼 사내를 파고들었다.
사내가 반사적으로 도끼를 휘둘렀지만, 이미 반태수가 파고든 이후였기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반태수는 사내의 양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꽈드득!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반태수는 사내를 지나쳐 가며 목을 휘어잡았다.
"커어어억!”
졸지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이 잡힌 사내가 눈을 까뒤집었다.
반태수는 그를 한 바퀴 돌린 다음 계단 쪽으로 휙 던졌다.
높이 떠서 날아간 사내가 계단 바로 앞에 떨어졌다.
콰다당!
반태수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진했다.
후웅! 후웅!
칼이 위험한 각도로 날아왔다. 반태수는 가볍게 피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불꽃이 쏟아졌다.
화르르르륵!
역시 아까 그건 화염 방사기였다.
반태수는 가볍게 몸을 한 바퀴 굴리는 것으로 화염을 피해냈다.
그리고 돌아서며 손을 세운 채 크게 휘둘렀다.
스아아악!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력의 끈이 마치 채찍처럼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촤촤촥!
놀랍게도 채찍에 맞은 곳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미친! 마력?”
다들 경악했다.
상체가 잘려 죽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악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여긴 마력 동결지대다.
한데 여기서 마력으로, 그것도 원거리에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다들 조심해!”
하지만 조심해 봐야 뭐 하겠는가. 반태수는 이미 그곳에 없는데.
반태수는 어느새 계단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위에서 채 뭔가를 할 틈도 없었다.
뛰어오를 때 마력을 폭발시켜 추진력을 얻었으니까.
반태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1층으로 올라갔다.
심지어 손에는 기절시켜서 계단 아래 던져두었던 도끼 사내까지 들고 있었다.
"마력 동결 살포해! 어서!”
1층 곳곳에서 마력 동결 물질이 팍팍 터졌다.
주변 마력이 싹 날아가면서 1층 곳곳이 마력 동결 지대가 되었다.
반태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마력 동결지대와 그렇지 않은 지역이 뚜렷하게 보였다.
마치 마력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력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마력은 그저 마력에 대한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감각이 높아서 마치 보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긴 했지만, 엄연히 진짜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아무튼 마력 동결지대가 눈에 보이니 그렇지 않은 곳으로만 다니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반태수는 빠르게 달려 적당한 곳에서 왜곡을 걸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놈에게 점혈을 걸었고.
이놈을 굳이 챙겨온 이유는 아는 것이 많아 보여서였다.
아까 총수 운운 하던 놈이 바로 이놈이었다.
총수라면 셰딤의 총수를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놈은 셰딤의 총수와 안면이 있는 놈이 분명하다.
잘하면 단숨에 셰딤의 머리를 칠 수도 있으리라.
‘그나저나…… 난리가 났네.’
사방이 비상이었다.
무기를 든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반태수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을 수십 명의 능력자들이 막아섰다.
반태수는 분위기를 보며 주변 마력을 슬슬 모아 몸에 둘렀다.
소모한 이면세계의 마력을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마력을 모으다보니 문득 지구가 떠올랐다.
‘이번엔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었네.’
아무튼 여기서의 일은 이제 다 끝났다. 남은 건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맡기면 된다.
사실 반태수가 혼자서 여길 전부 박살 낼 수도 있었다.
마력 동결 물질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인지 빈 곳이 채워지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았다.
마력 동결 지대도 시간이 좀 흐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테고.
그러니 적당한 마법 몇 개만 써도 충분히 여길 부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데드릭 벨크리스가 난리를 피울 것이다. 분명히 삐지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잘 지켰으니까 주자.”
반태수는 마력의 실을 뽑아내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었다.
마법이 발동하며 거대한 화염구가 긴 꼬리를 달고 날아갔다.
지하 2층에서 쓰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이었다.
“막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화염구를 향해 공격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콰콰콰콰콰콰!
꽈앙! 꽈앙! 꽈앙!
두두두두두두!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을 받은 화염구는 총알과 포탄은 통과시켜 버리고 거기에 담긴 에너지만 고스란히 받아먹었다.
공격을 하면 할수록 화염구의 온도가 더 높아지고 크기도 조금씩 더 커졌다.
"물! 물 가져와!”
뒤늦게 물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꽈아아아앙!
화염구가 엘리베이터를 직격했다.
콰르르르르!
엘리베이터가 부서지고 녹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지반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신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반태수는 그걸 보며 남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가면서 아는 것이 많을 것 같은 사람, 그러니까 높은 지위에 있어 보이는 사람을 점혈로 잡아서 같이 데려갔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 반태수가 추가로 잡은 사람의 수가 여섯 명이었다.
총 일곱 명의 포로를 확보한 반태수는 엘리베이터 앞을 막아선 자들에게 동시에 점혈을 걸었다.
"이쪽 마력은 왜 그냥 뒀지?”
당연히 여길 가장 먼저 신경 썼어야 하지 않겠나.
반태수는 점혈로 쓰러진 자들을 전부 치웠다.
그리고 가장 큰 엘리베이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십 개의 마력 줄기들이 쏟아져 나가 엘리베이터를 사방에서 움켜쥐었다.
반태수가 주먹을 꽉 쥐니 엘리베이터가 그대로 우그러지며 밖으로 끌려나왔다.
꽈드드드득!
꽈앙!
우그러진 엘리베이터를 뒤로 던져버린 반태수가 텅 빈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위로 쭉 날아올랐다.
물론 일곱 명의 포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태수가 지상으로 훅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로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연락했다.
잠시 후, 데드릭 벨크리스가 크게 웃으며 날아왔다. 아니, 높게 점프를 하며 날아오는 것과 비슷하게 이리로 왔다.
"이제 부수면 되는 거냐?”
"네. 영감님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구나.”
데드릭 벨크리스는 엘리베이터 통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걸 본 반태수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까 그렇게 밖에서만 공격하라고 했는데.”
안에는 마력 동결 지대가 아직 곳곳에 있다.
그 중 하나에 걸리면 아무리 데드릭 벨크리스라고 해도 위험하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힘은 가진 마력과 유물로 도배한 장비 덕분이니까.
"하아, 이 영감탱이 진짜 왜 이렇게 사고를 쳐?”
반태수는 포로들을 적당한 곳에 던져두고 대충 왜곡으로 가렸다.
그리고 한숨을 쭉 내쉬었다.
여기가 무너지면 지하에서 갇히게 된다. 깊이가 무려 30미터나 되는.
반태수는 마력을 써서 남은 네 개의 엘리베이터를 뽑아냈다.
이제 다섯 개의 통로만 남았다.
여기가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강화가 답이다.”
반태수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이 빛가루로 변했고, 그 빛가루들이 전부 엘리베이터 통로에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한 번으로는 안 된다.
반태수는 그 뒤로 네 번이나 비슷한 작업을 했다.
그리고 통로로 뛰어들었다.
***
데드릭 벨크리스는 호기롭게 30미터나 되는 엘리베이터 통로로 뛰어내렸다.
전투복이 꽉 조여지며 근육에 힘을 주고 신경을 달궜다.
쿠웅!
바닥에 착지한 데드릭 벨크리스는 웅크렸던 몸을 펼치며 단숨에 앞으로 뛰어나갔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다들 무기를 들고 있었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자들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힘 좀 쓸 수 있겠군.”
데드릭 벨크리스는 두 주먹에 마력을 꽉 채운 다음 마구 휘둘렀다.
꽈과과과과광!
달려오던 자들이 박살 나며 나가 떨어졌다.
"크하하하! 내가 데드릭 벨크리스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흥에 겨워 크게 소리치며 두 번째 무리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정확히 절반을 이동한 순간, 갑자기 전투복이 확 풀렸다.
근육의 힘이 빠졌고, 달아오르던 신경도 차갑게 식었다.
더 문제는 몸속에 있던 마력이 싹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어?”
데드릭 벨크리스는 더 이상 돌진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섰다.
자신이 처리하려던 두 번째 무리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그들이 사납게 웃으며 총구를 겨눴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