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버트람 뷰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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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람 뷰고르는 호텔 옥상에 착륙한 비행선에서 내렸다.
호텔 옥상에는 그의 비행선 말고도 한 대의 비행선이 더 있었다. 아마 저 비행선이 살라자 샤마쉬의 것이리라.
버트람 뷰고르는 살라자 샤마쉬의 비행선을 힐끗 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던 그 비행선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비슷하긴 한데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래서 확인 차 비행선으로 다가갔다.
비행선에는 항시 대기 중인 승무원이 세 명 있었다.
승무원들이 돌아가면서 비행선 대기 근무를 서는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다가오는 버트람 뷰고르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버트람 뷰고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비행선, 살라자, 그 아이 것이 맞느냐?”
"예. 맞습니다.”
"내가 알던 비행선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최근 비행선을 바꿨나?”
"예. 비행선을 바꾸셨습니다.”
그러자 버트람 뷰고르의 눈이 번득였다.
살라자 샤마쉬의 비행선은 아주 유명하다. 그와 비슷한 비행선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살라자 샤마쉬의 비행선과 똑같이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행선 내부 인테리어에 살라자 샤마쉬가 직접 개입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결정해서 만들어진 결과니까.
워낙 세세한 것까지 다 살라자 샤마쉬의 손길이 닿아 있어서 그저 눈으로 대충 보는 것만으로는 그걸 재현할 수가 없었다.
살라자 샤마쉬의 비행선은 탐나는 물건이었다.
버트람 뷰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수고들 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기업체들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비행선도 구입해야 한다.
‘일단 기업체들은 이후의 정리 부분을 나한테 넘기라고 하면 되겠고…… 비행선은 누구한테 팔았는지 먼저 확인해야겠군.’
일단 샤마쉬 가문에서 나온 자들을 전부 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뒤로 자신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장악하면, 기업체들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투자한 돈을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니다.
버트람 뷰고르는 마치 일이 전부 해결된 거나 다름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옥상에서 한 층 아래로 내려온 버트람 뷰고르는 살라자 샤마쉬가 머무는 방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살라자 샤마쉬의 비서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비서는 버트람 뷰고르를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버트람 뷰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숙인 비서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 살라자는 안에 있지?”
"예. 마침 식사를 막 시작했습니다.”
"그래? 나도 밥을 안 먹었는데 잘 됐군.”
버트람 뷰고르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요리가 잔뜩 차려진 커다란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도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살라자 샤마쉬였다. 보자마자 버트람 뷰로그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사람은 살라자 샤마쉬 옆에 앉은 청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든다. 5대 가문 사람은 아니다. 혹시 그렇다 해도 중요한 사람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버트람 뷰고르는 걸음을 멈췄다.
저 사람을 왜 가장 나중에 발견한 거지? 아무리 뒷모습이라지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이 버트람 뷰고르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여긴 웬일이야? 설마 나 보러 온 건가?”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버트람 뷰고르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그렇군. 설마 자네가 있을 줄은 몰라서. 나야 잘 지냈지. 자네 소식은…… 종종 들었네. 여전히 타노로스 놈들 때려잡으러 다닌다면서?”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뭐, 몇 놈 잡았지. 앞으로는 더 많은 놈들을 박살 낼 거고.”
"그래, 자네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한데 여긴 웬일인가? 내가 알기로……."
버트람 뷰고르는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정답게 밥을 나눠먹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게 다 편견이지. 우리가 얼마나 끈끈한 사이인데. 그렇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살라자 샤마쉬를 바라봤다.
살라자 샤마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예전에는 좀 데면데면했는데, 최근에는 함께 있는 시간이 떨어진 시간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가? 그건 내가 미처 몰랐군. 아무튼 자네, 여긴 웬일인가? 샤마쉬 가문 사람들이 퀴무르에 많이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자네가 함께 있을 줄 몰라서 묻는 걸세.”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데드릭 벨크리스가 아니라 살라자 샤마쉬였다.
"영감님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도와? 뭘?”
이번엔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번에 아주 지저분한 짓을 하는 연구소를 발견했거든. 한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냥 때려 부수는 거 말고는 없잖아. 그래서 자잘한 일 좀 도와달라고 불렀지.”
연구소라는 말에 버트람 뷰고르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설마, 이 모든 걸 데드릭 벨크리스가 주도했다고? 살라자 샤마쉬가 아니라?’
머릿속이 마구 엉켰다. 생각이 더 진행되지 않는다.
"일단 앉으시죠.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살라자 샤마쉬의 말에 버트람 뷰고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아, 그렇지. 밥 먹어야지.”
그는 테이블에 다가가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와중에도 열심히 떠들었다.
"그놈들을 때려잡았는데, 무슨 기업이 연결되어 있다네? 내가 그런 복잡한 일은 딱 질색이잖아. 그래서 이 친구를 불렀지. 기업체 정리 좀 해 달라고. 하, 아주 그냥 불법 비리로 떡칠이 된 놈들이더군. 내가 끝까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생각이야. 그런 놈들은 탈탈 털어줘야지. 안 그런가?”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이 귓구멍에 송곳처럼 팍팍 와서 꽂혔다.
버트람 뷰고르는 두통이 지끈지끈 일어났다.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상대는 데드릭 벨크리스, 함부로 그렇게 했다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되는 작자다.
버트람 뷰고르는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한 마디도 못 하고 음식만 꾸역꾸역 먹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니 머릿속이 약간이나마 정리가 되면서 여유를 조금 되찾았다.
버트람 뷰고르는 살라자 샤마쉬에게 슬쩍 말했다.
"그나저나 너, 비행선 바꿨더구나?”
"그렇게 됐습니다.”
버트람 뷰고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렇게 됐다고? 대답이 어쩐지 좀 묘하다.
"그럼 전에 쓰던 비행선은 어떻게 했지? 혹시 그대로 갖고 있으면 나한테 넘기는 건 어떠냐?”
살라자 샤마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그래? 좀 아쉽게 됐군. 그럼 누구에게 넘겼지?”
살라자 샤마쉬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겠다는 건가. 설마 찾아가서 비행선을 넘기라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 침묵이 거슬렸는지 버트람 뷰고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반태수가 나섰다.
"제가 받았습니다.”
버트람 뷰고르는 그제야 반태수에게 관심을 줬다.
지금까지는 그냥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는데, 살라자 샤마쉬의 비행선을 받았다는 한 마디에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자네는 누군가?”
그의 질문에 살라자 샤마쉬가 대답했다.
"이름은 반이고,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 특이하군.”
마법사가 성을 갖지 않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버트람 뷰고르는 성도 갖지 않은 마법사가 살라자 샤마쉬, 데드릭 벨크리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이 특이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마법사라는 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설사 서클이 아주 높은 고위 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버트람 뷰고르는 반태수를 스캔하듯 촘촘히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비행선 나한테 팔게.”
버트람 뷰고르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했다. 또 당연히 자신이 이렇게 얘기했으면 상대가 수긍할 거라 믿었고.
하지만 그 답은 반태수가 아닌 데드릭 벨크리스에게서 나왔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버트람 뷰고르를 노려봤다.
버트람 뷰고르는 깜짝 놀랐다. 저와 똑같은 눈빛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으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막무가내로 우기던 그때 딱 저런 눈이었다. 트라우마가 자극되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체 저 마법사가 뭐기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렇게나 싸고도는 건지 궁금했다.
"알았네, 알았어. 비행선 얘기 안 할 테니까 좀 진정하게.”
"내 앞에서만 그렇게 말하고 나중에 몰래 저놈 찾아가서 압박하려고? 내가 그 수법 모를 줄 아나?”
"난 그런 적 없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테고. 그러니 오해할 만한 말은 삼가주게나.”
"오해는 얼어 죽을.”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더 얘기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라 여겼다.
그 뒤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에서 다들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내 식사가 끝났다.
그러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대번에 말했다.
"밥 다 먹었으면 슬슬 가지? 뭐, 볼일이라도 있나?”
버트람 뷰고르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있지, 볼일. 자리 좀 비켜주겠나? 난 여기 살라자랑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는데.”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할지는 너무 뻔하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그렇겐 못하겠는데? 왜, 내 앞에서는 못할 얘긴가? 설마 지금 정리하는 기업체 처리를 네가 맡겠다고 빼앗으려는 건 아니지?”
버트람 뷰고르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정확히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저런 말을 하단 말인가.
‘저놈 저거 내가 아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맞아?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놈이 아닌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정말 그거였나 보네. 솔직히 말해. 너 그 기업체들이랑 뭐 있지?”
"그런 거 아닐세. 아끼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내가 또 그런 쪽에 밝지 않나.”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내가 보니까, 이 친구가 일처리 하는 것이 여러모로 너보다 훨씬 나아. 그러니 할 말 더 없으면 이만 가지?”
빨리 가야 커피를 마실 거 아닌가. 밥을 다 먹었으면 커피 한 잔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저놈 때문에 그걸 못하고 있으니.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을 확인한 버트람 뷰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후우. 알겠네. 이만 돌아가지.”
버트람 뷰고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라자 샤마쉬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그리고 나중에 네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같이 해서 밥이라도 한 끼 하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들먹이는 것 역시 나름의 압박이었다.
아마 버트람 뷰고르는 저 자리를 최대한 빨리 만들고자 할 것이다.
살라자 샤마쉬가 기업체들을 싹 정리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말이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래. 조만간 연락하마.”
버트람 뷰고르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흥, 하여간 음흉한 놈. 저거 언젠가 내가 아주 그냥 박살을 내야 하는데.”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반태수를 바라봤다.
"뭐하냐? 밥도 다 먹었고 불청객도 갔는데 얼른 커피나 마시자.”
"저한테 커피 맡겨놨습니까?”
"야,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내가 언제 맡겨놨대? 좋은 건 같이 좀 나누자, 뭐 그런 거지. 얼른 얼른 하자, 이러다 나 쓰러진다."
저렇게 튼튼한 영감이 쓰러지긴 뭘 쓰러진단 말인가.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준비했다.
각각 커피를 음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버트람 뷰고르 때문에 살짝 망가졌던 분위기가 어느새 차분히 정리되었다.
커피를 다 마신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라.”
반태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아, 방도 많으니까 그냥 자고 가.”
그 다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아침은 토스트 어때? 괜찮지?”
목적이 이거였구나.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살라자 샤마쉬에게도 토스트를 한 번 맛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겸사겸사 여기서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저 음흉한 놈이 그냥 물러갈 리 없지. 아마 여기서 나가면 제법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반태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거 기대되네요.”
왠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
"자네를 내 전속 요리사로 임명하고 싶군.”
"무슨 개소리야! 전속이 되려면 내 전속이 되어야지!”
살라자 샤마쉬는 어이없는 눈으로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닙니까. 설마 반 마법사가 요리사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에도 데드릭 벨크리스는 정색했다.
"나 커피랑 토스트에는 진심이야.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안 건드립니다. 전 가끔 이 맛을 볼 수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살라자 샤마쉬는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껏 좋은 기분을 즐긴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양반이 이제 슬슬 방해를 시작할 테니, 거기 대비해서 몇 가지 조치를 해야겠습니다.”
살라자 샤마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데드릭 벨크리스와 반태수도 함께 일어났다.
이제 일 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