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다른 종족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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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쟤들이나 설득하죠.”
반태수의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흥분을 좀 가라앉혔다.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다른 종족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 않습니까? 굳이 나한테 무리해서 의뢰 안 해도 될 테고."
"그들이 드러나선 안 돼요. 가문에서 문제 삼을 테니까.’’
또 뭔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모양이다.
반태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복잡한 문제는 알면 알수록 독이 된다. 그냥 모르는 게 약이다.
"자리 피해드려요?”
반태수는 케트라 브리저가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게 낫다고 판단해 그렇게 물었다.
물론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이미 마킹이 되어 있기에 오가는 대화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던진 말이었는데, 케트라 브리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반 마법사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요, 뭐."
그건 맞는 말이다.
반태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카랑클 무리에 도시가 박살 났을 것이다.
그걸 막아냈어도 그 다음 바로 이어진 흰털 폭음거인에 의해 폐허가 되었을 테고.
그 두 가지를 막아내고 주변 마수를 대부분 정리한 반태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여기 있는 어둠 속성 종족들이 작정하고 도시를 공격하러 들어왔다면, 아마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까지 반태수가 다 막아준 것이다.
반태수에게 의뢰하길 정말 잘했다.
케트라 브리저는 그런 생각과 마음을 담아 반태수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는데, 그 때문인지 반태수를 바라보는 케트라 브리저의 눈빛이 왠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그녀는 반태수를 제법 오래 바라봤다.
반태수도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케트라 브리저였다. 그녀는 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채로 다시 어둠 속성 종족들에게 집중했다.
반태수는 근처에서 케트라 브리저가 어둠 속성 종족들을 열심히 설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내용은 정말 별 거 없었다. 요약하면 자신을 믿어달라는 거였다.
이곳 아리크에서 다른 속성 종족들도 전부 같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간곡히 얘기했다.
진정성이 보여서였을까, 설득이 이어질수록 다들 조금씩 동요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을 이끌고 온 어두운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스태플레톤이 더 좋은 선택지다. 그리고 아리크는 언제 건설이 끝날지 알 수 없지 않느냐. 최소 10년은 걸리겠지. 우리도 그동안 나름대로 발버둥을 쳐볼 생각이다.”
케트라 브리저는 더 이상 설득이 안 먹힐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설득의 과정이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으니까.
처음의 그 들끓던 적개심이 이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케트라 브리저와 어두운 사내의 대화가 멎었다.
둘 다 더 할 말이 없어서 침묵만 유지하고 있었다.
반태수는 그걸 확인하고 슬슬 나섰다.
"그래서 이제 너희는 어쩔 거냐?”
반태수의 물음에 어두운 사내가 눈동자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의뢰에 실패했으니 대가도 못 받을 거 아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그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얼른 나섰다.
"기다려야지요."
반태수가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케트라 브리저가 말을 이었다.
"아리크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두운 사내가 피식 웃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반태수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어두운 사내에게 눈짓을 했다.
"우리 종족은 살아갈 터전이 필요하다. 지금 머무는 곳은 이제 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어.”
"살기 어렵다고요? 왜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번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안정적으로 스태플레톤까지 이동해서 거점을 확보해야 다른 종족들도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대체 왜……!”
"살기 어려워졌다는 건 별 게 아니야. 물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떨어지고 환경이 열악해지면 못 사는 거지."
케트라 브리저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본 어두운 사내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우리 전부가 속았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사는 땅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게 그놈들일 수도 있으니까.”
"그놈들?”
"메나스 휘슬러.”
이들에게 의뢰를 줬다는 놈이다. 지속적으로 헛소리를 해서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놈이기도 하고.
"그놈에 대해서 뭐 좀 아는 게 있나?”
반태수의 물음에 어두운 사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아까 그놈을 미행해서 정체를 밝혀냈다고 했다는 거, 기억합니까?”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정체를 감췄는데, 미행해서 정체를 알아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놈을 대체 뭘 믿고 이런 의뢰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행하다보니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하지만 명확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한데 그가 만났던 자들 중에 특이한 마법사들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마법사?”
"메나스 휘슬러도 마법사입니다. 6서클 마법사. 한데 그가 만난 마법사들은 서클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었는데도.”
어둠 속성 종족은 밤에 마력에 대한 능력이 대폭 향상된다. 당연히 감지력도 늘어난다.
"마법사인 건 어떻게 알았지?"
"그들이 마법 쓰는 걸 봤습니다. 기괴한 마법이었습니다. 생명력을 갈취해서 마력으로 만들더군요.”
일종의 흑마법인 모양이다.
"그래서 의심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땅의 지력이 약화되고 풀과 나무가 시들고 물이 말라비틀어지는 현상이 왠지 그때 본 마법과 연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
그럼 그 메나스 휘슬러라는 놈은 일부러 속성 종족의 땅을 황폐화 시킨 다음, 스태플래톤으로 그들의 이주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는 뜻이다.
수상하다. 애초에 목적이 속성 종족들을 스태플래톤으로 데려가려는 것 같지 않은가.
스태플레톤은 무법도시다. 5대 가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그런데도 거기 꼭 가야하나?”
반태수의 물음에 어두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어느새 점혈이 사라져 마비가 풀렸다. 반태수의 조치였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반태수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거기가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두운 사내는 시종일관 반태수에게 정중했다. 정신적으로 굴복해서 그럴 수도, 아니면 힘에 짓눌려서일 수도, 아니면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전부 몇 명이지?”
"저희 종족의 인원 말입니까?”
어두운 사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7백 명이 좀 넘습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네?”
"이 근방에 자리 잡고 사는 동족의 수가 그 정도입니다.”
그 말에 반태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 자리를 잡은 다른 종족들도 수가 다 비슷한가?”
"예. 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차이가 나봐야 백 명 안팎일 겁니다.”
"총 3천 명 정도 되겠네.”
반태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스태플레톤으로 내가 데려다주지.”
어두운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케트라 브리저의 눈도 커다래졌다.
아니,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던 다른 어둠 속성 종족들의 눈도 놀람으로 커졌다.
"그런데 거기 생각보다 만만한 도시는 아니야. 어쩌면 너희 가서 다 죽을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일단 도시에 자리만 잡으면 살아남을 자신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저렇게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섣불리 덤볐다간 몰살당하기 딱 좋다.
스태플래톤은 수백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그 중에는 정말 별 것 아닌 어설픈 놈들도 많지만, 진짜 강력한 놈들도 있다.
거기 놈들은 정말 싸우겠다고 마음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속성 종족들이 음습한 수작에 강할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많이 깨지고 박살 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남은 어둠 속성 종족들의 점혈이 일제히 풀렸다.
"오늘은 얌전히 돌아가라. 나중에 내가 알아서 연락할 테니까.”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이대로 돌아가면 연락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서 연락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반태수가 하겠다고 하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감님 좀 만나고 와야겠네.”
도움이 좀 필요하다.
***
반태수는 케트라 브리저와 함께 다시 아리크로 돌아왔다.
그녀는 숙소로 가지 않고 끝까지 반태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태수도 굳이 떨쳐내지 않았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영역화를 최대한 확장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아마 오늘 더 이상의 습격은 없을 모양이다.
저 멀리 데드릭 벨크리스가 보인다.
보아하니 유물 몇 개가 작동 중이었다. 탐지와 감지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영감님!”
반태수가 데드릭 벨크리스를 불렀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고개를 휙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케트라 브리저도 확인했다.
"에잉, 쯧쯧.”
데드릭 벨크리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요리를 다 해서 숟가락으로 뜬 다음 입에 넣어줬는데, 그걸 씹어 삼키지 못하고 도로 뱉은 꼴 아닌가.
"야, 여기에 오면 어떡해! 지금 여기 있을 때야? 분위기 좋은 호숫가에 있어야지!”
반태수는 못 들은 척 자기 할 말을 꺼냈다.
"심문 끝났거든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확 썼다.
"아이구, 그러셨어요? 그 시간에 심문을 하셨어요? 내일 해도 되는 심문을 굳이 그렇게 하고 싶으셨어요?”
"아이, 진짜. 알아서 한다니까요?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왜 그렇게 보채십니까?”
데드릭 벨크리스는 못미더운 눈으로 반태수와 케트라 브리저를 번갈아 바라봤다.
"뭐, 알아서 하겠다니 한 번 믿어보마.”
그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걸 보고는 히죽 웃었다. 더 잔소리를 할 일은 없을 모양이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날 찾아온 이유는?”
반태수는 아까 심문을 통해 알아낸 얘기를 쭉 해준 다음 물었다.
"영감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난 거기 못 간다.”
"예?”
반태수는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못 간다니. 가만, 못 간다고?
"못 간다니요? 스태플레톤에요?”
"그래. 거긴 5대 가문 출신은 아무도 못 간다. 금지(禁地)라고 할 수 있지.”
"아니 무슨 5대 가문이 못하는 게 있습니까?”
"정확히는 아주 높으신 분들만 드나들 수 있는 지역이지.”
"영감님도 높으신 분 아니었습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높으신 분은 무슨. 아직 멀었다. 여기서 적어도 세 단계는 올라가야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어."
반태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긴 왜 못 가게 하는 겁니까?”
"그 이유도 높으신 분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알아내려고 시도해서도 안 되고.”
반태수는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식이면 스태플레톤이 단순한 무법도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이거, 그 녀석들 스태플레톤으로 보내도 괜찮나?
가자마자 봉변당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어차피 그건 거기에서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 정도는 극복할 수 있어야 거기서 살아남을 거 아닌가.
"그럼 영감님 도움은 못 받겠군요.”
"그래. 그러니까 가신 가문 애들한테 도와달라고 해.”
"좀 신기하긴 하네요. 가신 가문은 괜찮고 5대 가문은 안 된다니.”
데드릭 벨크리스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더 얘기해 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그런 곳이 또 있습니까? 금지로 지정된 도시나 지역이.”
"몇 군데 있지. 전부 도시고. 사실 도시 외 지역은 5대 가문에서도 딱히 관리하거나 하지 않아."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지로 지정된 도시도 스태플래톤처럼 5대 가문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무법도시입니까?”
"그렇긴 하지. 오히려 거긴 더 심각해. 스태플레톤은 그래도 관광상품이라도 있잖아. 나머지 도시는 진짜 지옥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래. 가보진 않았지만.”
"나중에 위치 좀 알려주시죠.”
"왜? 가보게?”
"궁금하잖습니까. 영감님은 안 궁금해요?”
"글쎄.”
애매한 답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건 나중 일이다.
"그나저나 너, 정말로 그 녀석들 스태플레톤에 데려다 줄 거냐?”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죠.”
"그렇게 해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반태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그리고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내심 어쩌고 하는 말을 막 꺼내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촉이 그렇다고요. 도움의 손길을 한 번 내밀어 줘야 할 것 같은 촉.”
"얼어 죽을 촉은 무슨.”
그렇게 말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도 상당히 많은 상황을 촉으로 짚어나가곤 해왔다.
그래서 촉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그냥 도움만 줄 리 있습니까. 대가도 받을 겁니다.”
"대가? 뭐로? 걔들한테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게 남아 있을 거 같아?”
"몸으로 받을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몸?"
데드릭 벨크리스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반태수의 어깨를 툭 쳤다.
"새끼, 제법인데?”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해봐야 말만 길어지고 기만 빠질 테니까.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케트라 브리저가 반태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반태수는 뒷머리를 또 긁적였다.
이걸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