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기습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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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이번 싸움으로 얻은 모든 것들을 개척도시 아리크가 아닌, 숲 속 호숫가로 옮겼다.
굳이 아리크에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세작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싹 정리를 하고 나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이것들은 다 뭐냐?”
데드릭 벨크리스의 비행선이 있는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는 아까부터 궁금해서 고개를 쭉 빼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리가 다 끝난 것 같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물론 거의 다 와서는 여유로운 척 느긋한 걸음으로 바꿨지만.
"도시를 기습하려던 놈들이요.”
"뭐? 도시를 기습해?”
데드릭 벨크리스는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포로들을 슥 둘러봤다.
"눈동자만 굴리는 걸 보니 점혈인지 뭔지를 쓴 모양이구나. 큭큭큭. 살라자 그 애송이 놈, 아직도 감을 못 잡고 헤매고 있는 모양이던데."
아주 즐겁다는 듯 키득거리던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번엔 시선을 마수 사체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저 마수는 뭐냐? 보아하니 3레벨짜리 흰털 폭음거인 같은데.”
반태수는 흰털 폭음거인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충격파 때문에 폭음이 쉴 새 없이 터졌으니까.
한편, 데드릭 벨크리스가 등장했을 때, 그를 알아본 사람이 포로 중에 두 명 있었다.
그들은 경악한 눈으로 데드릭 벨크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작전을 실패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이쪽에 개입한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데드릭 벨크리스를 반쯤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을 때, 반태수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저놈들이 끌고 온 겁니다.”
그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포로들과 반태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게 가능해? 보아하니 그다지 실력 있는 놈도 없는 것 같은데, 목숨 내놓고 끌고 온 건가?”
"장비가 좋던데요?”
"장비?”
데드릭 벨크리스가 포로들을 위아래로 훑으며 무슨 장비를 가졌는지 확인해봤다.
하지만 눈에 익은 장비는 없었다.
"다리에 찬 저게 대단한 장비인 건가? 겉으로만 봐선 잘 모르겠는데?”
반태수가 턱짓으로 강철관을 가리켰다.
"장비, 저기에도 있잖습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강철로 만든 거 말하는 거냐? 저게 장비였어?”
"아래에서 보니까 그냥 큰 강철 덩어리처럼 보이죠? 위에서 보면 딱 알 수 있게 생겼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점프했다.
꽝!
바닥에 있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고, 데드릭 벨크리스는 50미터쯤 위로 쭉 올라갔다.
졸지에 모래 샤워를 하게 된 포로들이 미친 듯이 눈을 껌뻑였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이다.
반태수는 이럴 줄 알고 미리 모래를 차단했기에 모래를 한 알갱이도 맞지 않았다. 그저 위로 올라간 데드릭 벨크리스를 힐끗 쳐다봤을 뿐이다.
이내 다시 내려온 데드릭 벨크리스의 표정은 여전히 황당했다.
"이거 설마 관이냐?”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철관의 기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탐나는데?”
"안 드릴 겁니다.”
"달라고 안 해! 있어봐야 쓸 데도 없고. 거대 마수를 사로잡아서 저 관에 넣는다는 건데, 그게 가능하면 그냥 잡아다가 원하는 곳에 던지면 되잖아. 왜 저런 쓸데없는 관을 만들어? 철 낭비도 아니고.”
그 말에 반태수가 멈칫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드릭 벨크리스가 한 말에 수긍하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포로들을 쳐다봤다.
"슬슬 심문해야겠네요. 저놈들 뒤를 아주 낱낱이 캐버릴 겁니다.”
"그래, 수고해라.”
데드릭 벨크리스가 낄낄 웃으며 자신의 비행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반태수의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아났다.
포로들을 쳐다보는 반태수의 눈빛이 왠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포로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반태수가 심문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점혈을 이용한 고통을 15초씩 안겨줬다.
그거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포로가 술술 입을 열었다.
주요 인물이 아닌 평범한 용병들에게는 얻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공평하게 15초의 점혈은 한 명도 빼지 않고 선물해 주었다.
다들 선물을 받자마자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크게 감동한 줄 알았으리라.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뭐 하나 물어보면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손가락을 살짝 들었는데, 그 즉시 경기를 일으키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애썼다.
예상했던 대로 용병들은 하나의 용병단에서 나왔다.
잔카라는 이름의 용병단이었는데, 여러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용병단이었다.
잔카는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한 용병단이었다.
유명한 용병단은 웬만해서는 불법적인 의뢰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하기 싫은 의뢰도 받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번 의뢰가 아마 그런 경우인 모양이다.
‘뭐, 내가 판단할 필요 없지. 살라자 샤마쉬 쪽으로 토스해 버리면 돼.’
반태수는 용병들에게 얻은 자잘한 정보를 정리해 살라자 샤마쉬에게 보냈다.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제 잔챙이들 심문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월척들 심문을 할 차례가 되었다.
일단 심문이 끝난 용병들은 다른 곳으로 치워 버렸다.
그들은 조만간 살라자 샤마쉬가 사람을 보내서 압송해 갈 것이다.
더 캐낼 것이 있으면 캐고, 그 이후에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반태수는 남은 자들을 슥 둘러봤다.
저 중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능력자도 마법사도 아니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두 사람에게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분리했다.
반태수는 일반인 두 명을 강철관 속으로 옮겼다.
강철관 안에 들어가 있으면 외부와 차단된다. 빛도 소리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곳에 잠시 방치하면서 마법사와 능력자들을 심문하기로 했다.
점혈까지 여러 번 동원해서 심문을 진행했고, 얻은 소득은 그들을 움직인 사람이 브리저 가문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법사와 능력자들 전부 브리저 가문 소속이었다.
가문 내에서 별 영향력도 없고, 인상적인 실력이나 실적을 올리지도 못한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었다.
***
"그런 자들에게 호만 장로가 접근했다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며 반태수를 바라보는 케트라 브리저의 눈빛이 복잡했다.
호만 브리저는 그녀를 제법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한데 뒤에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3레벨 거대 마수를 끌고 왔다고 했죠?”
"흰털 폭음거인이라고 하더군요.”
케트라 브리저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우리 도시의 병력으로 막아내기에는 상성이 좀 안 좋은 마수네요."
개척도시 아리크의 병력은 대부분 물리력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속성 공격이 가능한 마법사가 몇 명 있고, 7서클 마법사인 케트라 브리저도 있지만, 흰털 폭음거인을 쓰러뜨리기엔 화력이 모자란다.
게다가 흰털 폭음거인은 주변에 끊임없이 충격파가 터진다. 물리력에 특화되어 있기에 도시에서 충격파가 터지면 건물이고 뭐고 다 부서질 것이다.
"작정한 느낌이죠?”
반태수의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쩔 겁니까? 가문에 보고하고 호만 브리저 장로가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겁니까?”
케트라 브리저가 고개를 저었다.
"해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아예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나아요. 보고가 안 들어가면 호만 장로도 당황할 거잖아요. 차라리 그게 나아요.”
"잘 생각했습니다. 도시 개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차츰차츰 일이 풀릴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케트라 브리저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반태수가 굳이 얘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살라자 샤마쉬가 배후를 캐려고 준비하고 있다거나, 포로에 섞여 있던 일반인 두 명의 심문 결과라거나.
그렇게 대충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천막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섰다. 어차피 더 할 얘기도 없었다.
천막을 나가니, 왜 소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비행선이 도착한 것이다. 개척도시 아리크의 비행선이.
오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겉모습은 아주 깨끗했다.
이내 비행선이 적당한 곳에 착륙했고, 그 안에서 조종사 두 명이 나왔다.
고작 며칠이었지만 고생을 좀 했는지 모습이 초췌했다.
그들은 반태수에게 인사하고 자신들이 원래 타던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조만간 호수에 한 번 놀러갔다 와야겠다.
***
"보내드린 자료는 다 보셨습니까?”
- 훌륭하더군.
"아마 실패한 걸 슬슬 알아차렸을 테니, 조만간 움직일 겁니다.”
- 상당한 역량을 그쪽으로 집중하고 있으니,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잡아낼 수 있을 걸세.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느낌도 별로 안 좋고요. 조심해야 할 겁니다.”
- 각별히 신경 쓰고 있으니 염려 말게. 아무래도…… 5대 가문 쪽 비밀 연구소 같은 느낌이라서 좀 더 철저히 파고들어볼 생각이네.
"비밀 연구소도 있습니까?”
- 제법 많지. 한데 내가 말하는 건 가문의 눈을 피해 몰래 운영하는 연구소를 말하는 걸세. 이런 건 흔치 않지.
"굳이 몰래 연구하는 거라면…… 걸리면 안 되는 연구를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 그렇지. 그 강철관, 아마 여러 개 있을 걸세.
그건 반태수도 예상했다.
묘한 느낌을 주던 일반인 두 명은 사실 비밀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그들이 이번 작전에 따라온 건, 연구 결과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강철관이 아니라 강철관 안에 있는 마수였다.
놀랍게도 마수를 강철관 안에서 배양해 성체로 키워내는 연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번에 가져온 건 고작 3레벨 거대 마수였지만, 나중에는 레벨이 훨씬 높은 거대 마수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레벨의 거대 마수는 그 자체로 굉장한 무기가 된다.
사실 반태수가 터무니없이 강해서 그렇지, 3레벨 마수만 해도 5대 가문이 나서지 않으면 막아내기가 정말 어렵다.
- 지금 그쪽과 관련해서 가문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외부 자금을 쓴 것 같네. 이쪽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안 보이는군.
“브리저 가문 쪽이 움직이면 그쪽 자금 흐름을 파악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외부 자금이라는 게 마음에 좀 걸립니다.”
- 타노로스 같은 조직이 개입되어 있을까봐 그러나?
"네.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조직도 있는데, 그놈들이 끼어있을지도 모릅니다.”
- 내가 잘 살펴보지. 그놈들이 좀 빨리 움직였으면 좋겠군.
"금방 움직일 겁니다. 이제 개척도시 건설을 방해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강철관도 찾아야 하고, 고용한 용병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봐야 하니까요.”
- 그럼 강철관을 아리크 근처에 갖다 놓는 것이 좋겠군.
"안 그래도 슬슬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유물이라서 보유량을 더 늘리기 어렵고, 하나하나가 소중할 테니 더 빨리 움직일 겁니다."
- 알아서 잘 하니 좋군. 참, 그나저나 영감이 거기 간 거 같은데,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고 전해주게.
"안 그래도 근처 호숫가에만 있습니다. 안 나설 거라고 하시더군요.”
- 그런가? 예전에는 너무 생각 없이 움직여서 골치였는데, 막상 저렇게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니 뭔가 좀 허전하군.
반태수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 커피가 다 떨어져서 자네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거 시간이 없어서 안타깝군.
"영감님 움직이죠, 뭐. 영감님 편에 보내드리겠습니다.”
- 그럼 나야 고맙지. 한데 영감이 하려고 할까?
"여기서 심심하게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말이나 꺼내보죠.”
-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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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만 브리저는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뭐? 강철관이 거기 있다고?”
그에게 보고하던 사내가 태블릿을 내밀며 대답했다.
"예. 남은 정보원이 사진도 보냈습니다.”
태블릿을 켜자 바로 사진이 보였다.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찍혀 있었다.
호만 브리저는 강철관을 보는 것이 처음이지만, 사진만 봐도 이게 강철관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래는 강철관이 뭔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외부 조력자들의 작전에 손을 보태면서 알게 되었다.
가문의 한직에 있던 능력자와 마법사를 선별해 보내기로 하면서 작전의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한데 이번 일이 실패로 끝나면서 거기 참여한 사람과 강철관이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호만 브리저는 그걸 찾기 위해 애써왔다.
한데 아리크에 있을 줄이야.
"그 정보원은 이걸 왜 이제야 보고한 건가? 일이 실패로 끝난 지가 언제인데.’’
"다른 곳에 있다가 오늘 아리크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오늘 들어왔다고?”
그럼 사라진 용병이나 자신의 수하들은 원래 강철관을 보관하던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호만 브리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한 숨 한 방으로 그들에게 남은 미련을 깔끔히 털어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거기에 사람 더 심을 수 있는 방법이나 고민해 봐.”
"예."
사내가 물러가자, 호만 브리저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자신이 원래 쓰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들이 보내준 스마트폰이었다.
5대 가문의 감시에서 벗어난 스마트폰이라고 했다.
아무튼 이제 위치를 알아냈으니 그들에게 연락해서 새로운 작전을 계획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