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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법사다-175화 (171/351)

175화.  < 개척도시 아리크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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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비행선으로 돌아와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었기에 남은 시간은 푹 쉬기로 했다.

물론 몸만 쉬고 머리는 열심히 돌려야겠지만.

지금도 몇 가지 연구를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그 중 하나가 아공간이었다.

아공간에 대한 단서를 잡아 세 개의 두뇌를 할당해 아공간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만일 이게 완성되면 굉장히 재미있는 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커피를 한 잔 내린 다음,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리고 마킹을 통해 들어오는 대화를 확인했다.

케트라 브리저가 심문하는 것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심문당하는 사내의 태도는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그는 묻는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했다.

아까 겪은 일이 있으니 약발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저럴 것이다.

"슬슬 약발이 떨어지려나본데.”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공포도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기 마련이다.

아까의 고통을 잊고 공포가 희석되면 자연스럽게 반항심이 고개를 들게 되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성실히 대답한 것만으로 그놈에게 뽑을 만한 정보는 다 뽑았을 것이다.

한데 별로 영양가는 없었다.

그저 의뢰를 받아서 일하는 용병에 가까운 놈이었고, 실력은 있지만 혼자 활동을 해서 주변에 별다른 접점도 없었다.

가장 알고 싶었던 건 케트라 브리저의 주변인물 중에서 누가 배신자인가였는데, 그 정보를 제대로 못 뽑아내고 있었다.

케트라 브리저는 마법에는 천재일지 몰라도 심문은 어설펐다.

반태수는 그걸 지켜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비행선을 나섰다.

떨어진 약발을 좀 채워주러 가야겠다.

***

"보수를 어떤 식으로 받기로 했나요?”

"그쪽에서 알아서 접근해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케트라 브리저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진실입니다.”

한데 왜 저 진지한 표정이 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처음에는 심문이 잘 이뤄졌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대답이 조금씩 뒤틀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밀계좌를 갖고 있겠죠? 내 생각에는 그쪽으로 보수를 이미 받았을 것 같은데.”

"제가 이름을 알려드렸으니 제 이름으로 계좌를 다 뽑으셨을 거 아닙니까. 조사해 보시면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겁니다.”

"이름만으로 암시장을 통한 비밀계좌까지 알아낼 수는 없죠.”

사내가 자신에게는 비밀계좌가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천막 안으로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사내의 몸이 반사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이미 몸이 굳은 채였으니 지금 이건 그저 기분 탓이리라.

반태수가 성큼성큼 걸어서 케트라 브리저 옆에 섰다.

케트라 브리저가 반가운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반태수는 그녀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사내만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뻗었다.

그걸 보는 사내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일단 3분부터 시작하지.”

반태수의 손가락이 사내의 명치 어림을 찔렀다.

쿡.

사내의 눈이 휙 뒤집혔다. 입에서 거품이 부글거렸다. 입가로 침이 줄줄 흐른다.

반태수가 고개를 돌려 케트라 브리저를 쳐다봤다.

"시간 재고 있죠?”

"예? 시, 시간이요? 아! 자, 잠시만요!”

그녀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타이머를 실행했다.

화면에서 시간이 주르록 흘러갔다.

“3분 되면 말해요.”

그녀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3분이 지났다.

반태수가 다시 점혈을 풀어줬다.

"크허어어어억!”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숨이 안으로 컥 막힌 채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공포에 빠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차마 반태수를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흐어억! 흐어억! 흐어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든 호흡을 조절하려 애썼다. 아마 질문이 날아올 텐데, 거기 대답하지 못하면 어찌 될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신 그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은 5분이니까 타이머 미리 맞춰놔요.”

반태수의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이머를 맞췄다.

그 모습을 사내가 애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반태수는 담담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노려보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는데.”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내통자가 누구지?”

순간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반태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

그걸 본 사내가 기겁하며 외쳤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톨리크라는 자였습니다!”

"톨리크?”

경악한 외침이 반태수 옆에 있던 케트라 브리저에게서 튀어나왔다.

케트라 브리저는 믿을 수가 없었다.

"톨리크라고요? 정말로?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거짓으로 이간질을 하려는 거라면……."

"아닙니다! 이간질 아닙니다! 애초에 이 개척도시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사람뿐입니다!”

진실이라고 제발 믿어 달라고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반태수는 이 천막에 들어올 때부터 사내의 육체적 정보를 계속 확인했다.

그걸 토대로 저놈이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혹은 진짜 억울한 건지 억울한 척을 하는 건지 파악했다.

지금 저놈이 하는 말은 진실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억울해 하고 있다.

"넌 한 놈만 안다는 거지?”

"예! 전 톨리크만 압니다! 그놈이 개척도시의 상황을 저한테 꾸준히 전달했습니다!”

반태수가 케트라 브리저를 보며 말했다.

"톨리크라는 놈부터 잡죠.”

케트라 브리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잡아올게요.”

"아마 도망쳤거나, 다른 일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놈을 잡아오는 걸 봤을 테니까요.”

"여기서 도망칠 데가 어디 있겠어요? 이 근처에는 마수도 많아서 생각 없이 도망치면 죽어요.”

케트라 브리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살짝 가라앉은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얼른 다녀올게요. 그동안 저 사람, 잘 부탁해요.”

혹시 누군가 저놈을 암습할 수도 있다. 가장 확실한 입막음은 죽음이니까.

그러니 포로를 함부로 방치해선 안 된다.

반태수는 자신이 지키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케트라 브리저는 어금니를 꽉 물며 천막을 나섰다.

반태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려 7서클 마법사다. 그리고 이 개척도시 안에는 7서클 마법사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는 한 명도 없다.

그건 이미 반태수가 도시에 도착한 순간 확인했다.

반태수는 케트라 브리저가 나가자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반태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눈동자를 딴 데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아까 말했던 비밀계좌, 불어라.”

사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거긴 자신이 그동안 의뢰를 처리하면서 받은 돈이 전부 들어있다.

계좌를 불면 그 돈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넌 어차피 죽는다. 편히 죽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내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아니지. 굳이 안 죽이고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선택지도 있긴 한데, 원하면 그렇게 해주고.”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을 평생 겪는다고? 차라리 그냥 곱게 죽는 편이 낫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내는 비밀계좌를 말해줬다.

계좌이체를 통해 돈을 넣는 것은 어디서든 가능하지만, 돈을 찾거나 다른 계좌로 이체할 때는 지정된 도시의 암시장에서만 가능한 계좌였다.

추적하기가 만만치 않은 계좌였다.

하지만 이 계좌에 돈을 넣은 자를 추적하면 이 일의 배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건 살라자 샤마쉬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 찾아낼 것이다.

반태수는 지금 상황과 뽑아낸 정보들을 문자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살라자 샤마쉬에게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잠시 지나니, 케트라 브리저가 돌아왔다.

표정이 심각했다.

"도시 밖으로 도망쳤어요.”

"그럼 쫓아가서 잡아야죠.”

"쫓아갔는데…… 죽었어요.”

"자살한 겁니까?”

케트라 브리저가 고개를 저었다.

"저격에 당했어요.”

반태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쳐다봤다.

"설마 도시에서 저격을 한 겁니까?”

"네. 배신자가 또 있는 거죠.”

"어차피 배신자가 한 명이라고 여기진 않았잖아요. 그래도 저격범은 좀 그러네요. 이놈은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어떻게요?”

잡고 싶어도 잡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지금 개척도시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수천 명이다.

그 중에서 저격범을 찾아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번엔 내가 다녀오죠.”

반태수는 그 말을 남기고 천막에서 나갔다.

케트라 브리저는 반태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심문을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톨리크가 내통자라니.’

톨리크는 그녀와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이였다.

현재 도시에서도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지 모른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대체 왜? 언제부터?’

톨리크는 왜 자신을 배신했을까? 설마 도시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일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톨리크는 그녀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아.”

케트라 브리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로는 뭘 하든 문제가 생길 것이다.

어차피 그녀가 없어도 계획대로 일은 착착 진행 중이다.

하루쯤 빠진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고 있을 때, 반태수가 돌아왔다. 허공에 사내 한 명을 둥둥 띄운 채.

반태수는 천막 중앙에 그를 획 던졌다.

"이놈이 저격범입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를 본 케트라 브리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레릭."

톨리크에 버금갈 정도로 그녀와 친분이 깊고 오래된 사이였다.

진짜 충격은 레릭이 톨리크를 죽였다는 것이다.

"대체 왜……!”

반태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일단 대답할 상태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죠.”

그 말에 케트라 브리저가 멈칫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심문 받던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아무 반응 없는 사람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레릭뿐이었다.

***

심문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레릭은 고통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 똑같이 당했는데 훨씬 고통스러워하고 훨씬 반응이 격렬했다.

그리고 결과도 좋았다.

아주 빠릿빠릿한 상태로 묻는 모든 말에 성실히 대답했다.

레릭과 톨리크가 배신한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애초에 이쪽 편이 아니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케트라 브리저에게 접근했고, 그 이후에도 의도를 가지고 친해졌다.

그 얘기를 들은 케트라 브리저는 허망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레릭에게 뽑아낸 정보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개척도시에 따라온 또 다른 배신자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확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확보한 명단을 통해 조사는 해봐야지.’

그리고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살라자 샤마쉬에게 보내서 그걸 토대로 더 깊이 있는 정보를 확보하고.

아무튼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는데, 케트라 브리저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함께 해오던 자들이 사실은 자신을 감시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스며든 세작이었으니, 그런 일을 겪고 정신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케트라 브리저는 완공이 가까워진 빌딩의 옥상에 앉아 도시 밖 전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파이 색출로 인해 도시 건설 공사는 오늘 하루 중지했다.

다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한지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관리자들이 잘 다독여 큰 소요 없이 휴식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렇게 높은 빌딩 옥상을 혼자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지금 케트라 브리저가 보는 광경은 끝없이 펼쳐진 숲이었다.

저 숲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곳은 약초의 보고였다.

한참동안 숲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늘 찾아온 허망함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과연 이 모든 걸 떨쳐내고 내일부터 당장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케트라 브리저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합니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숲을 바라볼 뿐.

반태수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불쑥 머그컵을 그녀의 코앞에 내밀었다.

컵 안에는 따뜻한 커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원래는 주더라도 훨씬 나중에 주려고 했다. 한데 보아하니 케트라 브리저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결국 커피를 쓰기로 한 것이다.

케트라 브리저가 커피가 담긴 머그컵과 반태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커피인가요?”

"네. 아주 특별한 커피죠.”

“특별한?”

"기분을 좀 풀 수 있을 겁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컵을 슬쩍 더 내밀었다.

케트라 브리저는 머그컵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든 채 또 멍하니 숲을 바라봤다.

반태수는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로 했으니까 이런 곳에서 여유를 부려도 된다.

케트라 브리저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와 똑같은 곳을 구경했다.

이렇게 규모가 큰 숲은 솔직히 처음 봤다. 지구에서건 이면세계에서건.

그러고 있을 때, 케트라 브리저가 멍한 상태로 손에 든 머그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 으으으음!"

꿀꺽.

“하으으으!”

케트라 브리저가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었다. 눈은 질끈 감은 채였고, 그 와중에도 머그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내 커피 한 모금의 폭풍이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녀의 멍한 눈에 점점 초점이 돌아왔다.

"이거…… 대체 뭐예요?"

"커피죠."

반태수는 신기한 눈으로 케트라 브리저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커피를 마신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격렬한 반응이었다.

반태수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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