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엄대협이 물어온 의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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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자 샤마쉬는 가문으로 돌아가 세심하게 가신 가문의 후계자 선정에 개입한 자를 찾아다녔다.
이런 일은 드러나면 타켓이 움츠러들 수 있으니 티가 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도 몇몇 수상한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은근슬쩍 떠보기도 하고 다른 수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다 보니 조금씩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하지가 않았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몇 있는데, 말 그대로 의심의 단계일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인지라 오늘의 자신에게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한 것이다.
반태수가 준 커피는 정말 아껴 먹어야 한다.
특히 당분간은 만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더더욱 아껴야 한다.
그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액정을 확인하니 반태수였다.
살라자 샤마쉬의 눈이 반가움으로 커졌다. 그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궁금한 거? 이거 흥미가 생기는군. 뭔가, 말해보게.”
- 혹시 아리크라는 개척도시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리크? 내가 알기로 개척도시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건 없는데……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금방 알아보고 다시 연락할 테니."
살라자 샤마쉬는 전화를 끊고 잠시 이름을 떠올려봤다.
"아리크라, 아리크……."
이름이 묘하게 입에 붙었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아무튼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개척도시 중에는 아리크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없었다.
즉, 불법 개척도시라는 뜻이었다.
한데 섣불리 그렇게 단정 짓지 않은 것은 묘하게 입에 달라붙는 이름 때문이었다.
살라자 샤마쉬는 몇 군데 연락을 돌렸다. 아리크라는 개척도시의 정보를 갖고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발이 넓기에 떠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반태수가 굳이 살라자 샤마쉬에게 연락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마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연락했다면 아무 답도 얻지 못한 채 괜히 5대 가문만 들쑤셔 놓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살라자 샤마쉬의 표정이 조금씩 흥미롭게 변해갔다.
그는 모은 정보를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하고는 반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살라자 샤마쉬와의 통화를 마친 반태수는 묘한 표정으로 저 멀리 비행선 옆에 서 있는 케트라 브리저를 쳐다봤다.
케트라 브리저는 지금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태수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개척도시 아리크로 데리고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 =었다.
"진짜 불법 아니었네.”
사실 살라자 샤마쉬에게 방금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아리크는 다른 개척도시와는 달리 5대 가문의 지원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도시였다.
도시의 위치부터 개발계획까지 전부 케트라 브리저가 맡아서 진행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문인 브리저 가에서 초반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주었다.
애초에 브리저 가문이 맡은 도시들의 인구가 전부 포화 상태였기에 진행하게 된 일이었다.
원래라면 5대 가문의 케어를 받으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한데 여기 후계자 선정 문제가 얽혀 버렸다.
브리저 가에서 가장 후계자에 가까운 사람이 바로 케트라 브리저였다.
케트라 브리저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가문에 소속된 사람들 역시 대부분 그녀가 후계자가 되는 데 아무 불만이 없었다.
어쨌든 가장 뛰어난 사람임에는 분명하니까.
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이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케믹 브리저라는 자였는데, 케트라 브리저와는 배 다른 남매였다.
문제는 케믹 브리저의 자질이었다.
후계자가 되기에는 많이 모자란 자였다. 재능은 바닥이었고, 그렇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인성에도 약간 문제가 있었다.
그런 자가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하니 케트라 브리저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만을 꾹 참고 기다렸다. 케믹 브리저의 뒤를 혼자서 몰래 캐면서.
애초에 목표는 케믹 브리저가 후계자에 어울리지 않다는 증거를 잡는 것이었다.
한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케믹 브리저의 뒤에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 계속 드러났다.
결국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개척도시 아리크였다.
후계자가 될 수 없다면 아예 새로 도시를 만들어 그곳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으면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도 태클이 들어왔다.
개척도시를 케믹 브리저와 함께 세우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성과를 쏙 빼먹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거절했다.
처음에는 압력이 너무 거세서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티고 버텨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순간 5대 가문의 지원이 끊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케트라 브리저에게는 언제든 도시 개발을 포기할 권리가 주어졌다.
또한 케믹 브리저와 손잡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포기한다고 무언가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케믹 브리저와 손을 잡으면, 5대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무릎을 꿇으면 지금까지의 일을 묻고, 원래의 자리에 앉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케트라 브리저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이 개척도시 아리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반태수가 살라자 샤마쉬에게 들은 개척도시 아리크에 얽힌 얘기였다.
한데 살라자 샤마쉬는 그걸 토대로 5대 가문 내에서 이상한 짓을 벌이고 다니는 자들의 흔적을 또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개척도시 아리크를 절대 그냥 방치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파악했다.
반태수는 살라자 샤마쉬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케트라 브리저를 도와주라는 의뢰였다.
5대 가문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암중세력이 브리저 가문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계속 그쪽에 선을 대고 있었다.
한데 제대로 움직이질 않아서 배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반태수가 케트라 브리저를 도와 그들의 일을 방해한다면,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고, 그때 살라자 샤마쉬가 전격적으로 나서서 배후를 잡아낸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딱 봐도 작은 건이 아니라 굉장히 큰 건이었다.
대가를 무엇으로 받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라자 샤마쉬가 어설픈 보상을 내밀 리 없다.
아마 입이 떡 벌어지는 보상을 줄 것이다.
반태수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케트라 브리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떻게 반태수에게 의뢰를 맡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좀 생각해 봤습니까?”
반태수가 묻자, 케트라 브리저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떠오르는 게 없어요. 제가 원래 이 정도로 궁핍하진 않거든요? 그런데 당장은 줄 게 없네요.”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그럼 달아놓죠.”
케트라 브리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해도 돼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는 말에 케트라 브리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뭔데요? 조건이.”
"정보 좀 주시죠.”
"정보요?”
“브리저 가문에 대한 정보요. 들어보니 동생하고 무슨 일도 있었던 것 같던데. 아닙니까?"
동생이라는 말에 케트라 브리저의 표정이 확 굳었다.
케믹 브리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건 왜요?”
“필요하니까요. 뭐, 싫으면 관두시고.”
"아뇨.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싫을 리가 있나요. 그냥…… 좀 불편한 얘기라서 그렇죠.”
케트라 브리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기본적으로는 살라자 샤마쉬에게 들은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데 케트라 브리저의 말에는 몇 가지 디테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케믹 브리저의 옆에 착 달라붙어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든가.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우리 가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제가 다 아니까요. 아시잖아요. 저 천재인 거.”
아무리 천재라도 한 가문의 모든 구성원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는 건 보통이 아니다.
사소한 고용인들은 자주 바뀌기도 할 텐데 말이다.
"제가 그놈의 뒤를 얼마나 열심히 캤는데요. 근데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에요.”
반태수는 그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분명히 말이 나왔을 것 같은데.”
“만들어진 정보가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의 정보를 그놈이 입고 있더라고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말했잖아요. 가문에 있는 사람들 다 안다고. 그게 지금뿐 아니라 내가 어릴 때도 다 해당돼요. 내가 알던 사람의 정보를 씌웠더라고요."
"알던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어릴 때 죽은 사람이에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는 사람은 몇 없지만.”
그러니까 브리저 가 내에서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정보를 갖다가 씌웠다는 뜻이다.
"정말 자연스럽게 스며들더라고요.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반태수는 흥미로운 눈으로 말했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조직은 흔치 않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죠.”
두개가 떠올랐다.
하나는 5대 가문.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타노로스.
"그걸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하면, 뭐가 달라지긴 할까요?”
"가문 사람들을 아무도 믿지 않는군요.”
“상황이 그러니까요. 전 제 아버지도 못 믿겠어요.”
반태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개척도시 아리크의 위치를 왜 거기에 잡았습니까? 보아하니 근처에 위험한 마수 무리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던데."
케트라 브리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속았어요.”
“속아요?”
"가문의 초기 지원을 너무 믿었어요. 그나마 수원이 있다는 게 다행이죠. 그게 아니었으면……."
케트라 브리저는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문에서 작정하고 속였다는 겁니까? 그건 좀 이해가 안 가는데?”
"가문 차원에서 나선 일이 아니라 개척도시 개발부의 일부 전문가들이 벌인 일이에요. 진실은 모르지만 포장은 그렇게 하더라고요.”
케트라 브리저가 자조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들을 믿지 않고 확인을 했으면 이렇게 안 되었겠죠. 도시 건설을 시작했더라도 초기에만 발견했다면 얼마든지 결정을 되돌릴 수 있었을 거예요.”
“아마 되돌리지 못했을 겁니다.”
나서스 가의 후계자 경합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엮여 있다.
아마 브리저 가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수를 써서 케트라 브리저가 제대로 도시를 개척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방해할 테고.
반태수는 케트라 브리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가문에 정보원 심어놨죠?”
케트라 브리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이런 걸 감출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요소요소에 박아놨어요. 뭐…… 성과는 별로 없지만요.”
"앞으로 그 정보, 나랑 공유합시다. 그리고 나도 정보수집에 도움 좀 줄게요.”
"정보수집을 도와준다고요? 어떻게요?”
"쓸 만한 마도구를 만든다거나.”
"저도 마도구 만들 줄 아는데요? 벌써 괜찮은 걸로 지급했어요. 중요한 정보원한테는 유물도 줬다니까요?”
"나중에 보고 쓸 만하겠다 싶으면 쓰세요. 필요 없으면 버리고.”
케트라 브리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자, 그럼 다 정리 됐으니 이제 출발합시다.”
"예? 지금 당장이요? 아직 당신 말고는 한 명도 고용을 못했는데요?”
"나도 나름 준비해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참고로 난 따로 갈 겁니다.”
"따로 간다고요?”
그 말의 의미를 금세 떠올린 케트라 브리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야! 설마 비행선을 갖고 있는 거예요?”
“작은 거예요.”
"심지어 작은 거!”
비행선은 작은 게 더 귀하다.
"아무튼 내일 아침에 봅시다.”
반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케트라 브리저가 급히 반태수를 따라갔다.
"같이 가요! 설마 내가 여기서 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나도 도시로 들어갈 거라고요.”
"비행선 안 지킵니까?”
"저걸 누가 건드리겠어요?”
하긴 훔쳐가기엔 너무 크다. 가져갈 방법은 작동시켜서 날아가는 것밖에 없는데, 작동 자체에는 보안이 철저해서 쉽게 뚫을 수 없다.
반태수와 케트라 브리저가 도시로 향하자, 그때까지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엄대협도 같이 움직였다.
엄대협은 반태수 옆에 붙어서 슬쩍 물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가서 뭐 하게? 땅 파고 집 짓게?”
“어…… 그러네.”
엄대협은 그렇게 대답하며 케트라 브리저를 힐끗 훔쳐봤다.
“하…… 이거 진짜. 쟤 가신 가문이야.”
가신 가문이라는 말에 엄대협의 몸이 확 굳었다.
그의 표정이 무수한 갈등이 떠올랐다.
반태수는 그걸 보고는 좀 놀랐다. 가신 가문이라는 걸 알면 엄대협이 알아서 피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갈등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삼 케트라 브리저의 외모가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난 빠질게.”
결국 엄대협이 자신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빠졌다.
반태수는 저건 또 저것대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생각했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너까지 가면 안 되지. 할 일도 많잖아.”
듀마이어 공방도 관리해야 하고 변두리 개발도 신경 써야 한다.
"얼른 가자.”
반태수가 걸음을 서두르는데, 이번엔 케트라 브리저가 바짝 붙어서 말했다.
"혹시……오늘 재워줄 수 있어요?”
반태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엄대협이 그 광경을 부러움 넘치는 눈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