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나서스의 후계자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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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칸 나서스는 데드릭 벨크리스를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데드릭 벨크리스는 허리숙인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너 뭘 꾸미고 다니는 거냐?”
자르칸 나서스는 허리를 펴며 데드릭 벨크리스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후계자 경합에 개입하려고 했잖아. 이거, 쉽게 벌어질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잖아. 안 그래?”
자르칸 나서스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후계자 경합에 개입한 적 없다는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후계자 경합에 개입한 정황이니까.
사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문에서 누군가를 밀어주겠다고 후계자 경합에 개입한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변명을 얼른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상대가 데드릭 벨크리스만 아니었다면, 잘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자르칸 나서스의 뒤에 있는 존재도 5대 가문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히 5대 가문 내에서의 힘을 두고 생각하면 그분이 데드릭 벨크리스 보다는 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는 미친놈이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라고 해도 상황만 맞으면 언제든 들이 박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칫 그분이 나서게 되어 데드릭 벨크리스가 마구 들쑤시게 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내 인내심 시험하는 거냐? 없는 인내심이 그런다고 생길 거 같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르칸 나서스는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무조건 낮춰야 한다.
"제가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자르칸 나서스는 일단 인정부터 하고 가기로 했다.
여기서 드론 파괴니 민간인 공격이니 말을 꺼냈다간 일이 훨씬 꼬일 것이다.
일단 데드릭 벨크리스부터 도시에서 내보낸 다음 나머지 일을 수습하면 된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자르칸 나서르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한 3분쯤 보고 있으니 자르칸 나서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했다.
"저…… 왜 그러시는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말을 툭 던졌다.
"너 뒤에 누구야?”
"예?”
"뒤에 누가 있느냐고.”
"그런 건 없습니다만……."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럴 리가. 내가 이런 거 하나는 진짜 잘 보거든. 후계자 경합에 개입하면 처벌이 만만치 않지? 그게 설사 가문의 장로라고 해도 벌을 피할 수 없고.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데드릭 벨크리스를 서둘러 내보내려고 한 것이다. 자기 선에서 이 일을 마무리 하려고.
카간 나서르를 후계자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경합에 개입한 사실 자체는 어떤 식으로든 무마할 수 있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한데 왠지 분위기가 자르칸 나서스의 생각대로 흘러갈 것 같지가 않았다.
"벌이 어떻게 되지?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누가 얘기해줄 사람 없나?”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르칸 나서스 뒤쪽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나약해 보이는 자를 노려봤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대답했다.
“3년간 마력 동결에 10년간 직위 해제입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르칸 나서스를 쳐다봤다.
"마력 동결에 직위 해제라. 뭐, 소소하군.”
하지만 진짜는 저 벌을 받음으로 인해 추락한 위상과 영향력이다.
자르칸 나서스 같은 사람에게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리라.
그런 벌을 감안하고 이번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보기에 자르칸 나서스는 그 벌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는 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너무 커서 리스크를 짊어지기로 했거나, 아니면 설사 걸리더라도 벌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 준비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마. 어차피 발버둥 치다보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
자르칸 나서스의 표정에 당황과 황당, 그리고 불안감이 뒤섞였다.
"어, 어르신.”
"말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데드릭 벨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남은 나서스 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슬슬 가자.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다들 머뭇거렸지만, 데드릭 벨크리스가 호통 몇 번 치니 다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축 늘어져서 이동을 시작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던 반태수를 보며 말했다.
"넌 하던 일 마저 해라. 커피는 그 다음에 마시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끝내고 연락하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손을 들어 한 번 슬쩍 흔들고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나서스 가로 향했다.
반태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비행선 지붕에 훌쩍 올라탔다.
이제 경합을 끝낼 시간이다.
***
잠깐의 해프닝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어차피 비행선을 타고 날아서 능력자들을 찾아다니니 뭉쳐 있는 것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어려운 일은 없었다.
반태수는 빠르게 능력자들을 정리했다.
스마트폰에 주기적으로 정보가 갱신되는데, 그 때마다 남은 능력자 수가 팍팍 줄어들었다.
몇 시간 걸리지 않아 남은 능력자를 전부 정리한 반태수는 호텔로 향하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중간에 정보가 업데이트 되면서 경합이 끝났다는 사실이 출력되었다.
경합 우승자는 키에라 나서스였다.
반태수는 씨익 웃으며 비행선의 속도를 높이도록 지시했다.
호텔에 도착한 반태수는 일단 자신의 방으로 가서 씻고 개운한 상태로 키에라 나서스의 방으로 향했다.
키에라 나서스는 흥분한 상태로 문 밖으로 나와 반태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반태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왜 나와서 기다립니까.”
"기뻐서요.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감추지 않고 한껏 드러냈다. 진짜 좋은가보다.
"일단 들어갑시다. 아직 밥 때 되려면 좀 남았으니 안에서 좀 쉬다가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반태수는 키에라 나서스를 몰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나니, 일 끝나면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연락하기로 한 것이 떠올랐다.
반태수는 일단 안으로 쭉 들어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다.
"뭐 합니까? 얼른 앉아요. 같이 좀 쉽시다. 오늘 종일 날아다녔더니 골이 흔들려서요. 하하하.”
반태수가 살짝 농담을 섞어 말했다.
키에라 나서스는 헤실헤실 웃으며 반태수 앞자리에 앉았다.
"아, 뭐라도 좀 마셔야죠? 커피 드릴까요?”
반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남이 타주는 커피 안 마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꼭 연락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 이리 늦어!
"화나시면 아까 데려간 놈이나 두드리세요. 그놈 때문에 늦어진 거니까. 오늘 똥개 훈련 제대로 했습니다.”
- 하! 진짜 그 새끼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 진짜 머리통을 확 부숴버릴 수도 없고.
"저 지금 호텔입니다. 이리로 오세요. 같이 커피 한 잔 하셔야죠.”
- 당장 간다. 딱 기다려.
데드릭 벨크리스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반태수는 끊어진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앞에서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에라 나서스에게 말했다.
"손님 한 분 오실 건데, 괜찮죠?”
"그럼요. 편하게 하시고 싶은 거 다 하셔도 돼요.”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과 태도에서 긴장감이 싹 빠지고 적당히 느긋하게 분위기가 풀어졌다.
저러고 있으니 왠지 보기 좋았다.
"이제 경합이 끝났으니 바로 후계자가 되는 겁니까?”
"바로는 아니고, 5대 가문에 방문해서 승인을 받아야 해요.”
"승인?”
"음…… 정확한 건 모르겠는데, 5대 가문에 방문해서 치러야 하는 절차가 있어요."
"전통이랑 관련이 있는 행사인가 보죠?”
"솔직히 잘 몰라요. 그런데 중요한 절차라고 하더라고요.”
반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가주님도 같은 절차를 받으신 거 아닌가요?”
"받으셨죠. 근데 그냥 별 거 아니라고만 말씀하시고 마세요.”
"진짜 별 거 아니거나,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뭐가 됐든 그걸로 문제가 생겼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키에라 나서스는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그렇게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키에라 나서스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반태수는 자신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피식 웃고는 그냥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키에라 나서스가 데드릭 벨크리스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설마 손님이 데드릭 벨크리스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원망스러운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반태수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마음 좀 다스리세요. 아주 맛있는 커피 한 잔 대접할 테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커피 마시자. 얼른, 얼른 가져와봐라. 쿠키도 잊지 말고.”
데드릭 벨크리스는 오늘 한 일이 있기에 아주 당당하게 요구했다.
반태수는 한바탕 웃고는 커피를 준비했다.
아공간에 항상 많은 양을 넣어 다니기에 준비 자체는 아주 빠르게 이뤄졌다.
"두 분 다 따뜻하게 마실 거죠?”
"난 속이 타서 시원하게 먹어야겠다.”
아무래도 오늘 나서스 가에서 좀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럼 그러시죠.”
반태수는 자신의 것도 차가운 걸로 준비했다.
이내 테이블 위에 커피 세 잔과 쿠키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가 놓였다.
반태수는 키에라 나서스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쿠키랑 같이 먹으면 자극이 심할 테니까 일단 커피부터 드시죠.”
키에라 나서스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무슨 커피랑 쿠키를 먹는데 자극을 따진단 말인가.
하지만 이번 경합에서 사실상 자신을 우승하게 만들어준 사람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후록 마셨다.
그 모습을 데드릭 벨크리스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흐으으음!"
키에라 나서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안에서 휘몰아치는 맛과 향의 폭풍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간 뒤에도 입안에 남은 맛과 향의 여운이 한참동안이나 맴돌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어때? 신세계가 열리지?”
키에라 나서스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눈짓으로 쿠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쿠키랑 같이 먹으면 너 기절할 수도 있어.”
키에라 나서스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데드릭 벨크리스와 반태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중얼거렸다.
"이거…… 처음 먹었을 때, 내가 이랬다는 거 아냐.”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휙 쳐다봤다.
"재밌었냐?”
"전 이제 담담합니다. 내 커피를 마신 사람이 몇 명일 거 같습니까?”
"하긴, 그렇겠네.”
데드릭 벨크리스는 키에라 나서스에게 말했다.
"일단 커피로 좀 더 적응한 다음 쿠키랑 같이 먹어봐.”
"네."
키에라 나서스는 대충 대답하고 커피를 조금씩 마셨다. 굳이 데드릭 벨크리스가 저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쿠키랑 같이 먹을 생각은 없었다.
커피의 맛과 향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커피를 모두 마실 때까지 키에라 나서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이 커피에 대한 예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키에라 나서스가 커피를 다 마시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대화를 시작해도 되겠군.”
데드릭 벨크리스는 아주 여유롭게 커피와 쿠키를 즐기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아까 그놈, 뒤를 좀 캐고 있는데,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야. 아무래도 그놈 뒷배가 5대 가문에서 제법 지위가 있는 자인 것 같아.”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키에라 나서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5대 가문이라니.
그녀의 표정을 본 반태수가 아까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반태수의 설명을 듣는 내내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대체…… 무슨 목적일까요? 5대 가문이면, 누가 가신 가문의 후계자로 선정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요.”
"나도 그게 의문이야. 알아보니 그놈이 후계자로 밀던 카간인가 하는 놈은 그냥 개차반이던데?”
키에라 나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카간이 후계자로 선정되었으면 가문의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가주가 가문을 이끌긴 해도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가문의 어르신들이 가주가 엇나가면 적절히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조가 짜여 있었다.
"아무튼 이 건은 내가 좀 더 파보기로 했다. 그놈이 제대로 처벌을 받는지도 계속 관심을 둘 거고. 관련된 놈들 전부 확실히 처벌하도록 압력도 넣을 거다.”
"든든하네요.”
키에라 나서스가 빙긋 웃었다.
만일 데드릭 벨크리스가 여기서 손을 떼면 이번 일이 제대로 처리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한데 저렇게까지 하겠다니, 좀 안심할 수 있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히죽 웃으며 반태수에게 빈 커피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부탁해.”
아직 쿠키가 많이 남아서 커피가 더 필요했다.
오늘 아주 뽕을 뽑겠다는 의지가 데드릭 벨크리스의 온몸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걸 본 반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