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나서스의 후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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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비행선을 타고 빠르게 날아가는 중이었다.
저 멀리 노란 티셔츠를 입은 능력자 한 명이 보인다.
그는 반태수의 비행선을 발견하더니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에서 마력 반응이 일어났다. 유물이 발동한 것이다.
주변에 자욱한 안개가 펼쳐졌다.
물론 반태수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솔직히 안개를 꿰뚫어 볼 수도 있을뿐더러, 그게 아니라도 영역화에 걸리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까.
노란 티셔츠를 입은 능력자는 계속 유물을 발동해 안개를 뿜어내면서 다른 마도구를 통해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높아도 비행선보다 빠를 수는 없다.
반태수는 능력자에게 접근하며 가볍게 마법을 펼쳤다.
탁구공만 한 불덩어리가 툭 튀어나와 안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맹렬히 회전하며 열기를 내뿜었다.
자욱하게 깔렸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습이 드러난 능력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가 그를 향해 손가락 총을 쐈다.
빵!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능력자가 펄쩍 뛰더니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반태수는 비행선에서 훌쩍 뛰어내려 능력자에게 다가가 항복을 받아냈다.
물론 마력과 체력을 바닥내는 건 잊지 않았다.
항복하는 장면을 드론이 정확히 찍고 있었다.
사실 드론이 찍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반태수의 비행선에서도 이 모든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나중에 딴 말이 나올 때를 대비해서 들어놓은 보험이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좀 묘하다.
반태수는 아무리 늦어도 오늘 오전 중으로 경합이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남은 능력자도 몇 없었고, 남은 후보자도 몇 없었다.
비행선을 타고 다니면서 능력자들 위치 파악해서 마법 몇 번 써주면 끝날 일이었다.
한데 지금 상황은 예상한 것과 좀 달랐다.
다른 후보자의 능력자들은 금세 정리했다.
이제 남은 후보자는 노란 티셔츠의 주인인 카간 나서스와 붉은 티셔츠의 주인인 키에라 나서스 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은 벌써 점심때를 훌쩍 넘었다.
중간에 대충 밥도 먹었다.
그런데도 아직 경합이 끝나려면 멀었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능력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처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한데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비행선을 타고 다닌다고 해도 오카리타라는 큰 도시를 헤집고 다니면서 능력자를 하나하나 찾아 처리하는 건 굉장히 귀찮고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건 시간을 끌겠다는 건데……."
시간을 끈다는 건,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처리했다.
오전에 시작하자마자 만났던 일곱 능력자와 유물을 들고 있던 용병들이 아마 카간 나서스 측에서 준비한 카드일 것이다.
"그냥 몰라서 저러고 있는 건가?”
애초에 잘 도망 다니면서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 반태수를 처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귀찮아진 거고.
"제일 가까운 데 있는 놈이…… 여기군.”
반태수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다른 능력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놈이 있었다.
그놈이 도망치는 중인지 제자리에서 숨어 있는지는 모른다.
주기적으로 위치를 파악해 기록만 해 놓을 뿐, 연속적인 데이터를 공개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반태수는 일단 그쪽으로 날아갔다.
비행선 지붕에 앉아서 멍하니 도시 전경을 구경했다.
오카리타 특유의 거대한 건물들이 쭉 늘어선 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 건물지대를 지나고 나면 능력자의 위치로 찍힌 지점이 나온다.
그렇게 건물지대를 절반쯤 지났을 때, 건물지대가 끝나는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영역화의 범위 안쪽이라서 대충 확인해보니 대부분 능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유물이 감지되었다.
저 정도 인원이 유물을 잔뜩 들고 모여 있다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저들이 기다리는 건 반태수인 듯했다.
모두 비행선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가진 유물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동안 반태수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봤다.
반태수의 관심이 대부분 마법과 관계된지라, 그들이 가진 유물이나 마도구 쪽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계층이 어느 정도 수순의 유물이나 마도구를 쓰는지 대략 감을 잡고 있었다.
저 정도 유물을 쓰려면 도시를 다스리는 가문의 직계는 되어야 한다.
안드렐라 윌렉스 정도 되면 저 정도 유물을 자연스럽게 착용하고 다닐 수 있다.
한데 보아하니 그런 유물을 착용한 자들이 다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 급의 유물을 착용한 자들도 보였다.
‘나서스 가에서 나온 사람들이로군.’
대충 견적이 나왔다. 나서스 가에서 나온 자들이다. 그 중에 몇몇은 제법 높은 직위일 것이다.
유물과 마도구만으로 판단하면 그렇다.
반태수는 비행선의 속도를 늦췄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상대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비행선이 가까이 다가가자, 기다리던 자들 중 한 명이 나서서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붉은 빛이 쭉 뻗어 나갔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붉은 빛이 하늘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반태수는 비행선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훌쩍 뛰어서 그들 앞에 내려섰다.
굳이 비행선을 착륙시키지는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손에서 빛을 뿜어내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나서스 가문에서 나왔소.”
"그래서요?”
반태수의 대꾸에 뒤에서 기다리던 자들의 눈에 살짝 불쾌감이 깃들었다.
오카리타에서 나서스라는 이름을 듣고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마법사 반, 맞소?”
"맞습니다.”
"키에라 나서스의 후계자 경합에 참여하는 중이오?”
"그것도 맞네요.’’
"조사할 것이 있으니 같이 좀 가줘야겠소.”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뭘 조사한다는 겁니까? 그리고 아직 후계자 경합이 안 끝나서 다른 곳으로 이탈하는 건 좀 곤란한데요.”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드론 파괴와 민간인 공격 혐의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오. 그러니 협조해 주시오.”
"굳이 이 시기에요?”
"그 두 사안은 특히 중대한……."
"후계자 경합에 개입하는 겁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다들 크게 동요했다. 그럴 수밖에. 그게 진실이니까.
지금 저들은 후계자 경합에 개입하고 있다. 키에라 나서스를 떨어뜨리고 카간 나서스를 우승시키기 위해서.
"그게 아니면 조사를 하더라도 후계자 경합이 끝난 다음에 해야죠.”
"그건 안 됩니다. 드론 파괴와 민간인 공격은 둘 다 엄중한 사안입니다. 즉시 확인해야 한단 말입니다.”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조사를 제대로 할 생각은 있으시고?”
다들 표정이 험악해졌다.
"말을 가려 하시오!”
반태수는 대꾸하지 않고 앞에 있는 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런데…… 여기 있는 분들이 날 조사할 자격은 있습니까? 설마 내가 나서스 가문에 대해 잘 모른다고 아무나 온 건 아니겠죠?”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선을 넘고 있다는 사실, 아시오?”
"글쎄요. 누가 선을 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몇몇의 시선이 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에 닿았다. 저런 걸 타고 다닌다는 건, 뒤에 상당한 배경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다.
반태수는 그들의 태도와 표정을 보고 이 일에 개입한 자들이 뒤에 더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사람이.
잘 모를 때는 이쪽도 배경을 내세우면 된다.
반태수는 폰을 꺼냈다.
"전화 한 통 하죠.”
"그만 두시오! 아직 조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용의자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전화를 용인한단 말이오!”
하지만 반태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능력자들이 전화를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꽈아앙!
하지만 그들은 반태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실드?”
그들은 서둘러 마력을 모아 실드를 두드렸다.
쩌저저저저저정!
한데 그냥 실드가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실드였다.
그들도 한가락 하는 능력자다. 한데 아무리 때려도 실드가 끄덕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어서 묘하게 타점이 계속 어긋난다.
쩌저저저정!
그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안간힘을 쓰는데도 실드는 여전히 멀쩡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반태수는 느긋하게 통화를 했다.
“영감님?”
- 네놈이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어쩐 일이냐?
"혹시 나서스 가문이라고 좀 아십니까?”
- 알지. 나보다 나서스 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찾기가 만만치 않을 걸?
"지금 오카리타에 있는데, 혹시 여기서 커피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 응? 커피? 혹시 쿠키도 같이 주는 거냐?
"쿠키 없이 커피를 어떻게 마십니까?"
- 크흐흐흐. 간다. 딱 기다려라. 마침 내가 오카리타 근처에 있거든.
"근처라고요? 뭐야, 설마 저 따라온 겁니까?”
- 무슨, 그런! 절대 아니다! 따라가긴 누가 따라가! 그냥 근처에 볼일이 좀 있었을 뿐이다!
"뭐, 그런 거로 하죠. 가까우면 금방 오겠네요. 저 어디 있는지 아시죠?”
- 크흠, 크흠. 뭐…… 나도 거기 드론 몇 개 있어서.
"그럼 여기서 뵙죠. 얼른 오세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여전히 실드를 두드리고 있는 자들을 쳐다봤다.
이 실드는 상대가 쓰는 마력을 빨아들여 회전에 이용한다. 저런 식으로는 백날 때려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 실드를 부수려면 아까 봤던 그 원통형 무기쯤 되는 걸로 단숨에 박살 내야 한다.
"당장 이걸 없애시오!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진짜 힘을 쓸 수밖에 없소!”
반태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실드에 새로운 술식을 부여하고 마력을 공급했다.
실드가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어어!"
실드를 때리던 자들이 실드에 밀려났다. 갑자기 실드가 밀어내 균형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능력자라서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일단 흐름이 한 번 끊어졌다.
날뛰며 소리치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입을 다물어 조용해진 것이다.
반태수는 그들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그 말에 다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반태수의 말에 다들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금세 사라졌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자르칸 나서스였다.
하지만 자르칸 나서스의 뒤에 거물이 있었다. 아마 누가 오든 그 거물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빨리 이 일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온 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섰다.
"우리 복잡하게 가지 맙시다. 약속하겠소. 순순히 따라온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요.”
반태수는 계속 떠들어 보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조사는 길지 않을 거요. 조사 결과 혐의가 없다면 바로 풀어주겠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 말을 들은 반태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혐의가 있다고 그쪽에서 우기면 조사가 끝나도 안 풀어주겠다는 건데?”
"우리가 왜 굳이 그런 짓을 하겠소?”
“카간 나서스를 우승시켜야 하니까?”
반태수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오? 우리, 그런 사람 아니오.”
반태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반태수는 고개를 돌려 옆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뭔가 해서 반태수가 보는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비행선 한 대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좌중에 싸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
비행선이 착륙하는 모습을 보며 반태수는 실드를 없앴다.
이내 비행선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 데드릭 벨크리스가 나타나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설마 반태수가 말한 믿는 구석이 데드릭 벨크리스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드론 때문에 나서스 가문과 제법 많은 교류를 했다.
그래서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데드릭 벨크리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몇몇은 데드릭 벨크리스와 대화도 나눠본 적이 있었다. 친하지는 않아도 안면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데드릭 벨크리스의 성질이 어떤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자신들을 여기로 보낸 자르칸 나서스에게 연락하는 것뿐이었다.
일단 대표가 나서서 데드릭 벨크리스를 맞이했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그러는 사이 한 명이 조용히 뒤로 빠져서 자르칸 나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지금 이제 무슨 상황이냐?”
"절 데려가서 조사를 한다는 데요? 지금 후계자 경합 중인데.”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썹이 불쾌함을 담아 꿈틀거렸다.
"뭐? 조사?”
데드릭 벨크리스의 시선이 나서스 가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불똥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눈빛으로.
"내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감히 내 커피를 건드려?”
순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 다들 멍하니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걸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표정과 말투만으로도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서스 가문 사람들을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
"아무리 봐도 변변찮은 놈들밖에 없는데? 이 짓거리 하라고 누가 시켰는지 불어라.”
"이, 이쪽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내 인내심이 어떤지 알지? 내가 이 길바닥에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인내심 없기로 유명한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다들 사색이 되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내가 무서워도 이거 반응이 너무 격렬한데? 너희들 진짜 뭐 있구나?”
"아, 아닙니다. 저희는 어르신께서 오실 줄 몰라서 다, 당황했을 뿐입니다.”
"거짓말까지 하네? 이것들 진짜 수상한데?”
그때 한 사람이 황급히 소리쳤다.
"저기 오고 있습니다!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자르칸 나서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정말로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왠지 그 모습이 무서워 그곳에 있던 나서스 가문 사람들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