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후계자 경합 >
=======================
반태수는 한동안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다시 부품 모으기에 열중했다.
비행선을 타고 다니며 부품을 모으다보면, 이동 시간이 워낙 길어서 그동안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다시 부품 사냥을 시작하게 된 건, 이번에 받은 5대 가문의 보상 중 하나인 유적 발굴권 때문이었다.
발굴할 유적을 고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5대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유적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5대 가문에서는 정말 과감하게도 유적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는 아이디를 제공했다.
30개의 유적을 발굴할 때까지 마음껏 열람하라고 하면서.
‘진짜 화끈하다니까.’
반태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태블릿을 조작해 유적 정보를 열람했다.
유적의 수는 정말로 많았고, 그걸 일일이 다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키워드 검색을 이용해야 한다.
보통은 위치나 탐사 내역을 파악하겠지만, 반태수는 그것보다는 이미 실패한 퍼즐 유적을 찾아다녔다.
정말 많은 정보를 확보했고, 그걸 찾아다니면서 계속 정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하는 중이었다.
반태수는 기분이 좋았다.
개척도시 안 받기를 잘했다. 대신 이렇게 꿀 같은 보상을 받지 않았나.
이렇게 유적을 찾아다니면서 부품을 모으다가 설계도 유적을 발견하면 즉시 발굴권을 쓰면 된다.
누군가 참관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참관인을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로 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부품을 모으며 공부와 연구를 병행했다.
반태수는 한 달 정도를 그렇게 보낸 다음에야 크랙톤으로 돌아왔다.
연락이 끊어진 건 아니어서 누구든 용건이 있으면 바로바로 반태수에게 연락을 했다.
그래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반태수가 돌아오자, 밀렸던 만남이 연이어 이어졌다.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가 따로 방문해서 커피와 쿠키를 받아갔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도 방문해서 커피와 쿠키를 받아갔다.
엄대협은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밖으로 나돌아 다녀서 얼굴도 못 봤고.
반태수는 저택에 틀어박혀서, 5대 가문으로부터 받은 위성 제작에 관한 지식정보를 공부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만들 수 있을 듯했다.
그동안 반태수가 해온 공부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생각보다 막히는 구간이 없었다.
한창 위성 제작 공부에 빠져 있을 때,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반태수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멈칫했다.
키에라 나서스였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연락했을까?
키에라 나서는 인연을 맺은 초기에는 집착하듯 반태수에게 수시로 연락을 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좀 뜸해지더니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아무튼 피할 필요는 없으니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어쩐 일입니까?”
-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 연락을 하는 사이였던가요?
반태수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사이다. 그런데 말을 저렇게 하니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 농담이에요. 갑자기 그렇게 정색하기 있어요?
"정색한 거 아닙니다. 대답할 말을 생각한 것뿐입니다.”
- 그게 그거죠.
"아무튼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 우리 예전에 한 약속 기억하죠?
당연히 기억한다. 그 대가로 유물까지 받지 않았던가.
"의뢰 예약 말이죠? 당연히 기억합니다.”
- 그거 지금 하려고 하는데, 가능하죠?
"가능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부품 찾아다니는 것과 위성 연구뿐이니, 시간이야 얼마든지 낼 수 있다.
- 다행이네요. 드디어 우리 가문에서 후계자 경쟁을 시작했어요.
"오카리타로 가면 되는 겁니까?”
- 최대한 빨리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거든요.
"바로 날아가죠.”
- 기다릴게요.
반태수는 전화를 끊고 바로 비행선을 준비했다.
비행선은 정원에 있기에 승무원과 조종사만 부르면 된다.
오카리타로 가는 건 비행기가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비행선을 가져가면 훨씬 편하다.
그곳에 가서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비행선이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비행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가신 가문이라고 해도 비행선을 쉽게 보유할 수 없다.
그러니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는 자들이 비행선을 소유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어쩌면 이 비행선이 후계자 경쟁에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잠시 후, 비행선이 날아올랐다.
***
키에라 나서스는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확인하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수십 개로 쪼개진 작은 화면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드론들이 보내주는 실시간 영상이었다.
영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옆으로 밀자, 새로운 화면들이 또 수십 개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화면으로 가득 찬 페이지가 계속 이어졌다.
키에라 나서스는 그 중 몇 개의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후계자 경쟁이 너무 빨리 시작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시기는 최소 5년 뒤였다.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준비 중이었다.
한데 예상을 깨고 벌써 시작해 버렸다.
심지어 원래는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통보해줘야 하는데, 그조차 생략되었다.
그 바람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모든 후보자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키에라 나서스의 둘째 오빠인 카간 나서스.
그는 가장 탐욕스럽게 능력자를 모으던 후보자였다.
그동안은 다들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철저한 검증 과정 없이 무작정 능력자의 수를 늘리기만 했으니까.
한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렇게 빨리 경합이 시작될 줄 알았다면 키에라 나서스도 카간 나서스와 똑같이 했을 것이다.
카칸 나서스는 보유 능력자의 수가 다른 후보의 몇 배에 달했다.
그런데도 경합이 시작되자마자 기습을 통해 다른 후보자의 주요 능력자들을 제거해 버렸다.
시작부터 몇 발이나 앞서 나간 것이다.
키에라 나서스는 카간 나서스가 가장 경계하는 후보였고, 그래서 그런지 기습에도 공을 들였다.
결국 키에라 나서스는 가장 뒤쳐지는 후보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밀어주는 거야. 애초에 둘째 오라버니를 내정했어.”
너무나도 분했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후계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혀야 한다니.
키에라 나서스는 태블릿을 옆으로 던지고 마른세수를 했다.
답답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호텔의 스위트룸이다.
최상층부터 다섯 개 층을 전부 쓰고 있었다. 남은 건 능력자들이 쓰라고 준비한 것이다.
한데 반 이상이 빈 방으로 남을 것 같다.
지금 그녀의 능력자들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아니, 숨어서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데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사방에 드론이 날아다니고 있으니까.
키에라 나서스가 가진 드론도 많지만, 다른 후보자들의 드론은 훨씬 많다.
특히 카간 나서스는 몇 배나 많은 드론을 보유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게 드론이 많은 줄 몰랐다.
정말로 짧은 기간 동안 작정하고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키에라 나서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가 넘었다.
이제 안전지대를 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경합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뤄진다.
그리고 안전지대를 설정해 오후 6시부터 오전 9시까지 쓸 수 있다.
다만, 안전지대로 오는 도중에 당할 가능성이 높다. 각 후보자들의 안전지대가 어디인지 전부 공개되어 있으니까.
키에라 나서스는 얼른 태블릿을 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자들이 있는 화면을 확인했다.
부디 남은 능력자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중간에 연락을 해선 안 되기에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작전 지시를 할 수 있는 건, 안전지대에 들어온 이후에나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작전이고 뭐고 숫자가 너무 줄어들어서 도망 다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끔 기회를 포착해 기습할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아……!"
방금 능력자 몇 명이 적에게 당했다.
돌아오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이거 진짜 너무하는데?”
마치 다른 후보자들이 전부 짜고서 자신만 공격하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목마다 적들이 숨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다.
능력자들이 전부 죽거나 항복하면 자연스럽게 후보자에서 탈락하게 된다.
키에라 나서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허무해도 너무 허무한 결말이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키에라 나서스는 화들짝 놀라 현관 쪽을 바라봤다.
"올 사람이 없는데?”
그녀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조심성 없이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엽니까?”
키에라 나서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현관 앞에 반태수가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전혀 오는 줄 몰랐다.
이미 반태수를 자신의 능력자로 등록했고, 상황까지 공개했다. 그래서 만일 공항에 내렸다면 모든 후보자들에게 정보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정보를 전달 받은 적이 없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들어오세요."
***
상황 설명을 들으며 태블릿의 화면을 확인한 반태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요?”
키에라 나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봐도 그렇죠? 둘째 오라버니는 마법사도 둘이나 보유하고 있어서 뭘 더 해볼 만한 게 없네요.”
반태수가 마법사라는 걸 알지만, 또 굉장한 실력자라는 것도 알지만,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키에라 나서스의 자조 섞인 말에도 반태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태블릿을 확인했다.
"정말 전부 당했네. 전력 차가 너무 심하니까 제대로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몇 번 손도 안 섞었는데 항복하는 건 좀 심한데?"
반태수의 중얼거림에 키에라 나서스가 한숨을 쭉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반 마법사님도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경합에 참여한 능력자들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싸우다가 당할 것 같은 순간 항복하면 되지만, 그렇게 타이밍 좋게 항복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제법 높은 확률로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다.
반태수는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팀 구분은 저걸로 하는 겁니까? 저 눈에 확 띄는 티셔츠?”
"맞아요. 우리 팀 칼라는 붉은색이죠.”
반태수가 키에라 나서스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반태수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죠?”
"티셔츠 주시죠. 붉은색 티셔츠.”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위험하니까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불러서 열심히 날아왔더니 그만 두란 말입니까? 억울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씨익 웃었다.
"뭐, 한 번 해볼 만한 것 같기도 하고.”
태블릿을 확인하면서 적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능력자인지 조금이나마 파악했다.
저게 평균 실력이라면 혼자서도 대놓고 전부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능력자들을 기습하기 위해 대단한 실력을 가진 놈들을 동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평균 실력은 저보다 훨씬 위일 것이다.
물론 그래도 별 문제는 안 되겠지만.
키에라 나서스가 붉은색 티셔츠를 찾아와 반태수에게 내밀었다.
반태수는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합시다.”
"예? 협상? 무슨 협상 말이죠?”
"의뢰비를 정해야죠.”
키에라 나서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필요한 과정이긴 하다. 솔직히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반태수는 그녀의 표정이 달라진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실패하면 의뢰비는 안 받습니다. 그러니 성공했다고 가정하고 보수를 정해보죠.”
키에라 나서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약간이지만, 희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반태수의 표정과 어조, 태도가 너무나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반태수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이번 경합에서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보수, 중요하죠. 뭘 원하는지 먼저 말씀해 보세요. 성공해서 제가 후계자가 되면 뭐든 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정합니까?"
키에라 나서스는 잠시 고민했다.
"가치에 맞는 대가를 드려야 하는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식량 매입 권한이나, 드론 기술을 일부 지원해 드린다거나, 아니면 돈 정도네요. 아, 유물 좋아하셨죠? 유물도 드릴 수 있어요.”
"유물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방금 말한 것 중에서는 드론이 제일 탐나긴 하네요.”
한데 그건 데드릭 벨크리스를 잘 구워삶으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드론 기술은 전부 제공해 드릴 수 없어요. 투자하신 분이 있어서 그분이 막아놓은 기술은 함부로 쓰는 것도 곤란하거든요.”
그 투자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일단 가능한 부분까지만 받는 걸로 하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니 식량 매입 권한도 일부 드리도록 하죠.”
키에라 나서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 번 도와드릴게요.”
반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키에라 나서스가 반태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아마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키에라 나서스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