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5대 가문이 준 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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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톤에 돌아온 반태수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서 내내 연구와 공부만 했다.
마침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가 주겠다던 과학 관련 서적과 논문들이 도착해 그것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지식에 관한 것은 지구에 가서 모으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지구에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관련 논문을 구할 수 있고, 다양한 전공 서적들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이면세계에서 더 양질의 지식을 구할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지구에서 더 좋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지식을 모아야 했다.
그렇게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반태수는 연구실에 마련된 욕실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은 다음, 오랜만에 연구실을 나섰다.
그동안 진짜 폐인처럼 살았다.
하지만 공부도 많이 했고 얻은 것도 많았다.
또한 자신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새삼 확인했다.
할 만큼 했기에 상쾌한 기분으로 손님들이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손님들이 있는 곳은 저택에서 가장 큰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에 도착하니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데드릭 벨크리스, 살라자 샤마쉬, 오스윈 프리든, 페일라 린치필드였다.
네 사람이 동시에 방문한 건 처음이다.
미리 와 있던 사람들과 만난 적은 있어도.
그래서 좀 신기한 눈으로 네 사람을 둘러봤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좀 앉아라. 정신 사나우니까.”
데드릭 벨크리스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은 해야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와 쿠키를 준비했다.
다른 자잘한 걸 준비하느니 딱 이렇게만 준비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최고의 대접이다.
커피향이 쫙 퍼지자 다들 표정이 달라졌다.
반태수는 커피와 쿠키를 각자 앞에 하나씩 놓았다. 모두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역시 이래야지.’
표정과 기분이 부드럽게 풀리면 무슨 대화를 하든 분위기가 좋게 흘러간다.
이건 일종의 사전작업이었다. 반태수만 할 수 있는.
반태수는 조용히 기다렸다.
손님들이 커피와 쿠키를 즐길 때는 말을 걸어선 안 된다.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미덕이다.
이내 데드릭 벨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대체 집에 콕 박혀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마법사가 집에서 마법 연구를 하지 뭘 하겠습니까?"
"마법 연구를 했다고? 한 달 동안이나?”
이번엔 반태수가 눈을 크게 떴다.
"한달이나 지났습니까?”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날짜부터 확인했다.
전원이 나가 있었다.
옆에서 스마트폰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확인해 보라고 보여준 것이다.
"진짜네.”
정말로 연구실에 들어가던 날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역시 반 마법사님은 집중력이 좋으시군요. 한 달을 집중할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의 찬사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동의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데드릭 벨크리스와 살라자 샤마쉬가 보며 기가 막혀 했다.
"아니, 이걸 칭찬을 한다고? 뭐? 부러워?”
반태수는 괜히 이런 얘기가 길어져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어쩐 일로 이렇게 다들 한꺼번에 오셨습니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내가 전에 얘기했지? 보상이 아주 엄청날 거라고.”
"보상이요? 아, 그거.”
반태수는 머릿속 전체가 연구에 빠져 있다가 방금 나왔기 때문에 자잘한 것들은 전부 묻혀 있었다. 이제 슬슬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툭툭 떠올랐다.
"그동안 뭐 성과가 좀 있었던 모양이군요?”
"성과야 그때 이미 있었지. 지금은 좀 구체화된 것 같고. 아무튼 가문에서는 아주 재미있어 하더라고.”
5대 가문이 그걸로 무슨 이득을 얻건 솔직히 별로 관심 없었다.
차라리 그들이 주겠다던 보상 쪽에 훨씬 관심이 컸다.
"그래서 엄청난 보상이 대체 뭡니까?”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뜸을 들이자, 살라자 샤마쉬가 끼어들어서 입을 열려고 했다.
그걸 본 데드릭 벨크리스가 얼른 말을 던졌다.
"보상은 도시다.”
“예?”
반태수는 보상이 도시라는 말에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시라니,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크랙톤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거 말고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게 뭐가 있었지?
반태수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대체 저게 무슨 말일까? 보상이 도시라니.
데드릭 벨크리스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전에 내가 내 밑으로 오면 도시 하나 준다고 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그때야 당연히 농담이라고 여겼으니까.
"진짜 도시를 보상으로 주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다들 몰려왔지.”
도시를 주는 거랑 다들 몰려온 거랑 무슨 상관일까?
반태수는 좀 의아했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알아서 설명해주겠지.
아니면 나중에 오스윈 프리든에게 들어도 되고.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설명을 이었다.
"일단 적정 보상을 연합 위원회에서 산정했는데, 도시 하나를 내리는 걸로 확정이 났다.”
아마 저 연합 위원회라는 건 5대 가문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서 이룬 조직일 것이다.
5대 가문 전체의 일을 결정할 때 힘을 발휘하는 조직일 가능성이 높고.
"한데 문제가 되는 게, 지금 있는 도시들은 대부분 지배 가문이 있거든. 너 주자고 지배 가문을 내쫓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큰 실수를 한 것도 없는데.”
지배 가문이 도시에 큰 실수를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시정부만 잘 손에 쥐고 흔들면 되는데, 힘 좀 있는 가문이 그거 하나 못할 리 없다.
방탕한 후계자가 나와 난장을 피우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 가문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을 해버린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기존 도시를 줄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일단 개척도시를 주고, 풍부한 지원을 통해 도시의 성장을 돕기로 결정했다.”
개척도시라는 말에 반태수가 눈을 반짝였다.
설마 개척도시도 있을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도시를 하나 새로 세우는 것 아닌가.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개척도시라는 말 처음 들어봤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제야 반태수는 개척도시라는 것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규모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곳들이 있어. 그런 경우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도시들끼리 힘을 모아서 개척도시를 만들지.”
개척도시를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장소 선정을 잘 해야 한다.
도시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식수 확보였다.
확실한 식수원이 있는 넓은 평지를 찾고, 주변 마수를 토벌해야 한다.
그리고 도시 주변에 서식하는 마수가 까다로워선 안 된다. 주변이라는 것은 도시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포함한다.
최소 도시에서 50킬로미터 안쪽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마수가 없어야 한다.
이건 도시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상당히 폭넓은 조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도시가 완성된 후에도 마수 토벌 자체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너무 크면 도시 발전에 지장을 받는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애초에 장소를 잘 선택하면 된다.
반태수는 설명을 들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도시들이 원래 전부 그런 식으로 세워진 거였군요. 흥미롭네요.”
그러자 데드릭 벨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당연히 아니지. 아직 성공적으로 완성한 개척도시는 하나도 없어.”
“예?”
반태수는 진짜 어이가 없어서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봤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당당하게 어깨를 활짝 펴고 말을 이었다.
"도시야 원래부터 있던 거지. 개척도시 중에 제일 오래 진행하고 있는 건 20년이야. 이제 슬슬 도시 같은 모양새가 나오고 있지."
"개척도시가 몇 개나 있습니까?”
"내가 아는 건 총 일곱 개. 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몰래 개척하고 있는 도시도 있겠지.”
"몰래 개척한다고요?”
“5대 가문 모르게 개척하는 거지. 좀 위험한 곳에서. 당연히 불법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보고 개척도시를 만들라고요? 지원해줄 테니까? 별로 안 땡기는데요?”
그런 도시 받아서 뭐 하나. 키우려면 개고생 해야 할 게 뻔한데.
아무리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거기 매달려서 얼마나 신경을 써야하겠는가.
괜히 머리만 아프다.
차라리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조용히 사는 게 훨씬 낫다.
뭐, 솔직히 조용히 사는 건 이제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반태수의 태도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다급히 말했다.
"야야, 그렇게 까칠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야. 5대 가문이 하는 일인데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라고 하겠어? 이미 준비된 개척도시가 있어. 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니까?”
반태수가 더 말해보라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앉아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봤다.
"신흥 귀족들 중에 큰 공을 세운 자들이 있어. 그런 자들에게 개척도시를 만들 기회를 주는 거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살라자 샤마쉬를 바라봤다.
그러자 살라자 샤마쉬가 나머지 설명을 해주었다.
신흥 귀족이라는 것은 대부분 막대한 부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 금력을 이용할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가로 도시의 지배권을 얻는 것이고.
물론 초기 정착에는 5대 가문이 도움을 준다.
그들의 힘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을 처리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소 선정이나 주변 마수 토벌 같은 일들 말이다.
신흥 귀족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모으고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도시로 만들 수는 없다. 빠르게 도시의 외형을 갖추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려면 진짜 사람이 필요했다.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들. 즉, 인구를 늘려야 하는 것이다.
그건 인구가 넘치는 도시의 잉여 인력을 투입하는 걸로 해결한다.
애초에 개척도시를 만드는 이유가 그것이니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여러 도시의 잉여 인력을 받아 정착시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조율하고 중재하고 도와주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설명을 듣는 내내 반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득 될 거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저 고생을 해서 도시의 지배자가 되면 뭐하나.
제대로 된 외형도 갖추지 못하고 인구도 얼마 없는 반쪽짜리 도시가 될 뿐인데.
거길 지배하려면 또 얼마나 골머리를 썩어야 하겠는가.
살라자 샤마쉬는 반태수의 표정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설마 5대 가문이 보상으로 주는 건데, 머리만 아픈 개척도시를 주겠나?”
그제야 반태수가 살짝 관심을 보였다.
“5대 가문이 직접 계획해서 세운 개척도시가 있네. 과학기술 연구와 관련된 생산을 집약시킬 목적으로 세운 도시지.”
"그런 곳이라면 당연히 내정자가 있을 텐데요?”
반태수의 질문에 살라자 샤마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흥 귀족 중에서 가장 자금력도 좋고 능력도 좋은 가문이 그 도시에 올인을 했네. 아예 개척 초기부터 가문 전체가 이주한 거지.”
지금 저런 얘기를 한다는 건, 그 가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리라.
"짐작하겠지만, 문제가 생긴 게 맞네. 반역에 연루되었으니까.”
반태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역이라니.
이면세계에서 활동한 지 얼마 안 됐지만, 5대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음먹으면 웬만한 도시 한두 개쯤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한데 고작 신흥 귀족이, 아직 완성하지도 않은 개척도시에 들어앉아서 반역을 꾀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타노로스와 손잡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숨에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마법이 아닌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거기에 관련된 생산을 집약시킨 도시니 타노로스의 입맛에 딱 맞았겠지. 안 그런가?”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얘기는 향후에도 타노로스가 손을 뻗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은 중심이 되는 시정부와 관련된 공사, 그리고 연구와 관계된 공사는 끝난 상태일세. 대규모 주거지도 마무리 단계이고."
그렇다는 얘기는 상당수의 기업들이 그 도시에 선을 대고 있다는 뜻이다.
저 연구소들을 전부 5대 가문에서 운영하는 게 아닐 테니까.
도시 건설 초반부터 5대 가문에서 개입해 다른 개척도시에 비해 도시도 굉장히 깔끔했다.
아마 개척 도시 중 첫 번째 성공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모자란 것들이 많지만, 그건 차츰차츰 채우면 된다. 아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연구 인력은 이미 도시로 이주한 상태이고, 그들의 가족도 전부 도시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나중에 공장들을 잔뜩 짓고 나면 거기서 일할 사람도 계속 이주하게 될 것이다.
다른 도시와 물류가 이어져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유통체계도 갖춰져 있었다.
‘5대 가문 진짜 장난 아니네.’
반태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뚝딱 도시를 만들어 내다니.
아마 모르긴 해도 다른 개척도시는 상황이 굉장히 안 좋을 것이다.
"초기에 도시 크기를 굉장히 넓게 잡아서 빈 공간이 많네. 거긴 자네가 채우고 싶은 걸 채우면 되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원하는 대로 도시를 채운다는 말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고민하는 반태수에게 말했다.
"뭘 고민하고 있어? 당장 받아들여야지. 향후 거기에 들어갈 자금도 전부 위원회에서 지급하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프리든 가와 린치필드 가에서도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넌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이면 돼.”
반태수가 고개를 돌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를 쳐다봤다.
"필요한 전문 인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 가문은 일단 각 분야의 전문가부터 시작해 다양한 방식으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도시의 지배자가 된다는 건 그런 거야. 뭐, 들어간 기업들이 학을 떼고 도망가면 할 수 없는 거고.”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씨익 웃었다.
"도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아마 돈 걱정 할 일은 평생 없을 거다.”
돈 걱정은 지금도 안 한다.
"좀 더 고민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살라자 샤마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되도록이면 빨리 결정하게. 노리는 신흥 귀족들이 진짜 엄청나게 많으니까.”
반태수는 과연 도시를 얻었을 때,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올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