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데드릭 벨크리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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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릭 벨크리스는 아예 변신을 하고 다시 나타났다.
깨끗이 씻고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와 피부 등에 한껏 힘을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강인한 인상의 사나운 중년인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변신한 모습을 보니 미중년이 따로 없었다.
뭘 어떻게 꾸미면 저렇게 변하는 걸까? 설마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허리띠 아공간에 있던 옷들이 떠올랐다. 아직 버리지 않았지만 조만간 버릴 예정인 옷들.
하나같이 어설픈 중년이 입으면 어울리지 않을 것들뿐이었다.
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걸 입는다고 생각하니 제법 어울릴 것도 같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왜? 난 평소에도 그 새까만 옷을 입고 다닐 것처럼 생겼나?”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좀 그랬다.
"뭐라도 좀 마시면서 얘기하지. 커피?”
"그냥 차로 부탁합니다.”
맛없는 커피는 이제 못 마시는 몸이 되어 버려서.
"여긴 좋은 차가 없어서 좀 아쉬워. 커피는 제법 괜찮은데 말이야.”
데드릭 벨크리스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커피와 차를 찾아서 끓이고 우려서 잔에 담았다.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첫인상이 흐릿해진다.
진짜 무식하게 힘을 발산하는 야만인 느낌이었는데.
“드몬트 차가 최선이군. 맛은 나쁘지 않을 거야.”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 앞에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드몬트 잎으로 만든 차, 이거 굉장히 귀한 거라고 했는데 데드릭 벨크리스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반태수는 차를 한 모금 후룩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가웃거렸다.
예전에 마셨던 것보다 맛과 향이 좀 모자라다.
보아하니 붉은 잎이 아니다. 이게 이런 식으로 떨어진다는 걸 확인했다.
"하여간 좋은 도시에 가야 뭐든 제대로 구할 수 있다니까.”
여긴 크랙톤 최고의 호텔이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는 소모품이나 음료 등은 살라자 샤마쉬가 직접 구비해 주었다. 물론 그의 비서가 더 처리했겠지만.
아무튼 아무리 그라고 해도 도시에 없는 걸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크랙톤에는 붉은 드몬트 잎이 없나보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반태수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셨다. 드몬트 잎의 품질이 떨어지니 그보다는 커피가 낫다고 여긴 것이다.
커피는 제법 괜찮다고 했으니까.
잠시 커피를 즐기던 데드릭 벨크리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반태수를 향해 스윽 밀었다.
손바닥만 한 납작한 은색 케이스였다.
안에 딱 카드 같은 거 한 장 들어있으면 적당할 것 같다.
"뭡니까?”
"선물.”
"아무 선물이나 막 받는 사람 아닙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인상을 팍 썼다. 하여간 한 번도 순순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 점혈인지 뭔지 풀어준 대가라고 생각해. 그냥 넘어가기 그래서 주는 거니까.”
"뭐, 그러시다면야.”
반태수는 씨익 웃으며 상자를 챙겼다.
"안 열어보나?”
"열어봐야 하는 겁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게 아니면 자신이 왜 굳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겠는가. 그냥 내버려두지.
반태수는 피식 웃고는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진짜로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카드는 케이스와 달리 금색이었다.
황금수표는 아니었다. 생긴 것도, 크기도, 표면에 흐르는 마력의 질감도 달랐다.
카드 표면에 굉장히 복잡한 마법진이 양각되어 있었다.
다섯 개의 마법진을 일부, 혹은 전부를 겹쳐서 새겨 놓은 듯한 문양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을 중첩해서 새긴 것이다. 이것 역시 일종의 보안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안 열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이게 뭡니까?”
용도를 알 수 없는 카드인데 그냥 갖고 갔으면 장식품이 될 뻔했다.
"엘비기리드라는 이름 들어봤나?”
"그건 또 뭡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방금 한 질문을 그냥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한 거지 진짜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본 게 아니었다.
한데 설마 정말로 모를 줄이야.
"각종 마도구를 생산하는 업체지. 주로 탈것에 장착할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을 만드는데, 정말로 들어본 적 없나?”
"유명한 회사인가보네요. 제가 그런 쪽으로 별로 관심이 없어서.”
"관심이 없는 것치고는 좋은 방패를 만들어 팔고 있던데. 듀마이어 방패였던가? 보고서 아주 감탄을 했네. 나도 몇 개 들고 다닐까 고민했을 정도니까.”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뭐, 몰라도 되긴 하네. 그 회사가 대부분의 자동차나 바이크에 들어가는 안전 옵션을 제작하긴 하지만, 그거 알아서 뭐 하겠나. 마수 사냥에 쓰는 버스나 트럭에 부착하는 탐지 옵션도 판매하지만 알 필요는 없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뒤로도 엘비기리드에서 뭘 생산하는지 끊임없이 읊었다. 뒤에 꼭 알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듣다보니 정말 대단한 회사였다.
탈것에 장착하는 걸 주로 만든다는데, 그 탈것이 자동차나 바이크 정도가 아니라 비행선이나 비행기도 포함이었다.
심지어 배에도 부착하는 장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충격을 받았을 때, 탑승자의 안전을 확보해주는 실드를 발생시키는 장치라거나, 다가올 충격을 예측해서 실드를 발동하는 장치도 있었다.
마수를 탐지하는 장치도 있고, 마수를 쫓아내는 파장을 내뿜는 장치도 있었다.
도시 밖으로 차량을 끌고 나갈 때 자주 다는 옵션들이었다.
심지어 그건 비행선에도 유효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안전을 확보하는 장비만 제작하는 게 아니었다.
각종 무기도 제작했다. 즉, 공인된 무기 제작 회사였다. 단, 마도구여야만 한다.
마도구가 아닌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회사는 오직 5대 가문 소유의 회사뿐이었다.
즉, 엘비기리드는 5대 가문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유명한 회사였다.
5대 가문 소속이 아닌데도 수백 개 도시에 지부를 두고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 엘비기리드랑 이 카드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카드, 엘비기리드에서 지급한 카드야.”
반태수가 눈을 반짝이며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봤다.
"그걸 가져가면 원하는 장비 하나와 교환해 주지. 판매하지 않는 장비라도 상관없어. 원하는 대로 제작도 해주니까.”
이 카드를 쓰는 사람은 당연히 다들 새로운 장비를 제작하길 원한다고 한다.
어떤 장비든 기존 장비보다 훨씬 비쌀 테니까.
이 카드는 비용에 제한이 없었다.
"그 점혈인지 뭔지 대가로 비행선을 받기로 했잖나. 그래서 그걸 준비했네. 비행선에 뭐 하나 추가로 붙이라고. 뭐, 그 얍삽이가 타는 비행선이라 웬만한 건 다 있겠지만, 그래도 무기 하나 정도 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설명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쓸모 있는 영감 아닌가.
"잘 쓰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어쩐지 애 같은 구석도 있어서 보고 있으면 재미있긴 하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묘한 시선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흐음, 이거 참.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할 것 같아서 반태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슬슬 일 얘기 해야죠.”
"그렇지. 일 얘기가 중요하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뭘 하려는지는 알려줘야겠지. 난 타노로스 놈들을 때려잡을 생각이야.”
반태수가 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거야 평소에도 항상 하고 있는 일 아닌가.
"내가 타노로스 놈들 때려잡으려고 장로 자리도 걷어찬 사람이지.”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반태수는 여전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에잉, 반응이 없으니 말할 기분이 안 나는군. 아무튼 이번에 잡은 타노로스 놈들에게 몇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맞춰보니 이놈들 본거지를 하나 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더란 말이지.”
반태수는 갑자기 피가 끓어올랐다.
"그래서 그 본거지를 치자, 이겁니까?”
"그렇지. 다만 당장 가는 건 아니야. 아직 정보 몇 가지를 더 찾아야 하거든. 하지만 시간문제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그놈들을 치러 갈 수 있어.”
한 달은 너무 길다.
반태수는 끓어올랐던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당장 가는 건 아니었군요.”
생각해보니 당장 가는 것도 문제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와 함께 일정을 빽빽하게 잡아 놨는데, 갑자기 다 취소하자고 하면 두 사람이 뭐라고 하겠는가.
‘일단 당분간은 일정을 좀 타이트하게 잡아야겠네.’
그래야 나중에 데드릭 벨크리스와 일할 때 일정을 중지시켜도 좀 덜 민망할 테니까.
"아무리 봐도 나랑 비슷해. 방금 당장 못 싸운다니까 실망했지?”
반태수는 정색했다. 어딜 봐서 저 미치광이 싸움꾼 영감이랑 절제의 대명사인 마법사랑 비슷하단 말인가.
"그래서 말인데, 그때까지 나랑 훈련이나 같이 하는 게 어떤가?”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진짜 질릴 때까지 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 구미가 좀 당기지 않나?”
반태수는 저 말에 살짝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얼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됐습니다. 전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뭐? 감시하는 벌레들 박멸하는 거? 그거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됐습니다. 섣불리 행동하면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놈들 싹 잡으려면 신중해야 합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보다 더 신중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을 걸? 겉보기에는 이래도 신중하고 냉철한 사람이지. 어떤가, 감시자들 얼른 박살 내고 나랑 훈련하는 것이?”
"안 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진짜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됩니다. 감시자들 중에 타노로스 놈들도 있는 것 같으니까.”
그 말이 데드릭 벨크리스의 스위치 하나를 켜 버렸다.
"타노로스라고?”
데드릭 벨크리스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활활 타오르듯 뿜어져 나왔다.
"감히 그 버러지 새끼들이 자네를 감시하고 있다 이거지?”
"그냥 내버려 두시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해충을 내버려 두면 탈이 나는 법이야. 내가 그놈들만 처리하지.”
"그냥 처리하면 안 된다니까요. 잡아서 정보를 캐야지.”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빤히 바라봤다.
"잡을 자신은 있고?”
"그러는 영감님은, 잡을 자신 있으십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죽일 자신은 있지. 뭐, 사로잡는 건 운에 맡겨야하지만.”
"손 떼십시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게. 그놈들 잡으면 절반은 나한테 넘겨.”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짚어냈다.
"심문이 끝나면 전부 넘겨드리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으하하하! 이거 날 너무 잘 파악했는데? 좋아! 즐겁게 기다리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만 하게. 아, 내가 갖고있던 아공간에 신용카드 몇 장 있는데, 혹시 확인했나?”
"확인했죠. 카드는 돌려드리겠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피식 웃으며 손을 휙 내저었다.
"돌려주긴 뭘 돌려줘? 그거 그냥 갖고 다니면서 써. 한도 때문에 어차피 안 쓰던 카드들이니까.”
아마 저렇게 말해도 한도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돈 쓰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사람이니까.
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 고맙게 받기로 했다. 보아하니 카드 계좌에 돈을 계속 채워둘 모양인데, 앞으로 돈 잘 쓸 수 있겠다.
"앞으로도 타노로스 놈들 잡으면 굴릴 만큼 굴린 다음에 넘겨. 내가 그에 대한 보상은 아주 톡톡히 챙겨줄 테니까.”
어려울 것도 없기에 반태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데드릭 벨크리스가 손을 비비며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자, 그럼 이제부터 자네 뭘 할 건가? 특별한 일 없으면 훈련 삼아 한 판 붙을까?”
데드릭 벨크리스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순간 찾아온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살라자 샤마쉬의 비서였다.
"지분 양도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나?”
"반드시 모셔오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지금 다녀오지 않으면 어르신의 스케줄도 꼬이지 않습니까?”
데드릭 벨크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자고 그따위 계약서를 써가지고.
"그래, 가자, 가.”
데드릭 벨크리스는 살짝 애처로운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다녀오려면 며칠 걸릴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그놈들이나 잡아놔. 훈련 스케줄도 짜보고.”
그 말에 비서가 살짝 끼어들었다.
"이동 시간만 왕복 열흘이 좀 넘을 겁니다. 가서 최소한 이틀은 머물러야 하니 참고해 주십시오.”
최소 12일의 일정이라는 뚯이다.
‘최소 12일인데 그걸 며칠이라고 말한 거야?’
반태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데드릭 벨크리스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지분 양도하는데 왕복 열흘이나 걸리는 도시로 굳이 찾아갈 이유가 있나?’
그런 반태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비서가 슬쩍 설명해 주었다.
"통신회사를 비롯해 5대 가문이 관장하는 회사의 지분은 아무데서나 거래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지정된 곳에서만 거래가 가능합니다."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5대 가문이 지분 변동에 대해 간섭하기 위한 장치인 듯했다.
"넉넉하게 보름 잡으시면 될 듯합니다. 어르신께서 워낙 오랜만에 가시는 거라 잡으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반태수는 비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살라자 샤마쉬의 비서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데드릭 벨크리스가 돌아올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뻔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비서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가 버렸다.
졸지에 호텔 방이 비었으니 오늘은 그냥 여기서 지내기로 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를 만나 싸우고 여기까지 오는 데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새삼 데드릭 벨크리스가 얼마나 시끄럽고 귀찮은 사람인지 머릿속에 다시 한 번 각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 슬슬 퍼즐 유적을 돌아봐야겠다.
내일 오스윈 프리든에게 연락하면 되겠지.
반태수는 가장 큰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잠을 청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