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데드릭 벨크리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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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일단 데드릭 벨크리스를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마법을 준비했다.
그가 깨어나더라도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무력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예전 마법사나 능력자들을 제압할 때는 마력을 못처럼 만들어 몸 곳곳에 박았다.
그걸로 마력의 흐름을 막아 함부로 능력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 반태수의 마력이 상대의 몸에 침투하면서 마비의 효과까지 곁들여진다.
지금까지는 잘 써먹었다.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 같은 자에게는 그런 방식을 썼다간 위험하다.
가진 마력이 너무 많아서 마력의 흐름을 막다가 심어 놓은 마력이 휩쓸려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아마 같은 방법을 고스탁 메르서 같은 8서클 마법사에게 써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애초에 그런 어설픈 방법으로 뛰어난 능력자나 마법사를 제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서 만든 것이 이 마법이었다.
사실 고스탁 메르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예 이런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력의 못을 박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고스탁 메르서를 만나고 나서부터 자신이 그동안 흔히 썼던 방식들이 안 먹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개량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마법, 점혈이다.
맞다. 무협에서 나오는 그 점혈. 몸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말을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는 그거.
반태수는 그 점혈을 마법으로 구현했다.
점혈은 굉장히 정교한 마법이었다.
반태수는 빠르게 술식을 계산했다. 사람마다 적용하는 술식이 달라지고, 현재 몸의 상태에 따라 또 달라지기에 매번 복잡한 술식을 계산해야 한다.
그걸 손가락질 몇 번에 해낼 수 있다니 무협의 점혈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가.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의 몸을 토대로 정확한 술식을 계산한 뒤,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을 데드릭 벨크리스의 몸 곳곳에 심었다.
마법진 자체가 몸에 흐르는 마력을 막고, 생명력을 조절한다.
마력이 움직이는 중요 통로 몇 군데만 막아도 마력을 함부로 쓸 수 없다.
반태수가 심은 마법진이 발동하며 흐르는 마력을 빨아들였다.
그렇게 빨아들인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마법진을 유지한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보유한 마력이 싹 사라지지 않는 한, 무한하게 유지되는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거기까지 한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저 마법진은 마법사라고 해도 쉽게 풀 수 없다. 복잡한 보안 체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심은 사람, 그러니까 반태수의 마력이 열쇠가 된다. 반태수가 특정한 파장의 마력을 넣으면 마법진이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반태수 말고는 저 점혈을 누구도 풀지 못한다.
물론 보안을 뚫을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데드릭 벨크리스가 중간에 깨어나더라도 사고를 치지 못하게 막아놨으니 이제 할 일을 하면 된다.
"일단 제일 고민되는 건……."
이놈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죽이면 안 된다.
아마 데드릭 벨크리스가 자신과 접촉했다는 정보는 벌써 살라자 샤마쉬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살라자 샤마쉬는 반태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죽은 일곱 명의 능력자 중에도 살라자 샤마쉬의 정보원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둘이 접촉했다는 걸 아는데 데드릭 벨크리스가 실종되거나 죽는다면 누가 혐의를 받겠는가.
5대 가문의 결속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기득권에 대항하는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다.
싸우려고 마음먹으면 못 싸울 것도 없지만, 그렇게 하면 잃는 게 너무 많다.
‘나도 아직 더 성장해야 하고.’
그러니 섣불리 죽여선 안 된다.
그럼 살려둬야 하는데, 뒤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중요해진다.
반태수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건,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그럼 일단……."
반태수는 결론을 대충 내린 다음 데드릭 벨크리스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심히 훑어봤다.
싸움에서 승리했으면 전리품을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이제 득템의 시간이 왔다.
일단 옷은 탈락.
여기저기 찢어지고 떨어지고 난리가 났다. 옷에 적용된 술식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도 유물인데 좀 아깝긴 했다.
그나마 남은 술식을 열심히 머릿속에 기록해뒀다.
보안은 문제될 게 없었다. 이 유물 역시 고대문자로 이루어진 보안 체계를 쓰니까.
몇 개의 술식을 건지긴 했는데,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관심을 둔 건 아공간이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쓰는 아공간 유물은 허리띠였다.
하나의 아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아공간이 허리띠에 붙어 있었다.
허리띠 자체가 그런 식으로 아공간을 이용하는 유물이었다.
버클에 가장 큰 아공간이 있고, 버클에서 멀어질수록 아공간의 크기도 작아졌다.
그렇게 총 다섯 개의 아공간이 허리띠 하나에 붙어 있었다.
그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허리띠는 지극히 멀쩡했다.
반태수는 망설임 없이 허리띠를 풀어서 뽑아냈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착용한 모든 것이 유물이었다.
양팔에는 팔찌가 각각 세 개씩 있었고, 반지도 잔뜩 꼈다.
반태수는 팔찌와 반지도 남김없이 빼서 챙겼다.
좀 망가진 것도 있었지만 괜찮다. 술식을 뽑아내면서 망가진 부분을 복원하는 것도 다 성장에 도움이 된다.
"목걸이도 두 개나 차고 있네.”
옷이 막아준 덕분에 목걸이 두 개는 아주 멀쩡했다.
신발도 유물이었다. 돌진에 관련된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아까 마지막에 창처럼 쏘아져 온 것도 이 신발의 능력인 듯했다.
신발을 벗겨서 아공간에 넣어 버리자, 발찌가 보였다.
"진짜 많기도 하다.”
양 발목에 찬 발찌를 뺀 다음 다시 한 번 마력 반응을 확인했다.
뺄 건 거의 다 뺐다. 몸에 피어싱처럼 유물을 박아 넣은 것이 몇 개 있었는데, 그건 그냥 내버려뒀다.
이렇게 많은 유물을 갖고 있는데 왜 그런 식으로 싸웠는지 모르겠다.
이걸 다 활용하면 훨씬 복잡한 싸움 구도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반태수는 전화를 꺼냈다. 이제 데드릭 벨크리스를 처리할 시간이 되었다.
***
살라자 샤마쉬는 서메롯에서 비행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본가에 가든 벨크리스 가문에 가든 비행선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가문이 있는 도시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데드릭 벨크리스를 씹고 또 씹었다.
"이 미친 영감탱이, 계약이 장난이야?”
벨크리스 가문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가를 받아낸다고 해서 속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벨크리스 가문이 데드릭 벨크리스에게 징계를 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5대 가문이 고작 마법사 하나 망가뜨렸다고 해서 가문의 일원에게 징계를 내릴 리 없다.
그러니 배상이나 받고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처음엔 광분해서 날뛰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이 가라앉으니 굳이 벨크리스 가문까지 가서 배상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로 항의를 해봐야 관계만 껄끄러워질 뿐이다.
"그럼 영감탱이한테 직접 배상을 받아야 하나?”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 그 미친개가 순순히 배상을 할까? 아니, 사과라도 할까? 어림도 없다.
그런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미친개라고 불릴 이유도 없지 않겠나.
그렇게 짜증과 울분이 뒤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뭐야?”
전화벨 소리와 진동이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 또 짜증이 났다.
한데 발신인을 보고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와 만났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설마 이거 그 영감탱이가 반의 전화로 건 건가?”
그 생각을 하니 또 분통이 터졌다. 결국 망가뜨렸다는 뜻 아닌가.
살라자 샤마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면 어쩌잔 말입니까?”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그러자 한동안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라자 샤마쉬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상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대체 뭐라고 할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봅니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반태수의 것이었다.
"자, 잠깐! 데드릭 영감이 아니라고?”
- 그 영감님 지금 제 앞에 누워 있습니다만…….
살라자 샤마쉬의 머릿속이 또 한 차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왜 반태수 앞에 누워 있단 말인가. 설마 둘이 친해져서 같이 지내자고 의기투합이라도 한 건가?
"그…… 어떻게 된 건가? 둘이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 갑자기 덤비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때려눕혔습니다. 한데 앞으로의 처리가 좀…….
살라자 샤마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들었단 말인가. 그 데드릭 벨크리스를 때려눕혔다고? 물론 마법으로 싸우긴 했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데드릭 벨크리스와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둘이 접촉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반태수가 망가질 거라고 판단했다.
한데 이겼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살라자 샤마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뒤처리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그 영감을 데리고 적당한 곳에 가 있게. 호텔을 잡아도 좋고 자네 집으로 데려가도 좋네. 깨어나면 발광할지도 모르니까 꽁꽁 묶어서 가둬놓는 걸 추천하지.”
-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잘했네. 그럼 기다리게. 비행선이 오는 대로 곧장 그리로 갈 테니. 마침 내 비행선이 정비 중이라 빨리 움직이지 못했어.”
- 여기 변두리라서 빈 건물이 많으니 대충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았네. 금방 가지.”
살라자 샤마쉬는 비서를 보며 물었다.
"비행선, 언제쯤 오나?”
"두 시간쯤 걸릴 것 같습니다.”
"더 서두르라고 전해. 궁금해서 정말 미칠 것 같군.”
살라자 샤마쉬는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처음에는 반태수가 데드릭 벨크리스를 이겼다는 걸로 흥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감탱이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짜릿했다.
데드릭 벨크리스를 때려눕힌 건 반태수였지만, 왠지 그걸 자신이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와라, 빨리. 얼른 가야 그 영감탱이가 뻗어 있는 걸 구경하지.’
살라자 샤마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운 채 사라지지 않았다.
***
반태수는 데드릭 벨크리스를 데리고 호텔에 갈 생각도 자신의 집으로 갈 생각도 없었다.
만나자마자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다 다짜고짜 공격을 한 놈인데 뭐가 예쁘다고 집으로 데려간단 말인가.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건물 2층 정도가 딱 좋다.
돌조각이 곳곳에 굴러다니는 맨바닥이었지만, 그래도 밖에 내팽개치지 않은 게 어디인가.
데드릭 벨크리스를 2층 바닥에 대충 놓은 다음, 자신은 열심히 여기저기 뒤져서 찾아낸 의자에 앉아 살라자 샤마쉬를 기다렸다.
사실 살라자 샤마쉬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강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기적으로 강한 건 아니었다.
8서클 마법사는 좀 힘들겠지만, 9서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반태수가 평가한 데드릭 벨크리스는 딱 그 정도였다.
물론 가진 유물을 좀 더 잘 활용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의자에 앉아 잠시 데드릭 벨크리스를 내려다보던 반태수는 신경을 끄고 머릿속으로 최근 하던 연구에 집중했다.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그렇게 얼마나지났을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데드릭 벨크리스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꿈틀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반태수는 그제야 그쪽을 쳐다봤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누운 채 눈을 뜨고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보니 반태수가 보인다.
"지금 이거 뭐 하자는 거지?”
반태수는 대답하지 않고 데드릭 벨크리스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대답해라.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별 거 아닙니다. 난동 피울까봐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놨어요.”
"묶었다고?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몸에는 아무 느낌도 없다.”
"몸을 왜 묶습니까. 마력만 묶으면 되는데.”
"뭐라고?”
데드릭 벨크리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마력을 묶는다고? 그게 가능하긴 한가?
그는 어떻게든 마력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력은 마치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당장 풀어라.”
"사람 오면 풀지 말라고 해도 풀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죠.”
"사람?”
"데려갈 사람 불렀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하! 데려갈 사람? 날 팔아먹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내가 누구인 줄 알아?”
반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얘기를 섞어봐야 말이 안 통할 거라고 여긴 것이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반태수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이번엔 말을 돌렸다.
"너 좀 싸우더라.”
반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드릭 벨크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너 같은 재능을 그냥 썩히긴 아깝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같이 타노로스 놈들이나 때려잡자.”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타노로스를 때려잡아도 자신이 알아서 때려잡을 것이다. 굳이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 뒤로도 반태수가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영입 제안을 했다.
말을 할 때마다 조건이 끝없이 올라갔다.
나중에는 도시 하나를 준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물론 믿지 않았다.
"어? 왔나보네요.”
반태수의 말에 데드릭 벨크리스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봤다.
건물 옥상에 비행선이 내려서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잠시 후, 살라자 샤마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그걸 보고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