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셰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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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는 제법 오랫동안 달렸다.
가는 도중 혹시 있을지 모를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특이한 수를 두 번이나 썼다.
승합차가 갈림길을 앞에 두고 있을 때, 광범위하게 마력이 움직였다.
반태수는 승합차를 쫓아가다가 그걸 보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광역 환상 마법?’
승합차는 갈림길에서 그냥 직진했다. 한데 뒤따라가던 반태수의 눈에는 승합차가 우회전 하는 걸로 보였다.
물론 그게 허상이라는 걸 알기에 똑바로 진짜 승합차를 쫓아갔지만.
저 정도로 광범위한 지역에 환상 마법을 펼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승합차에 타고 있던 자들은 전부 능력자였다.
그러니 저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도구나 유물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반태수는 바로 영역화를 통해 승합차 안에 있는 마력을 탐색했다.
하지만 좀처럼 잡아낼 수가 없었다.
아까도 확인했듯이 승합차 안에는 별다른 마도구나 유물이 없었다.
‘그럼 대체 뭐지?’
어느새 환상이 사라지고 다시 승합차가 나타났다.
적당한 지점에서 좌회전을 했기에 아마 아까 우회전 하던 환상에 잠시라도 사로잡혔다면 승합차가 가는 방향을 놓쳤을 것이다.
물론 반태수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지만.
승합차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목적지는 변두리였다.
하지만 그냥 바로 변두리로 가지 않고 빙빙 돌았다. 그렇게 가던 도중 어느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승합차에 탄 능력자 중 한 명이 뒤쪽에 바짝 붙어 혹시 따라오는 차량이나 사람, 드론이 있는지 확인했다. 카메라가 있는지도.
그렇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승합차가 구석진 곳을 지나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승합차의 색이 변한 것이다.
검은색에서 갑자기 물이 쫙 빠진 듯 새하얀 색으로 싹 변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번호판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전혀 다른 번호판으로 교체되어 나타났다.
이것이 두 번째 수였다.
승합차는 입구와 정 반대쪽에 있는 지하주차장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반태수는 그 뒤를 계속 따라가며 정말 감탄했다.
‘이놈들 진짜 조심성 끝내주네.’
이쯤 됐으면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열심히 들키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거기까지 한 승합차는 이제 바로 변두리 쪽으로 향했다.
변두리에 들어간 순간, 승합차가 지나간 뒤, 수많은 사내들이 나타나 길목을 막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척 보기에도 불량스러운 것이 변두리에서 가끔 주먹질이 필요할 때 데려다 쓰는 놈들이었다.
혹시라도 이쪽으로 오는 자들이 있으면 이들이 일차적으로 발견해서 보고를 하는 것이다.
워낙 많은 수가 넓게 퍼져서 어슬렁거리고 있었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변두리에서 이런 일은 일상이니까.
반태수는 저들의 철저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량배들 사이로 지나갔다.
백 명이 넘는 수였지만 워낙 넓게 포진해 있어서 그냥 직진해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승합차는 변두리로 빠진 뒤에도 한참이나 이동했다.
진짜 변두리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췄다.
허름한 건물이 여러 채 있었고, 그 건물들 사이로 낮은 담장이 보였다.
낮은 담장 뒤로는 도시 밖의 풍경이 이어졌다.
반태수의 시력이 워낙 뛰어나기에 저 멀리 어슬렁거리는 늑대 마수도 보였다.
여긴 위험한 곳이다.
일반인에게는.
언제 마수가 습격할지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지내는 사람은 또 얼마나 위험한 놈들이겠나.
그 위험한 놈들 중 하나가 바로 저 건물에 있는 세덤의 조직원들이이라.
승합차에서 내린 자들이 건물로 들어갔다.
반태수는 영역화로 주변 상황부터 살폈다.
각 건물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대부분 능력자였고, 수준은 승합차에 탄 놈들과 비슷했다.
반태수는 일단 승합차로 갔다.
아까 쓴 마법을 생각하면 분명히 유물이 있어야 한다. 한데 영역화로 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찾아보기로 했다.
승합차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일종의 보안 마법이다.
함부로 마력을 투사하거나 외부에서 충격이 있을 때 알람을 통해 경고하고, 전격을 방출하는 마법이었다.
살펴보니 굉장히 정교하게 잘 짜인 마법이었다. 빈틈이 별로 없을 정도로.
승합차에 걸린 마법을 힘으로 우악스럽게 짓눌러 뜯어버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당장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이놈들을 감시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뜯어내야 하니 굳이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반태수는 승합차에 걸린 마법의 몇 개 없는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치 솜에 물을 적시듯 잠식해 나갔다.
반태수의 마력이 승합차에 걸린 마법에 흐르던 마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법을 장악했다.
반태수는 승합차의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이다.
대규모 환영 마법을 쓸 정도면 보통 강력한 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어딘가 흔적이 남았을 거라 확신하고 탐색을 진행했다.
당시 마법의 발동은 분명히 승합차였다.
외부에서 쓴 마법이 아니었다.
승합차 내부를 샅샅이 뒤지던 반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특별한 부분이 없었다.
승합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반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감각을 속이는 게 가능하다고?’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마력에 대한 감각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반태수의 감각은 8서클 마법사인 고스탁 메르서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가만.’
반태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승합차 자체를 찬찬히 확인했다.
차량 전체를 특별한 마법이 꼼꼼하게 두르고 있었다.
반태수는 거기에 관심을 뒀다.
고작 그 정도 보안 마법을 펼치는데 차량 전체를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채운다고?
빈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채워진 보안 마법이 왠지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고작 승합차 아닌가.
아까 그놈들을 보면 대단한 능력자도 아니고. 보아하니 그렇게까지 중요한 놈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승합차 자체에 뭔가가 있는 듯했다.
반태수는 다시 한 번 보안을 뚫고 내부를 확인했다.
몇 가지 알람이나 전격 마법이 나타났다. 보안 마법에 비해 그걸 뚫고 나타난 마법은 정말 허술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반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반태수는 잠시 고민했다. 바로 건물로 들어갈지, 아니면 좀 더 살펴볼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궁금증을 남기면 찝찝해서 제대로 일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분 정도 관찰한 끝에 승합차의 강판 사이에 촘촘하게 깔아둔 마법을 발견했다.
굉장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놀랍게도 강판에 코팅한 재질이 마력을 감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반태수가 확인한 마법들은 그 코팅 위에 설치된 마법이었다.
‘뭐로 코팅을 한 거지?’
전혀 알 수 없는 재질이었다. 반태수는 나중에 이 승합차를 가져가든지, 아니면 코팅만 벗겨서 가져가기로 했다.
연구할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아무튼 알고 싶은 걸 알아내서 속이 시원했다. 반태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금 그놈들이 들어간 건물로 향했다.
***
살라자 샤마쉬 는 도시, 서메롯에서 머물고 있었다.
서메롯은 반태수가 있는 크랙톤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크랙톤에 비해 좀 낙후된 도시였는데, 그래도 도심지는 크랙톤 못지않았다.
서메롯은 크랙톤에서 고작 1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니 원할 때는 언제든 빠르게 크랙톤에 갈 수 있었다.
비행선이 아무리 비행기보다 느리다고 해도 120킬로미터면 가속과 감속을 감안해도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굳이 크랙톤까지 가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 있는 프리든 가와 린치필드 가의 후계자들 때문이었다.
가신 가문은 5대 가문 아래에 있다. 그들은 5대 가문에 충성한다.
하지만 충성한다고 해서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충분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 충성의 토대를 부숴버리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예전 스윌러 벨크리스가 벌인 짓을 전해 들었을 때 한껏 비웃어 주었다.
아무리 5대 가문이라지만 가신 가문의 후계자를 둘이나 억류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살라자 샤마쉬는 가신 가문과 얽히는 상황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메롯에서 정보원들이 보내주는 보고만 확인했다. 여유도 좀 즐기고 말이다.
"하, 너무 오래 쉬었나? 여유를 즐길 틈을 안 주네.”
살라자 샤마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서메롯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였다.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리조트였는데, 거기서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살라자 샤마쉬는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선베드를 깔아놓고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며 운치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 살라자 샤마쉬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경호원들이 쫙 깔려 있는데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특별한 실력자이거나, 아니면 경호원들도 막아설 수 없는 신분을 가진 자, 둘 중 하나였다.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저하고 말 섞는 것도 싫어하시는 분이.”
"나는 널 싫어한 적이 없다.”
"누가 절 싫어한다고 했습니까? 말 섞기 싫어한다고 했지.”
사내가 피식 웃으며 살라자 샤마쉬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살라자 샤마쉬를 마주봤다.
살라자 샤마쉬는 선베드에 누운 채 정확히 호수에 비친 달을 가린 사내, 데드릭 벨크리스를 바라봤다.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저 앞에 어둠이 드리운 호수처럼.
"타노로스 몇 놈을 잡았다고 들었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갔습니까? 이거 내부 단속을 좀 해야겠군요.”
"그건 알아서 하고, 잡은 놈 중에 하나는 나한테 넘기게.”
살라자 샤마쉬가 황당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제가 잡은 자들입니다.”
"누가 아니라고 했나? 정말 잘했네. 그러니 한 명만 넘기게. 알아볼 것이 있으니.”
"타노로스의 본거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잘못 짚으셨습니다. 말단 조직원입니다. 위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더군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럼 정보를 넘기게.”
살라자 샤마쉬가 피식 웃었다.
"애초에 목표는 그거였군요.”
"내가 더 효과적으로 심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네. 심문 중에 폭발하지만 않는다면.”
나노머신을 전부 제거했으니 심문 중에 폭발할 일은 없다.
"하는 김에 나노머신도 좀 나눠줬으면 좋겠군.”
"아주 밑천을 전부 달라고 하시는군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타노로스에는 함께 대응하기로 하지 않았나?”
"함께 대응하는 것과 나노머신을 나눠주는 건 다른 얘기 아닙니까? 나노머신을 연구해서 제대로 된 대응법을 찾으면 그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노머신을 줄 수는 없다. 그건 샤마쉬 가문의 것이니까.
데드릭 벨크리스의 눈이 번득였다.
"역시 사람들이 잘못 보고 있었군. 이렇게나 야심이 넘치는데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다고 여기다니."
살라자 샤마쉬는 대꾸하지 않았다. 포기하긴 누가 포기한단 말인가.
"하긴, 한 번도 직접 자네 입으로 포기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
살라자 샤마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툭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아무튼 심문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꺼지라 이건가?”
"그렇게 과격하게 말씀드릴 리가 없잖습니까. 원하신다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시든가요.”
데드릭 벨크리스가 히죽 웃었다.
"내가 마시겠다고 하면 정말 같이 마셔줄 건가?”
"글쎄요. 생각해보니 주사가 있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주사가 아니라 술을 마시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머리통을 터트린 전적이 있었다.
물론 5대 가문 소속이 아닌 사람이긴 했지만.
"됐다. 술은 즐거운 사람이랑 마셔야지.”
데드릭 벨크리스는 그렇게 말한 다음 살라자 샤마쉬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 요즘 관심 두는 애송이가 하나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이놈의 소문은 왜 이리 빨리 퍼지는지 모르겠군요. 내부 단속을 정말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부 단속은 무슨. 자네가 가진 비행선을 추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잘 알잖나.”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무슨 짓을 해도 떨어지지가 않는군요.”
“아무튼 그 애송이 말이야, 내가 좀 만나 봐도 되겠나?”
살라자 샤마쉬가 눈살을 찌푸렸다.
데드릭 벨크리스가 반태수를 만나면 아마 분명히 망가뜨릴 것이다.
살라자 샤마쉬는 머릿속에서 저울질을 했다.
나노머신보다 반태수 쪽으로 저울추가 살짝 기울었다.
“나노머신을 좀 나눠드리죠. 하지만 많이는 못 드립니다. 저도 확보한 양이 많지 않아서.”
데드릭 벨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고맙게 쓰겠네. 그리고 나도 뭔가 알아내는 게 있으면 반드시 알려주도록 하지.”
"아주 눈물 나게 고맙군요. 따로 포장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데드릭 벨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얻을 건 다 얻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지. 휴가 잘 즐기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드릭 벨크리스가 사라졌다. 세찬 바람만 남기고.
"하…… 진짜 별종이야.”
데드릭 벨크리스는 오직 타노로스만 쫓는 자였다.
벨크리스 가문에서 장로의 자리를 걷어찬 다음, 저러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필…… 쯧."
하필이면 반태수의 정보가 넘어갔다. 당장은 손해를 감수했지만, 데드릭 벨크리스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른다.
어쩌면 반태수를 빌미로 나노머신을 더 요구할 수도 있다.
그때는 거절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호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살라자 샤마쉬는 데드릭 벨크리스가 사라져 다시 잘 보이게 된 호수의 달을 바라봤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다스리게 될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다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살라자 샤마쉬의 입가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